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성현영의 노자의소 : 31. 가병佳兵 본문
31. 가병佳兵
佳兵章, 所以次前者, 前章, 雖明息兵用道, 而於用道之義未弘. 故次, 此章, 明用道匡時, 須資權實兩智. 就此一章, 義開四別. 第一, 明兵强欲盛, 有道不爲. 第二, 顯應物隨時, 二智優劣. 第三, 明權, 不畏實, 應, 不離眞. 第四, 汎擧軍法, 以明實智之勝.
가병佳兵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이게 된 까닭은 앞 장이 “군대를 (일부러 일삼기를) 쉬고,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도道를 일삼아야 한다”라고 설명했지만, “도道를 일삼는다”는 표현의 의미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이게 되었는데, (따라서) 이 장은 설명한다. “도道를 일삼아 시대를 구제하고자 한다면, ‘권(權; 실용적·작용적 방편)’과 ‘실(實; 실상적·본체적 방편)’의 2가지 지혜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다.” 이 한 장을 살피건대, 의미가 펼쳐져 4개의 문단에 나뉜다.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이미) 군대가 강한데, (보다) 성하게 하고자 하면, 도道가 일삼아지지 않음을 가지게 된다.” 두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세상과 어우러지고, 시대와 아우러짐에 있어서, (‘권權’과 ‘실實’의) 2가지 지혜(의 적용)에는 우열이 있다.” 세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권權’은 ‘실實’을 어그러뜨리지 않아야 하고, (‘실實’과) 어우러져야 하며,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참된 바(인 ‘실實’)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네 번째 문단은 이른바 군대를 일삼는 모습을 예로 들어, ‘실實’의 지혜가 (‘권權’의 지혜보다) 우월함을 제시한다.
第一, 明兵强欲盛, 有道不爲.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이미) 군대가 강한데, (보다) 성하게 하고자 하면, 도道가 일삼아지지 않음을 가지게 된다.”
夫佳兵者不祥之器.
아름답게 가꾼 병마는 좋은 기물이 아니다.
佳, 麗也. 祥, 善也. 雖復霜戈耀日, 寶劍輝天, 此內凶荒之具, 非太平之器也. 內解, 卽三毒六根之兵. 若磨銳諸根, 而貪取塵境者, 不善之行也.
“가佳”는 아름답다는 말이다. “상祥”은 좋다는 말이다. 서릿발같이 날카로운 창끝들이 햇빛에 빛나고, 보배로 장식한 칼날들이 하늘을 비추더라도, 그것들은 (세상을) 흉하게 하고 거칠게 하는 기물이지, 크게 평안하게 하는 “기물”이 아니다. (따라서) 『내해內解』는 일컬었다.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탐냄貪·성냄瞋·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과 (눈眼·귀耳·코卑·입舌·몸身·뜻意의) 육근六根은 (비유컨대) ‘병마(兵馬; 兵)’이다. 따라서 모든 육근六根을 갈아서 날카롭게 하는 일, (날카롭게 갈려진 육근六根으로써) 티끌된 바(塵; 일부러 일삼는 바)를 탐해서 취하는 일은 좋은 행위가 아니다.”
物或惡之, 故有道不處.
모든 사람이 (병마) 그것을 싫어하는데, 따라서 도道를 가진 사람은 (그것에 마음을) 머물게 하지 않는다.
一切人物, 皆畏於兵, 而惡貪. 故有道行人, 不處心於兵戈及貪欲.
모든 사람은 모두 “병마”를 두려워하고, (그것을) 탐하기를 싫어한다. 따라서 도道를 가진 사람이나 일삼는 사람은 “병마”인 창과 탐하는 바인 일부러 일삼고자 함에 마음을 머물게 하지 않는다.
第二, 顯應物隨時, 二智優劣.
두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세상과 어우러지고, 시대와 아우러짐에 있어서, (‘권權’과 ‘실實’의) 2가지 지혜(의 적용)에는 우열이 있다.”
君子居則貴左, 用兵則貴右.
군자가 (평안한 세상에) 머무를 때에는 (양陽으로서 길함과 살림을 주재하는) 왼쪽을 귀하게 여기고, (거칠고 어지러운 세상에 머무른 채) 병마를 일삼을 때에는 (‘음陰’으로서 흉함과 죽음을 주재하는)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다.
有君人子物, 之德. 爲, 君子. 左, 陽也. 主吉主生. 右, 陰也. 主凶主殺. 言君子, 平居之世, 則貴左用文. 荒亂之時, 則貴右用武. 喩行人, 實智, 則貴長生. 權智, 有時, 而殺. 故度人經云, 千千截首, 萬萬剪形也.
임금된 사람이 가져야 할 물건, 그것은 덕스러움(德; 道)이다. (임금된 사람이) 일삼아야 할 모습, (그것이) “군자”(의 모습)이다. “좌左”는 (비유컨대) ‘양陽’이다. 길함을 주재하고, 살림을 주재한다. “우右”는 (비유컨대) ‘음陰’이다. 흉함을 주재하고, 죽임을 주재한다. 이른바, “군자”는 세상이 평안하게 머무를 때 “왼쪽을 귀하게 여긴 채”, ‘문(文;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일삼는다. (세상이) 거칠고 어지러울 때 “오른쪽을 귀하게 여긴 채”, ‘무(武;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일삼는다. 이른바, (도道를) 일삼는 (“군자”와 같은) 사람은 (세상이 평안하게 머무를 때) ‘실實’의 지혜를 쓰는데, 따라서 오래 ‘삶’을 귀하게 여긴다. (세상이 거칠고 어지러울 때) ‘권權’의 지혜를 쓰는데, (따라서 자신의 ‘삶’이 그러한) 시대(와 어우러지는 바)를 가진 채, ‘죽음’을 귀하게 여긴다. 따라서 『도인경度人經』은 일컬었다. “(임금된 사람이 덕스러움德을 가지고 있지 못하거나, ‘군자’의 모습을 일삼지 못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목이 잘리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살이 찢기게 된다.”
兵者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병마는 좋은 기물이 아니고, 군자의 기물이 되지 못하지만, (군자는) 부득이하게 그것을 일삼는다.
疊前來文. 重顯兵是不祥之器. 非君子善人之器. 必須夷凶拯難, 不得已而用之. 權智亦爾. □□致兵革之主, 陰强, 爲殺身之斧. 故曰不祥之器也.
앞 (문단의 내용)을 거듭하여 (이) 문장을 이끈다. (이른바, “夫佳兵者不祥之器”의 뜻을) 거듭하여 밝힌다. “병마는 좋은 기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군자나 (도道를 일삼기를) 잘하는 사람이 쓸만한 기물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른바 (그것으로 인한) 흉함을 다스리고, (그것으로 인한) 어지러움을 바로잡아야 한다. (따라서 “군자”는) “부득이하게 그것을 일삼는다.” ‘권權’의 지혜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른바 그러한 때조차) 병마와 갑주(를 일삼기)에 다다른 군주가 (길함과 살림을 주재하는 ‘양陽’이 아니라, 흉함을 주재하는) ‘음陰’이 강하게 되면, (그것이) 자신을 ‘죽이는’ 도끼가 되게 된다. 따라서 (거듭) 일컬었다. “(병마는) 좋은 기물이 아니다.”
第三, 明權, 不喪實, 應, 不離眞.
세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권權’은 ‘실實’을 어그러뜨리지 않아야 하고, (‘실實’과) 어우러져야 하며,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참된 바(인 ‘실實’)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恬澹爲上, 故不美.
(군자의 마음은 ‘병마’에 대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데, (따라서 부득이해서 ‘병마’를 일삼을 때조차,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최상으로 일삼으며, (‘병마’를)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恬澹, 無爲也. 君子心, 尙無爲. 故雖用兵, 不以爲美也. 喩行人, 雖用權智, 而以實道爲上, 應, 不離眞也.
“염담恬澹”은 (“병마”에 대해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마음이 고요하고 조용하다는 말로서, “병마”에 대해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이른바) “군자”의 마음은 (“병마”에 대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을 (받들어) 높인다. 따라서 (“군자”는 “부득이해서”) “병마”를 일삼지만, (그러한 때조차,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른바, (“군자”와 같이, 도道를) 일삼는 사람은 (“부득이해서”) ‘권權’의 지혜를 일삼지만, (그러한 때조차) ‘실實’의 이치(道; 無爲)를 “최상”으로 삼고, (그것과) 어우러지며,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참된 바(인 그것)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若美必樂之, 是樂殺人, 夫樂之者, 不可得意於天下.
이른바, (아름답게 가꾼 병마를) 아름답게 여기는 일은 반드시 (병마를 아름답게 가꾸는 일) 그것을 즐기는 일이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일인데, 이른바 (사람을 죽이는 일) 그것을 즐기는 사람은 천하에 (그) 뜻을 펼칠 수 없다.
若以佳兵爲美, 卽是愛樂干戈, 則殺人也. 樂殺之夫, 天下共疾. 讎鬩旣多, 不可得意.
이른바, 아름답게 가꾼 병마를 “아름답게” 여기는 일은 곧 방패와 창을 아끼거나 (방패로 막는 것과 창으로 찌르는 것을) “즐기는 일”이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아끼거나 “즐기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일”을 “즐기는” 사람은 “천하”가 모두 (이내 그를) 원망하게 된다. (“천하” 모두의) 원망(을 받음)이 이미 많은 사람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된다.”
第四, 汎擧軍法, 以明實智之勝.
네 번째 문단은 이른바 군대를 일삼는 모습을 예로 들어, ‘실實’의 지혜가 (‘권權’의 지혜보다) 우월함을 제시한다.
吉事尙左, 喪禮尙右, 偏將軍處左, 上將軍處右, 言以喪禮處之.
길한 일에는 왼쪽을 (받들어) 높이고, (흉한 일인) 상례에는 오른쪽을 (받들어) 높이는데, (따라서 군대를 일삼을 때에는) 편장군이 왼쪽에 머물게 하고, 상장군이 오른쪽에 머물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로 하여금) 상례로써 그것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이다.
左, 是吉位. 右, 是喪位. 今, 偏小之將, 居於左邊, 上大將軍, 處其右者, 欲明雖復專命, 卽以死喪之禮, 而安處之.
“왼쪽”은 “길한” 자리(로서 ‘삶’의 자리)이다. “오른쪽”은 (흉한 자리로서) ‘죽음’의 자리이다. 지금, (노자가) 위상이 (낮고) 작은 장군이 (그) “왼쪽”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고, (위상이) 높고 큰 장군이 그 “오른쪽”(의 자리)에 머물게 한다고 한 까닭은 (일부러 일삼아) 내려진 명령에 따르는 것이 될지라도, (“상장군”으로 하여금) ‘죽음’의 예禮로써, 그것을 다스리게 하고, (‘죽음’의 예禮로써, 그것에) 머물게 하기 위한 것임을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殺人衆多, 以悲哀泣之.
(병마와 창끝이 지나가고 머물던 자리에는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의 무리가 많은데, 따라서 (상장군은 그것을) 슬퍼하고 슬퍼하며, 그것에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兵戈行處, 屠害必多. 故上將, 悲哀. 愍其傷害. 旣非用道, 恐濫無辜. 亦解, 殺, 謂敵人. 衆, 謂士卒. 傷己, 德薄, 不能以道化人, 而害, 無辜. 則心悲愍, 而泣之, 明非所樂也.
병마와 창끝이 지나가고 머물던 자리에는 찢김과 다침이 반드시 많다. 따라서 “상장군”은 “슬퍼하고 슬퍼한다.” 그 상처와 고통을 안쓰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도道를 일삼는 것은 고사하고, 무고한 ‘죽음’이 넘쳐남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다른 해석은 이렇다. “‘살인殺’은 (죽임을 당한) 적군을 뜻한다. ‘중衆’은 장수와 군졸을 뜻한다. (이른바, 전쟁은) 자신의 몸을 다치게 하는 일이자, 덕스러움德이 얇아지게 되는 일이고, 도道로써 다른 (나라) 사람을 교화할 수 없게 하는 일이자, (적군의 장수와 군졸을) 해롭게 하는 일이며, 무고하게 죽이는 일이다. 따라서 마음이 ‘슬프게 되고 안쓰럽게 되며’, 따라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따라서 이른바 전쟁은) 즐길 바가 아님이 분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戰勝以喪禮處之.
(군자는) 전쟁에 이기더라도 상례로써,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많은 ‘주검’) 그것에 머문다.
君子, 善人. 貴能用道. 事, 不獲已. 方動兵戈, 雖戰勝前敵, 不以爲善. 故素服而哭, 仍以喪禮葬之. 旣其武不足文, 足明權不及實. 治國, 則不得已而用武. 應化, 則不得已而行權. 以此格量, 故知權劣實勝也.
“군자”는 (도道를 일삼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도道를 일삼기를 잘함을 귀하게 여긴다. (그런데 “군자”는 도道를 일삼기를 잘함을) 받들지만, (그것에) 집착하지는 않을 따름이다. 따라서 병마와 창끝을 일삼아서, 마주한 적과의 전쟁에 이길지라도, (그것을) 좋은 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군자”는) 흰옷을 입고, 곡哭을 하면서, 상례로써 (무고하게 ‘죽임’을 당한 많은 ‘주검’을) 장사를 지낸다. 요컨대, 그 ‘무武’는 ‘문文’을 충족시키지 못(함이 분명)하고, (그) ‘권權’은 ‘실實’에 미치지 못함이 분명하다. (따라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무武’를 일삼아야 한다. (백성과) 어우러진 채, (그들을) 교화함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권權’을 일삼아야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따라서 ‘권權’이 (‘실實’보다) 못하고, ‘실實’이 (‘권權’보다) 나은 바임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자실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현영의 노자의소 : 34. 대도大道 (1) | 2023.07.20 |
---|---|
성현영의 노자의소 : 32. 도상道常 (0) | 2023.07.18 |
성현영의 노자의소 : 29. 장욕將欲 (1) | 2023.07.10 |
성현영의 노자의소 : 28. 지웅知雄 (1) | 2023.07.05 |
성현영의 노자의소 : 27. 선행善行 (3) | 2023.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