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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28. 지웅知雄 본문

자실산책

성현영의 노자의소 : 28. 지웅知雄

독립출판 무간 2023. 7. 5. 13:09

28. 지웅知雄

 

 

知雄章, 所以次前者, 前章, 明善行之士, 常善救人, 其於救物之方, 猶自未顯. 故次, 此章, 略示其要. 就此章中, 文開四別. 第一, 明去剛取柔. 是, 行人要徑. 第二, 勸遣明歸闇. 爲學道楷. 第三, 示守辱忘榮. 歸根反本. 第四, 顯匠成庶品. 利物忘功.

지웅知雄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도道를 잇고) 잘 일삼는 사람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을 잘 구제한다”라고 설명했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법에 대해 이른바 잘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이게 되었는데, (따라서) 이 장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법) 그것의 본체要에 대해 간략하게 제시한다. 이 장의 가운데를 살피건대, 문단이 펼쳐져 4개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굳셈을 내버리고, 부드러움을 취하라.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일삼는 사람이 본체要로 삼아야 할 길이다.” 두 번째 문단은 권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밝음을 떠나보내고, (그것이) 어렴풋함으로 되돌아가라.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이치를 배우고 일삼는 모범이다.” 세 번째 문단은 제시한다. “욕됨을 지키고, (일부러 일삼은) 영화로움을 잊어버려라.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법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이치의) 근본을 되돌이키는 방법이다.” 네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뛰어난) 장인은 여러 그릇을 (각자의 모습대로) 이루어지게 한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여 그들을) 이롭게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第一, 明去剛取柔, 是行人要徑.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굳셈을 내버리고, 부드러움을 취하라.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법을 배우고) 일삼는 사람이 본체要로 삼아야 할 길이다.”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蹊.

그 수컷다운 바(가 되돌아가게 되는 데)를 알아차리고, 그 암컷다운 바(가 다다르게 되는 데)를 지켜라. (따라서) 천하가 본체要로 삼는 길을 일삼게 된다.

 

蹊, 徑也. 雄, 陽. 是, 剛躁之名. 雌, 陰. 是, 柔靜之義. 知雄, 躁剛, 猛歸死滅. 雌, 柔靜退, 必致長生. 故棄雄而守雌, 可謂天下之要徑.

“혜蹊”는 ‘길’을 의미한다. “웅雄”은 ‘양陽’을 상징한다. (양陽) 이것은 ‘굳셈’과 ‘조급함’을 대변한다. “자雌”는 ‘음陰’을 상징한다. (음陰) 이것은 ‘부드러움’과 ‘고요함’을 대변한다. (이른바) “알아차려야 한다.” “수컷”답게 되면, 조급하게 되고, 굳세게 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죽음과 사라짐으로 되돌아가게 됨을. “암컷”답게 되면, 부드럽게 되고, 고요하게 되며, (따라서 스스로) 물러나게 되고, (따라서) 반드시 (저절로) 오래 감과 (오래) 삶에 다다르게 됨을. 따라서 “수컷다움”을 내버리고, “암컷다움”을 “지키는 일”, “천하”가 본체要로 삼아야 할 길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언제나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덕스러움(德; 性)이 (자신으로부터) 흩어지지 않게 하라.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분별함이 ‘없는’ 지혜로움을 되돌이키게 되고,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離, 散也. 嬰兒, 譬無分別智也. 言人, 常能守靜, 則其德不散. 故能復歸於本性, 歸無分別智也.

“리離”는 흩어짐을 의미한다. “영아嬰兒”는 (일부러 일삼아) 분별함이 없는 지혜로움을 비유한다.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바(靜; 道)를 지킬 수 있게 되면, 그 “덕스러움(德; 性)”이 (자신으로부터) 흩어지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본성(性; 德)을 “되돌이키게 되고”,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아) 분별함이 없는 지혜로움(을 “되돌이키게 되고”,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第二, 勸遣明歸闇, 爲學道楷模.

두 번째 문단은 권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밝음을 떠나보내고, (그것이) 어렴풋함으로 되돌아가라.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이치를 배우고 일삼는 모범이다.”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만물의) 그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밝고 빛남(과 그것을 거스름의 해로움)을 알아차리고, 그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함(과 그것을 거스르지 않음의 이로움)을 지켜라. (그것이) 천하의 모범을 일삼게 된다.

 

白, 昭明也. 黑, 暗昧也. 式, 法也. 自顯明白, 眩曜於人, 人必挫之. 良非智者, 韜光晦迹, 退守暗昧, 不忤於物. 故是德人, 能知白黑利害者, 可謂修學之洪範也.

“백白”은 밝고 빛난다는 뜻이다. “흑黑”은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하다는 뜻이다. “식式”은 법칙이 된다는 뜻이다. 스스로 (자신의) 밝음과 빛남을 드러낸 채, 사람들(의 밝음)을 어둡게 하거나 (그들의) 눈을 부시게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그러한 사람의 밝음과 빛남) 그것을 꺾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진실로 (일부러 일삼아) 지혜롭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밝음과) 빛남을 가리고, 흔적(迹; 일부러 일삼음)을 덮으며, (뒤로) 물러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함과 어렴풋함을 지킨 채, 만물(의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덕스러움德을 지닌 사람이란 (만물의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밝고 빛남(白; 性)”과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함(黑; 性)”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거스르지 않음의) 이로움과 (그것을 거스름의) 해로움을 일삼는 사람인데,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사람이) 닦고 배워야 하는 홍범洪範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언제나 (그) 덕스러움德이 (본래의 면모와 달라진 채, 그것과) 차이나지 않게 하라.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끝점을 되돌이키게 되고,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忒, 差也. 無極, 道也. 常能棄明守暗, 其德不差忒. 復我淸虛, 歸於至道.

“특忒”은 (본래의 면모와 달라진 채, 그것과) 차이 난다는 뜻이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끝점無極”은 도道를 뜻한다. (이른바) “언제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빛남과) 밝음을 내버리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함과) 어렴풋함을 지킬 수 있게 되면, 그 덕스러움(德; 性)이 (본래의 면모와 달라진 채, 그것과) “차이 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본래 면모인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맑고 텅 빈 모습을 “되돌이키게 되고”,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한 도道로 “되돌아가게 된다.”

 

第三, 示守辱忘榮, 歸根反本.

세 번째 문단은 제시한다. “욕됨을 지키고, (일부러 일삼은) 영화로움을 잊어버려라. (그것이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방법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고,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는 이치의) 근본을 되돌이키는 방법이다.”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그 (일부러 일삼아) 총애를 받(아서 높이 받들어지)거나 귀하게 여겨짐(의 공능)을 알아차리고, 그 (욕됨을 당해서 아래로) 낮아지거나 천하게 여겨짐(의 모습)을 지켜라. 천하의 계곡을 일삼게 된다.

 

榮, 寵貴也. 辱, 卑賤也. 處於榮貴, 遂其驕奢, 而福善禍淫. 忽然凋落. 此之榮寵, 翻爲禍基. 若知倚伏不常, 貴爲禍始, 應須自戒. 處於榮華, 恒如卑賤. 故貴以賤爲本, 高以下爲基. 是以知榮守辱, 天下歸湊. 譬彼川谷, 包納虛容也.

“영榮”은 총애를 받(아서 높이 받들어지)거나 귀하게 여겨진다는 뜻이다. “욕辱”은 (욕됨을 당해서 아래로) 낮추어지거나 천하게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부러 일삼아) 총애를 받(아서 높이 받들어지)거나 귀하게 여겨지는 데 머물게 되면, 그것이 우쭐하게 됨이나 뽐내게 됨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복福이자 좋은 바가 화禍이자 해로운 바가 되게 된다. 홀연히, (그것으로) 사그라들게 되거나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일부러 일삼아) 총애를 받(아서 높이 받들어지)거나 귀하게 여겨짐(의 공능)이자, (그것이) 뒤집혀 화禍의 토대가 됨(의 모습)이다. 따라서 언제나 (일부러 일삼아 총애를 받아서 높이 받들어짐에) 기대거나 머물지 않아야 함과 (일부러 일삼아) 귀하게 여겨짐이 화禍를 일삼는 시작점임을 알아차려야 하며, 스스로 (그것을) 경계함과 어우러져야 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총애를 받아서 높이 받들어지거나 귀하게 여겨지는) 영화로움에 머물게 되면, 언제나 (욕됨을 당하게 되고, 따라서 아래로) 낮추어지거나 천하게 여겨지게 된다. 요컨대,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높음’은 ‘낮음’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총애를 받(아서 높이 받들어지)거나 귀하게 여겨짐(의 공능)을 알아차리고, (욕됨을 당해서 아래로) 낮추어지거나 천하게 여겨짐(의 모습)을 지키게 되면”, “천하”가 되돌아가거나 모여드는 바가 되게 된다. 비유컨대, 저 ‘시내’와 “계곡”과 같게 되는데, (저 ‘시내’와 같이 작은 물줄기를) 끌어들이고 받아들이며, (저 “계곡”과 같이 작은 물줄기를) 품어주고 안아주게 된다.

 

常德乃足, 復歸於樸.

(지기웅知其雄, 수기자守其雌하고, 지기백知其白, 수기흑守其黑하며, 지기영知其榮, 수기진守其辱하라. 따라서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바가) 언제나 그러한 덕스러움德이 (그것과 더불어) 비로소 어우러지게 된다. (다시 말해,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함이) 참된 바이자,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본체인 바를 되돌이키게 되고 (그것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樸, 眞本也. 始自知雄, 終乎守辱, 三種修學, 爲道之要. 又如虛谷罄, 無不容, 所以常道常德, 於是乃足. 故能復於眞空, 歸於妙本也.

“박樸”은 (이른바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함이) 참된 바(眞; 性·德)이자, (본래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본체(本; 理·道)이다. (이른바) “지기웅知其雄, 수기자守其雌”를 시작하는 일, (“지기백知其白, 수기흑守其黑”을 거치는 일) “지기영知其榮, 수기진守其辱”을 마치는 일, (이) 3가지 닦음과 배움(의 방법)은 도道의 본체(要; 無爲·自然)를 일삼는다. 다시 말해, (비유컨대) 텅 빈 계곡과 같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텅 빈 채, 품어 안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되면, 따라서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가) 언제나 그러한 도道와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바가) 언제나 그러한 덕스러움德이 (3가지 닦음과 배움의 방법) 그것과 더불어 “비로소 어우러지게 된다.” 따라서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함이) 참된 바이자,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텅 빈 바를 “되돌이키게 되고”,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이자,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본체인 바로 “되돌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第四, 顯匠成庶品, 利物忘功.

네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뛰어난) 장인은 여러 그릇을 (각자의 모습대로) 이루어지게 한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여 그들을) 이롭게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樸散爲器, 聖人用爲官長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함이) 참된 바이자, (본래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본체本인 바는 (만물에) 펼쳐지고 나누어짐으로써, (일삼음의) 쓰임새가 된다. (따라서) 성인은 군주나 우두머리로 쓰이게 되거나 일삼아지게 된다.

 

散, 布分也. 器, 用也. 官, 君主也. 長, 師宗也. 旣能反樸. 還淳, 歸於妙本. 次須從本降迹, 以救蒼生. 布此淳樸, 而爲化用. 故西昇經云, 道遂散. 布分. 旣而爲君以馭世, 爲師以導俗. 聖人, 卽用斯樸散. 而爲馭道之方也.

“산散”은 (깎여서) 펼쳐지고 (잘려서) 나누어진다는 말이다. “기器”는 쓰인다는 말이다. “관官”은 군주를 가리킨다. “장長”은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이른바, 군주나 우두머리는) 먼저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함이 참된 바이자, 본래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본체本인) “박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시 말해,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함이) 소박한 바를 되돌이키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본체本인 바로 되돌아가야 한다. 다음,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본체本인 바를 말미암아 흔적(迹; 일삼음)을 펼침으로써,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백성을 구제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순박한 바와 “박樸”이 (나누어지게 하고) 펼쳐지게 함으로써, (백성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교화되고, (그들의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바가) 일삼아지도록 일삼아야 한다. 따라서 『서승경西昇經』은 일컬었다.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흩어짐에 다다른다. (다시 말해, 도道는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만물에) 펼쳐지고 나누어진다. 이른바, 따라서 (그러한 도道의 모습을 배우고 닦는) 군주는 세상을 부리게 되고, 우두머리가 풍속을 이끌게 된다. (따라서) 성인은 그러한 ‘도道의 흩어짐’(의 모습)을 일삼는다. 다시 말해, (성인은 그러한 ‘도道의 흩어짐’의 모습으로써, 세상과 풍속을) 부리고 이끄는 방법으로 삼는 것이다.”

 

是以大制不割.

따라서 (성인의 다스림을) 큰 다스림이라 일컫는데, (왜냐하면 성인은 자신의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가르거나)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至. 聖神. 力, 不可思議. 三界內外, 無不制伏. 主領, 弘普. 故稱大制. 而享毒群品, 陶鑄生靈. 推功於物. 不爲宰主. 故云不割. 割, 宰斷也.

(“성인”의 다스림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하다. (따라서) 성스럽고, 신령스럽다. (“성인”의 다스림은) 공능(力; 功能)이 있지만, (그것을) 헤아리거나 가늠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성스럽고, 신령스럽다. 그런데) 삼계三界의 안팎이 “다스려지지” 않거나, 엎드리지 않음이 없다. 주장과 명령이 두루 퍼진다. 따라서 일컬었다. “큰 다스림.” 이른바, (“성인”은) 백성을 먹여주고 입혀주며, 삶의 기운을 부추겨 주고 북돋아 준다. (따라서 자신의) 공功을 백성에게 미룬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주재(宰主; 宰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아 자신의 공功을 가르거나) 나누지 않는다.” (이른바) “할割”은 (일부러 일삼아) 재단(宰斷; 裁斷)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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