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나쁜 디자인 대 좋은 디자인, 자동판매기와 물통 본문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면서 생각날 때마다 길가에 서 있는 자동판매기의 플러그를 뽑으며 다녔던 사람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의 기분을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일본은 23명당 한 대 꼴로 자판기가 할당된 이른바 자판기 왕국이다. 전국 자동판매기에 의한 매상은 무려 7조 엔 이상이라고 한다. 총 550만 대의 자판기 가운데 냉장기능을 갖춘 '청량음료' 자판기만 약 260만 대이다. 그러한 것들을 24시간 가동하여 대기시켜 두기 위해서는 원자력 발전소 1기 분의 전력이 들어간다고 한다. 언제 올지도 모를 손님을 위해 항상 캔이나 병을 차게 혹은 따뜻하게 유지시키면서 잠자코 기다리고 있는 기계. 거기서는 얼만만큼의 쓰레기가 배출되는 것일까?
그 안에 든 내용물 또한 실로 미심쩍은 것들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나쁜 디자인(bad design)' '나쁜 테크놀로지(bad technology)'가 아닐 수 없다. 이토록 많은 자동판매기들을 늘 '플러그'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참고 보기 힘들어 '언플러그'하는 사람 중 과연 어느 쪽을 비상식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며 자동판매기를 변호한다.
"일년 내내 전기를 사용하는 것은 전력 낭비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사실 자동판매기의 매상은 편의점보다 많은 데다, 편의점은 자동판매기보다 훨씬 더 많은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 최근 자동판매기의 에너지 절감 대책도 추진 중에 있으므로 그렇게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사람은 일본이 세계 제일의 자판기 왕국인 것은 그만큼 치안이 잘 되어 있는 나라라는 뜻이므로, 오히려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냐고도 했다.
나는 자동판매기도 편의점도 싫다. 또한 그런 것들밖에 자랑할 게 없는 일본 사람들이 딱하다는 생각도 든다. 첫째, 자동판매기는 도무지 아름답지가 않다. 어디를 가나 자동판매기 투성이인 일본은 볼썽사납다. 십수 년 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1990년대 초에 들어온 내 눈에 자동판매기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것은 일본 문화가 쇠약해져 가고 있는 생생한 증거처럼 보였다.
최근에는 한밤중 시골 거리의 어둠 속에서도 홀로 형형히 빛나고 있는 자동판매기를 흔하게 본다. 갑자기 집에 손님이 찾아오면 주부가 얼른 근처 자동판매기로 달려가 앞치마에 캔이나 페트병에 든 음료를 담아 가지고 오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럴 때 시골 주부들이 한숨을 돌리면서 자판기 덕분에 이렇게 편해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다. 이제 옛날처럼 부엌이나 툇마루에 걸터앉거나 손님과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우는 '불편'과 '번거로움'은 없어졌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사는 기술'이 또한 한 가지 사라져 버렸다. 제대로 된 인간 관계가 또 하나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자동판매기를 보이콧하기로 했다. 대신 물통을 가지고 다닌다. 한 사람이 매일 사서 마시는 페트병이나 캔 음료 두 개를 사지 않는다면, 1년이면 730개, 돈으로 치면 약 8만 7천 600엔이 절약된다. 또 에너지 절약과 이산화탄소의 배출 감소에도 공헌할 수 있다. 보온 물통 속에 자신이 좋아하는 차를 담아 가지고 다니면 기분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
'수이토(물통의 일본어)'는 하카다 사투리로 '나는 널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렇다. 친환경적인 삶이 바로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이며, 세계를 환경 위기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 역시 사랑이다.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는 또다른 삶,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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