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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우리는 생산자가 아니라 대기자일 뿐이다!

독립출판 무간 2016. 8. 20. 16:11

 

먹는 것은 환경문제의 중심 테마다. 우선 '음식은 살아 있는 것'이라는 점부터 확인해 보기로 하자. 살아 있는 동식물은 교배, 교미하고, 성장, 성숙하며, 늙고, 죽고, 다른 생명을 키우는 각각의 독자적인 시간을 각각의 속도로 살아 내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인류는 다양한 종의 생물 시간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 왔으나, 점점 이 느릇한 '생명 프로세스'를 지루해 하며,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살아가고 있다.

 

 E.F.슈마허의 명저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첫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현대사회는 몇 가지 아주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데, '생산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신념이 그 중 하나이다."

 

슈마허는 먹거리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시간을 사는 것인데, 인간이 안이하게 그 과정에 개입하거나 차미 나신들이 '생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생각해 보면 생산자라는 말은 참 기묘한 단어다. 특히 제1차산업에서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생산하는 것일까?

 

민속 연구가로 특히 도호쿠 지방의 음식 문화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춘 유키 도미오는 생산자 대신에 '대기자'라는 말은 제안한다. 그는 '농사를 짓는다는 건 작물의 시간을 함꼐 살아내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저 족에서 배추가 오면 나는 그걸로 쓰케모노(일종의 일본식 백김치)를 만들어야지. 그리고 양배추가 오면 그걸로 양배추 롤을 만들고...' 이처럼 이쪽 사정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채소의 형편에도 호흡을 맞추는 것이다. '인간의 척도와 작물의 척도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서로 조화롭게 맞추는가'하는 데, 농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근대 농업, 축산업, 양식업에서는 '더 빨리, 더 많이'를 목표로 내걸고, 가속화되는 산업 시간을 강요함으로써 생물 본래의 시공간을 단축시키려고 애써 왔다. 예를 들어 양계장에서 사육되는 닭들은 한 평 공간에 스무 마리가 들어가 있고, 그들의 하루는 열두 시간으로 단축되어 있다. 북미에서는 보통 연어에 비해 열 배나 더 빨리 성장하는 이른바 '프랑켄 새먼(프랑켄푸드frankenfood의 한 종류이다. 공포 소설의 주인공인 프랑켄슈타인을 뜻하는 단어로, 프랑켄푸드는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유전자 변형 식품을 뜻하는 단어로, 프랑켄 새먼은 유전자 변형 연어를 뜻한다)이 개발되었다. 속성 재배, 단일 재배, 과학 비료, 농약, 항생 물질, 호르몬제, 유전자 조작, 유전자 복제 기술. 이러한 것들은 동식물이 본래 필요로 하는 시공간을 좁혀 산업의 가속화된 시간에 무리하게 짜맞추려고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생물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시간을 박탈했을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생명은 혼란을 겪게 되며, 불안정해지고, 열성화되며, 폭력적으로 될 것이다.

 

인도의 환경 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반다나 시바는 이러한 현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붙잡힌 동식물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일들이 실은 우리 인간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슬로푸드란 먹거리를 통해 '기다리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것이 아닐까. 식탁에는 여러 다양한 시간들이 혼재해 있다. 흙 속의 무수한 미생물이 식물을 키우는 시간, 계절마다의 바람과 비, 벌레들의 시간, 비가 땅 속에 스며들면 식물의 뿌리가 그것을 빨아올리는 시간, 지형이나 기후, 식생, 생물의 성장에 맞추어서 그에 따라 적절하게 베풀어지는 농부들의 시간, 그들의 삶의 리듬, 그리고 음식물이 도시로 운반되는 유통의 시간, 조리와 숙성의 시간, 그 먹거리를 가족과 친구들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천천히 즐기는 시간. 또 그러한 음식을 제단에 바쳐지기도 함으로써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과의 시간과도 연결되어 있다.

 

상대가 자연이든 사람이든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게 하는 일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 요컨대 함께 살아가는 이에 점점 더 서툴러지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왜냐하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지금 남을 사랑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기다림을 뺀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는 또다른 삶, 슬로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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