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성현영의 노자의소 : 27. 선행善行 본문
27. 선행善行
善行章, 所以次前者, 前章, 正明重靜聖人, 動不乖寂. 故次, 此章, 廣顯此人行能功用. 就此章內, 文有四種. 第一, 明重靜之人, 三業淸淨. 第二, 明重靜之人, 結願堅固, 六根解脫. 第三, 明降迹慈救, 應物, 無遺. 第四, 示師資之道, 修學之妙.
선행善行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자세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해) 고요한 성인은 일삼지만,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잠잠한 바(寂; 性)를 어그러뜨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장은 앞 장) 다음에 놓이게 되었는데, 따라서 이 장은 그러한 사람이 일삼는 모습(行能)과 (그것의) 공능(功能; 功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장의 내용을 살피건대, 문단이 4개로 구성된다.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몸·입·뜻으로 일삼는 바인) 삼업(三業; 몸짓·말글·생각)이 맑고 깨끗하다.” 두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마음으로 일삼는 바인) 발원(發願; 結願)이 굳세고 단단한데, (따라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 감각기관)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풀어헤치게 되고, 벗어나게 된다.” 세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흔적(迹; 일삼음)을 펼쳐서 (세상 사람들을) 자비롭게 구제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어떠한 사람도) 내버리지 않는다.” 네 번째 문단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가볍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요란한 사람이) 스승으로 삼고, 근원으로 삼아야 하는 도(道; 理)와 닦고 배워야 하는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妙; 道)에 대해 설명한다.
第一, 明重靜之人, 三業淸淨.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몸·입·뜻으로 일삼는 바인) 삼업(三業; 몸짓·말글·생각)이 맑고 깨끗하다.”
善行無轍跡
잘 일삼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일삼음의) 흔적(을 가짐)이 없다.
以無行爲行. 行無行相. 故云善行. 妙契所修, 境智冥會. 故無轍跡之可見也. 此, 明身業, 淨.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일삼음(이 ‘있음’)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그러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일삼음의) 상相을 일삼는다. 따라서 (노자는) “잘 일삼다”라고 일컬었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가 어우러지고, (그러한) 바가 닦여진 사람이며, (그러한) 모습의 지혜로움이 어슴푸레하게 아우러진 사람이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일삼음의) 흔적(을 가짐)이 없음이 보여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 문장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몸’이 일삼는 업業이 깨끗함을 설명한다.
善言無瑕謫
잘 말하는 사람은 허물됨이나 질책됨(을 가짐)이 없다.
不言之言. 言而不言. 終日言, 未嘗言. 亦未嘗不言, 故謂之善言也. 莊子云, 言而足者, 則終日言而盡道也. 瑕, 疵疾也. 謫, 過責也. 語黙不二. 故無口過之責也. 本又, 作的字. 謂聖人之言, 旣無的當無所之詣. 此, 明口業, 淨.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말한다.” “말하되”, (일부러 일삼아) “말하지” 않는다. (그러했던 사람은) 하루 내내 “말을 했지만”, 일찍이 (일부러 일삼아) “말한” 적이 없었다. 이른바, (그러했던 사람은 하루 내내 “말했지만”) 일찍이 (일부러 일삼아) “말하지” 않았는데, 따라서 일컬은 것이다. “잘 말했다.” 『장자莊子』는 (「칙양則陽」에서) 일컬었다. “말하지만,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충족되(게 말하)는 사람은 이른바 하루 내내 말하지만, (하는 말이 모두) 도道(에 다다르는 바)를 다하게 된다.” “하瑕”는 허물이 되는 바나 (그로 인해) 병폐가 되는 바를 뜻한다. “적謫”은 잘못이 되는 바나 (그로 인해) 질책을 당하는 바를 뜻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말과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한) 침묵은 (서로 다른) 2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입’이 일삼는 허물되는 바나 (그로 인해) 질책을 당하는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다른 판본에는 (“적謫”이) 적的 자字로 쓰여 있다. (따라서 “무적無的”은) 이른바 성인의 “말”은 (어떤 것을 일삼아야 함이) 마땅하다거나, (마땅하게 어떤 것을 일삼는 데) 이르러야 한다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요컨대) 이 문장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입’이 일삼는 업業이 깨끗함을 설명한다.
善計不用籌算
잘 계산하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아) 계산 도구를 쓰지 않는다.
妙. 悟諸法, 同一, 虛假. 不捨虛假, 卽假體眞. 無勞算計, 劃然明了. 此, 明意業, 淨.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하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한 노자의) 여러 가르침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하나(一; 道)와 어우러지게 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꾸미는 바를 텅 비우게 된다. (그런데 일부러 일삼아) 꾸미는 바를 내버리지 못하거나, 텅 비우지 못하는 사람은 이른바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본체(體; 性)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참된 바(眞; 理)를 (일부러 일삼아) 꾸미게 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아) 계산하는 수고를 가짐이 없지만, (계산이) 확연히 명료하다. (요컨대) 이 문장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뜻’이 일삼는 업業이 깨끗함을 설명한다.
第二, 明結顧堅固, 六根解脫.
두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마음으로 일삼는 바인) 발원(發願; 結願)이 굳세고 단단한데, (따라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 감각기관)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풀어헤치게 되고, 벗어나게 된다.”
善閉無關鍵不可開
잘 잠그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아) 큰 빗장과 작은 빗장을 쓰는 바가 없지만, (그것을) 열 수가 없다.
外無可欲之境, 內無能欲之心. 恣根起用, 用而不染. 斯, 則不閉而閉, 雖閉不閉, 無勞關鍵. 故不可開也. 此, 明六根, 解脫.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밖’으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짐이 없는 (일삼음의) 모습이고, ‘안’으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짐이 없는 마음(의 모습)이다. (따라서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 감각기관)이 제멋대로 일어나게 되고, 일삼아지게 되더라도, (‘밖’으로) 일삼지만, (‘안’으로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물들지 않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아) “잠그지” 않는 “잠금”이자, “잠그지만” (일부러 일삼아) “잠그지” 않음이며, “큰 빗장과 작은 빗장”을 채우는 수고가 없는 잠금이다. 따라서 “열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이 문장은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육근六根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짐이 있는 일삼음의 모습이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짐이 있는 마음으로부터) 풀어헤쳐지게 되고, 벗어나게 됨을 설명한다.
善結無繩約不可解
잘 서약하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세상의) 새끼줄과 같은 서약을 하는 바가 없는데, 따라서 풀어헤칠 수가 없다.
上士, 達人, 先物後己, 發大弘願, 化度衆生, 誓心堅固, 結契無爽. 旣非世之繩素約束. 故不可解也. 然誓心多端, 要不過五. 一者, 發心. 二者, 伏心. 三者, 知眞心. 四者, 出離心. 五者, 無上心. 第一, 發心者, 謂發自然道意, 入於法門也. 第二, 伏心者, 謂伏諸障惑也. 就伏心文, 有文尸三解, 解有三品, 總成九品, 通前發心, 爲十轉行也. 第三, 知眞心者, 有九品, 卽生彼九宮也. 第四, 出離心者, 有三品, 卽生彼三淸, 所謂仙眞聖也. 第五, 無上心者, 謂直登道果, 乃至大羅也. 善結者, 結此五種心. 始終無替也. 此, 明結顧, 堅固.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정도나 수준이) 최상인 사람이자,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백성을 (자신) 앞에 서게 하고, 자신을 (백성) 뒤에 서게 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큰 바를 펼치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백성을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으로 되돌아가게 하거나, 그것을 되돌이키게 하려는) 바람을 넓힌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백성을 교화하고, (그들을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으로) 인도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해) 마음으로 “서약하는 바”가 굳세고 단단하며, (마음으로) 약속하는 바가 어그러짐(을 가짐)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세상의 “새끼줄”이나 약속과는 다르다. 따라서 “풀어헤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서약하는 데”에는 많은 단계가 있는데, 요약하면 5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첫 번째는 발심發心 단계이다. 두 번째는 복심伏心 단계이다. 세 번째는 지진심知眞心 단계이다. 네 번째는 출리심出離心 단계이다. 다섯 번째는 무상심無上心 단계이다. 첫 번째의 발심發心은 이른바 저절로 그러한 도道에 대한 뜻을 펼치는 단계로서, (저절로 그러한 도道에 대한) 가르침의 문門으로 들어오는 단계이다. 두 번째의 복심伏心은 이른바 여러 (저절로 그러한 도道에 대한 뜻을 펼치는 것을) 가로막는 바와 미혹시키는 바를 굴복시키는 단계이다. (두 번째의) 복심伏心에 관한 문장을 살피건대, (그 하나의) 문장에 대한 3가지 주장이 있고, (그 하나의) 주장에 대한 3가지 해석이 있어서, 모두 9가지(의 세부적인 단계)를 이루는데, 앞의 발심發心을 아우르면 (모두) 10가지의 세부적인 단계를 가지게 된다. 세 번째의 지진심知眞心은 (또한) 9가지의 세부적인 단계를 가지는데, 이른바 (비유컨대 저절로 그러한 도道의 뜻을 배우고 닦아서 깨닫는 수준에 따라) 생겨나게 되거나, 이르게 되는 9가지 궁전(宮; 仙界)이다. 네 번째의 출리심出離心은 (또한) 3가지의 (세부적인) 단계를 가지는데, 이른바 (저절로 그러한 도道의 뜻을 배우고 닦아서 깨닫는 수준에 따라) 생겨나게 되거나, 이르게 되는 삼청(三淸; 太淸·上淸·玉淸)의 단계로서, 이른바 신선仙·진인眞·성인聖의 단계이다. 다섯 번째 무상심無上心은 이른바 (저절로 그러한) 도道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여 (가장 높은 하늘인) 대라천大羅天에 이른 단계이다. “잘 서약하는” 사람은 이 5가지 단계의 마음을 발원한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 어디서나 그것을) 내버리지 않는다. (요컨대) 이 문장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발원이 굳세고 단단함을 설명한다.
第三, 明降迹慈救, 應物無遺.
세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무겁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고요한 사람은) 흔적(迹; 일삼음)을 펼쳐서 (세상 사람들을) 자비롭게 구제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어떠한 사람도) 내버리지 않는다.”
是以聖人常善救人, 而無棄人.
따라서 성인은 언제나 사람들을 잘 구제하는데, 왜냐하면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내버리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聖人, 卽是前三業淸淨, 六根解脫之人也. 爲能發弘誓願, 救度衆生. 故常在世間, 有感斯應, 慈善平等, 終不遺棄也.
“성인聖人”이란 이른바 앞 (문장)이 일컬은 (몸·입·뜻이 일삼은) 3가지 업(業; 몸짓·말글·생각)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자,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근(六根; 감각기관)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으로부터) 풀어 헤쳐지고, 벗어난 사람이다. (따라서 “성인”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한 굳세고 단단한) “서약”을 펼칠 수 있게 되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세상 사람들을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되돌아가게 하고, 그것을 되돌이키게 하고자 하는) 바람을 넓힐 수 있게 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게 되고, (그들을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으로) 인도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성인”은) 언제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세상에 자리한 채,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한) 미혹됨(을 가짐)이 있는 그것이 (자신과 더불어) 어우러지게 하고,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자애로움과 “잘함”이 평등해지게 하는데, 끝끝내 (사람들을) “내버리지” 않는 것이다.
常善救物, 而無棄物.
언제나 사물을 잘 구제하는데, 왜냐하면 (알아차림을 가짐이 없는) 사물일지라도 내버리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先, 擧人. 者, 表恩被有情. 後, 擧物. 者, 示仁覃無識. 亦言救人, 直據黔首. 救物, 授及四生也.
앞 (문장)은 “사람”(을 “구제하는” “성인”의 모습)을 설명했다. (이른바) 앞 (문장)은 설명했다. “(성인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마음(情; 心)을 가진 사람에게까지 (그) 은혜로움이 입혀지게 한다.” 이어서, (이 문장은) “사물”(을 “구제하는” “성인”의 모습)을 설명한다. (이른바, 이 문장은) 설명한다. “(성인은) 알아차림(識; 情)을 가짐이 없는 바(인 사물)에게까지 (그) 어짊이 미쳐지게 한다.” 여기서, 이른바 (“성인”이) “구제하는 사람”이란 바로 검은 머리의 무리를 가리킨다. “구제하는 사물”이란 바로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의) 4가지 무리를 가리킨다.
是謂襲明.
이것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수준이 성스럽고, 정도가) 밝은 도道를 잇고 일삼는 일이다.
襲, 承也, 用也. 此, 卽結歡常善. 聖人, 利物, 無棄. 可謂承用聖明之道也.
“습襲”은 잇는다는 말이자, 일삼는다는 말이다. 이 문장은 이른바 결론지어 찬탄한다. “(이른바, 성인은) 언제나 (사람들과 사물에 대한 구제를) 잘한다. (다시 말해) 성인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데, 내버리는 바가 없다.” (이것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수준이) 성스럽고, (정도가) 밝은 도道를 잇고 일삼는 일이다.
第四, 示師資之道, 修學之妙.
네 번째 문단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가볍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요란한 사람이) 스승으로 삼고, 근원으로 삼아야 하는 도(道; 理)와 닦고 배워야 하는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妙; 道)에 대해 설명한다.
故善人, 不善人之師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수준이 성스럽고, 정도가 밝은 도道에 대한 이음과 일삼음을 지향하고 추구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잘하지 못하는 사람의 스승이 된다.
善人, 卽向來襲明之人也. 言此人, 恒懷大心. 先物後己. 引導衆生. 允當宗匠.
“선인善人”이란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수준이 성스럽고) “밝은 도道에 대한 이음과 일삼음”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다. 이른바, 그러한 사람은 언제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큰 마음을 품는다. (따라서) 백성을 (자신) 앞에 서게 하고, 자신을 (백성) 뒤에 서게 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백성을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으로 되돌아가거나, 그것을 되돌이키도록) 인도한다. (따라서) 진실로 마땅히 큰 스승이 되게 된다.
不善人, 善人之資.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의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덕스러움德을 더하고 이루는) 근원이 된다.
資, 用也. 亦是助益之義. 言善人, 恒在有中, 化導群品. 卽用不善之類. 而爲福田. 以彼衆生, 益成我德故也.
“자資”는 일삼는다는 말이다. 또한, 그것은 돕는다, 더한다는 말이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수준이 성스럽고, 정도가 밝은 도道에 대한 이음과 일삼음을 지향하고 추구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언제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세상의) 가운데 자리한 채,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사람들을 교화하고 인도한다. 이른바,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잘하도록”) 일삼는다. 따라서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복전福田을 일삼게 된다. 요컨대, 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사람들이 나의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덕스러움德을 더하고 이루는 근원(故; 資)이 되는 것이다.
不貴其師, 不愛其資.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일은 그 근원을 아끼지 않는 일이다.
不貴其師, 無能化也. 不貴其資, 無所化也. 前, 以聖導凡, 勸令修學. 今, 明凡聖平等. 故遣師資, 斯則從淺, 至深, 漸階衆妙也.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교화할 수 없게 된다. “그 근원”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교화되는 바가 없게 된다. 앞 (문장)은 “성인은 보통 사람을 인도한다”라고 일컬음으로써, (보통 사람이 성인의 모습을) 닦고 배우기를 권하고 명했다. 지금 (이 문장)은 설명한다.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의 수준, 이른바 리理인 본성의 수준에 있어서) 보통 사람과 성인은 평등하다. 따라서 (그) ‘스승’과 ‘근원’을 (멀리) 떠나보내는 일, 그것은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얕은 바를 말미암는 일이자,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깊은 바에 다다르는 일로서,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하던 성인의) 수준이 점점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보통 사람의 어렴풋한 바가 되는 일이다.”
雖知大迷, 此謂要妙.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이) 크게 미혹되는 바를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것이 이른바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妙; 道)를 본체要로 삼는 일이기 때문이다.
師資, 兩忘. 聖凡, 一揆. 俗智分別, 雖似大迷. 據理而言, 實成, 要妙.
(지금의 세상 사람들에게 그) “스승으로 삼는 일”과 “근원으로 삼는 일”은 모두 잊어버려진 채, “성인”과 보통 사람은 하나로 여겨진다.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은) 지혜로써 분별하는데, 따라서 크게 미혹되는 듯하다. (그러나) 리(理; 性)에 근거하여 말하건대, (그 “스승으로 삼는 일”과 “근원으로 삼는 일”을 모두 잊어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진실로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바를 이루는 일이자) 진실로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바(妙; 道)를 본체(要; 體)로 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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