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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34. 대도大道 본문

자실산책

성현영의 노자의소 : 34. 대도大道

독립출판 무간 2023. 7. 20. 18:07

34. 대도大道

 

 

大道章, 所以次前者, 前章, 明賓服, 有道之君, 由能自知自勝. 此章, 明能成光大之業, 皆爲法道忘功. 就此門中, 分爲三別. 第一, 標大道汎兮. 示左右略無封畛. 第二, 功成不有. 明小大難, 與爲名. 第三, 擧聖人不貴其身, 全光大之業.

대도大道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설명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손님이 되어 따르는, 도道를 가진 군주는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자신(自; 性·理)에 대한 알아차림을 말미암음으로써, (‘이내’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자신(自; 心·身)을 이겨낼 수 있다.” (따라서) 이 장은 설명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손님이 되어 따르는) 빛나고 큰 업적을 일삼고 이루기 위해서는 이른바 도道를 법칙으로 삼음과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림을 일삼아야 한다.” 이 장(章; 門)의 가운데를 살피건대, (하나의 큰) 장이 나뉘어, (작은 문단) 3개를 일삼는다.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정도가) 큰 도道는 (그 일삼는 모습이 비유컨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듯 한다.” (그리고) 제시한다. “(따라서 그) 왼쪽과 오른쪽은 (대상에 대한 분별을 가짐이 거의 없는데, 비유컨대) 군주가 (사람을 가려서) 내려준 두렁길(을 가짐)이 거의 없다.” 두 번째 문단은 (제시한다.) “(도道는 자신의) 공功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명한다. “(따라서 도道의 위상에 대한 이름인) ‘작은 바’와 ‘큰 바’가 어지러워지게 되고, 더불어 (그러한) 이름이 일삼아지게 된다.” 세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성인은 그 (자신의) 몸을 (세상 사람들의 몸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따라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손님이 되어 따르는) 빛나고 큰 업적(을 가짐)이 온전해지게 된다.”

 

 

第一, 標大道汎兮, 示左右略無封畛.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정도가) 큰 도道는 (그 일삼는 모습이 비유컨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듯 한다.” (그리고) 제시한다. “(따라서 그) 왼쪽과 오른쪽은 (대상에 대한 분별을 가짐이 거의 없는데, 비유컨대) 군주가 (사람을 가려서) 내려준 두렁길(을 가짐)이 거의 없다.”

 

大道汎兮, 其可左右.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정도가) 큰 도道는 (그 일삼는 모습이 비유컨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듯 하는데, (따라서 그것은 대상을 분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왼쪽으로도 가닿고, 오른쪽으로도 가닿는다.

 

汎, 汎, 無係也. 亦普遍之名. 言大道, 虛玄. 汎然. 無著. 慈悲, 普遍感, 而遂通. 雖復非陰非陽, 而應乎左右. 欲明方圓任物, 罄無不宜. 故莊子云, 有左有右, 有義有倫.

“범汎”은 (그 일삼는 모습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듯 한다는 말로서, (가닿는 대상에 대한) 얽매임(을 가짐)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가닿는다는 뜻이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정도가) 큰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텅 비어 있고, 어렴풋하다.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듯 하고”, 집착하는 바가 없다. (따라서 비유컨대 그) 자비로움이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느껴지게 되고, 따라서 다다르게 되며, 어우러지게 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정도가 “큰 도道”는 비유컨대 일부러 일삼아 분별된 바로서) ‘음陰’도 아니고 ‘양陽’도 아닌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대상을 분별하지 않은 채) “왼쪽”(의 대상)이나 “오른쪽”(의 대상)과 아우러진다. (요컨대, 이 문장은 “큰 도道”는 모난 것은) 모나게 (둥근 것은) 둥글게 만물을 대하는데, (다시 말해 만물을 대함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아 차별하지 않는데, 따라서 만물을 대함이) 모두 마땅하지 않음이 없게 됨을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면서부터) ‘왼쪽’이 생겨나게 되었고, ‘오른쪽’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의義’가 생겨나게 되었고, (효성스러움이나 자애로움과 같은) 덕목(德目; 倫)이 생겨나게 되었다.”

 

萬物恃以生而不辭.

(따라서) 만물은 (도道에 힘입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살아가게 되지만, (그것이 도道의 공功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一切萬物, 恃賴至道, 而得生滅. 慈救善誘, 終不辭, 憚也. 又云, 物, 亦不謝, 生於自然.

모든 “만물”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한 “도道”를 믿고, (그것에) 힘입어, “살아감”과 사라짐을 얻게 된다. (따라서 “도道”는 모든 “만물”을) 구제하는 데 자비롭고, 인도하기를 잘하지만, 끝끝내 (그렇게 한 자신의 공功을) “말하지 않고”, (그렇게 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다른 해석은 이렇다. “(따라서 모든) 만물 역시 (도道의 공功을) 말하지 않는데, (자신들의) 살아감(과 사라짐)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 곧)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 道)를 말미암고, (그것과) 어우러진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第二, 功成不有, 明小大難與爲名.

두 번째 문단은 (제시한다.) “(도道는 자신의) 공功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명한다. “(따라서 도道의 위상에 대한 이름인) ‘작은 바’와 ‘큰 바’가 어지러워지게 되고, 더불어 (그러한) 이름이 일삼아지게 된다.”

 

功成不名有.

(따라서) 공功이 이루어지지만, 이름 지어져 불리거나 (그것이) 소유되지 않게 된다.

 

生化群品. 至功潛被. 而歸功於物. 故不有功名.

(도道는) 만물을 “살아가게 하고”, 변화되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공功”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공功”이 (비유컨대 물속에) 잠긴 채, (만물에게 옷처럼) 입혀지게 됨에 다다르게 된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공功을 만물에게 되돌아가게 한다. 따라서 (자신의) “공功”이나 (그것에 대한) “이름”을 “소유하지 않게 된다.”

 

衣被萬物不爲主, 可名於小.

(비유컨대, 도道가) 만물에게 옷을 지어 입힘은 일부러 일삼아 주재된 바가 아닌데, 따라서 “작은 바”라고 이름 지어져 불릴 수 있다.

 

衣被萬物. 陶鑄生靈. 而神功潛被. 不爲主宰. 旣俯就於物, 宜稱其小. 此, 不小, 而小也.

(비유컨대, “도道”는 “만물”의) “옷을 짓고”, “만물”에게 (옷을) “입힌다.” (“만물”의) 삶을 (질그릇을 만들 듯, 진흙을) 빚어서 구워내고, (“만물”의) 신령스러운 바(靈; 性)를 (놋그릇을 만들 듯, 쇳물을) 부어서 찍어낸다. 그런데 (그러한 “도道”의) 신령스러운 공功은 (물속에) 잠긴 채, (“만물”에게 옷처럼) “입혀진다.” (왜냐하면, “도道”는 자신의 공功에 대한) “주재함을 일삼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물”의 입장에 서서, “(공功) 그것이 작다”라고 일컫는 것은 마땅하다. (요컨대, “도道”의 “작음”) 그것은 (일삼는 바가) “작음”이 아니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작음”인 것이다.

 

萬物歸之不爲主, 可名於大.

만물이 (도道) 그것에게 되돌아감은 일부러 일삼아 주재된 바가 아닌데, (따라서) “큰 바”라고 이름 지어져 불릴 수 있다.

 

大海, 虛谷. 百川, 競湊. 至道, 寥廊. 萬物, 歸之. 不主之義, 已如前釋. 物, 旣仰歸於道, 宜受大名. 此, 卽不大而大也.

(비유컨대) 큰 바다는 텅 빈 계곡이다. (따라서) 온갖 시내가 모여들기를 다투게 된다. (비유컨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한 도道는 쓸쓸하고 쓸쓸하다. (따라서) “만물”이 “그것에게 되돌아가게 된다.” “주재하지 않는다”(는 말)의 뜻은 이미 앞에서 풀이한 것과 같다. “만물”은 “도道”에게 “되돌아감”을 우러른다. (따라서 “도道”는) “큼”의 “이름”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 (요컨대, “도道”의 “큼”) 그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큼”이 아니라, (일삼는 바가) “큼”이다.

 

第三, 擧聖人不貴其身, 以全光大之業.

세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성인은 그 (자신의) 몸을 (세상 사람들의 몸보다)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따라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와 손님이 되어 따르는) 빛나고 큰 업적(을 가짐)이 온전해지게 된다.”

 

聖人終不爲大, 故能成其大.

성인은 끝끝내 ‘큼’이 됨을 일삼지 않는데, 따라서 그 ‘큼’을 이룰 수 있게 된다.

 

明體道聖人. 忘我存物, 靜退謙柔. 終不爲大. 只爲先物後己. 忘功, 忘大. 故爲衆生之長, 獨居三界之尊, 而戒其大也.

(이 문장은) 도道를 본체體로 삼는 “성인”(의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모습)에 대해 설명한다. (이른바, “성인”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자신을 잊어버린 채, (본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슴푸레한) 만물에 자리한다. (따라서) 고요하고, 물러나며, 겸손하고, 부드럽다. (이른바, “성인”은) “끝끝내 ‘큼’이 됨을 일삼지 않는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앞에 서게 하고, 자신을 뒤에 서게 한다. (그) 공功을 잊어버리고, (그 이름이) “큼”이 됨을 잊어버린다. 요컨대, (세상 사람들이 “성인”을)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일삼고, 삼계三界의 존귀한 위상에 홀로 머물게 하는 까닭은 (“성인”이) 그러한 “큼”이 됨을 경계하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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