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성현영의 노자의소 : 10. 재영載營 본문
10. 재영載營
載營章所以次前者, 前章略顯驕矜之過, 謙退之德, 其於修習法門, 猶自未具. 故次一章, 卽廣明內外兩行, 次第功能. 就次一章, 義分三別. 第一, 明拘魂制魄, 守一內修. 第二, 廣顯治國利他之行. 第三, 結歎達道忘功之美.
재영載營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일부러 일삼아) 자랑하고 우쭐함의 허물됨과 겸손하게 물러남의 덕스러움德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그것을 닦거나 익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 장) 다음(에 놓인 장인 이) 한 장은 (덕스러움德으로서의) ‘안’과 (그것을 닦거나 익힘으로서의) ‘밖’이 모두 (함께) 일삼아져야 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다음, (‘안’과 ‘밖’이 모두 함께 일삼아진 모습으로서의) 빼어남과 능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앞 장) 다음(에 놓인 장인 이) 한 장을 살펴보면, (그) 의미가 3개의 문단에 나뉘어 있다. 첫 번째 문단, ‘혼魂’을 지키고 “백魄”을 다스림, (다시 말해,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본체體인) “하나一를 지켜서” (그 작용用인 덕스러움德으로서의) ‘안’이 닦여지게 함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 문단,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세 번째 문단, 끝으로 (본체인) 도道에 다다라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림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탄한다.
第一, 明拘魂制魄, 守一內修.
첫 번째 문단, ‘혼魂’을 지키고 “백魄”을 다스림, (다시 말해,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본체體인) “하나一를 지켜서” (그 작용用인 덕스러움德으로서의) ‘안’이 닦여지게 함에 대해 설명한다.
載營魄
혼魂을 지키고 백魄을 다스려라.
載, 運也. 營魂, 是陽神, 欲人之善. 魄, 是陰神, 欲人之惡. 故魂營, 營然, 而好生. 魄, 泊也. 欲人之泊, 著生死. 又魂性雄健, 好受喜怒. 魄性雌柔, 好守驚怖. 皆損精神. 故修道之初, 先須拘魂制魄, 使不馳動也.
“재載”는 제어한다는 뜻이다. “영營” ‘혼魂’이자, 양陽의 신령스러움으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다. “백魄”은 음陰의 신령스러움으로서,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고자 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이다. 다시 말해, ‘혼魂’은 “영營”이고, (따라서) “영營”은 제어되어야 하는데, (“영營”은 일부러 일삼아) 삶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또한, “백魄”은 제어되어야 하는데, 일부러 일삼아 죽음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사람들은 (“영營”과 “백魄”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삶과 죽음에) 머무른 채, 삶과 죽음을 집착하게 된다. 덧붙여, (“영營”인) ‘혼魂’은 남성스러움과 (딱딱하고) 굳셈을 본성으로 삼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즐거움과 노여움을 좋아하고 (그것에) 이끌린다. “백魄”은 여성스러움과 (연하고) 부드러움을 본성으로 삼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놀람과 두려움을 좋아하고 (그것에) 이끌린다. (요컨대, “영營”인 ‘혼魂’과 “백魄”) 모두는 실상에서 어긋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 신령스러운 바(神; 도道)를 망가뜨리고 어그러뜨린다. 따라서 도道를 닦기 시작할 때에는 이른바 (“영營”인) ‘혼魂’을 지키고 “백魄”을 다스려서, (그것이 말처럼) 치달아 달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抱一能無離
만물의 근원을 지켜서 (그것에서) 떨어짐이 없게 하라.
抱, 守也. 一, 三一也. 離, 散也. 旣能拘魂制魄, 次須守三一之神, 虛夷凝靜, 令不離散也.
“포抱”는 지킨다는 뜻이다. “일一”은 만물의 근원을 뜻한다. “리離”는 흩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포일抱一”의 뜻은 “영營”인) ‘혼魂’을 지키고 “백魄”을 다스리라 곧 (실상에 어긋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신령스러운 바(神; 도道)를 지키라는 것이며, (“무리無離”의 뜻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워서 어렴풋하게 하며, (저절로 그렇게 일삼고자 하는 바를) 엉기게 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잠잠하게 하라 곧 (실상에서 어긋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신령스러운 바로부터) “떨어지거나” 흩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專氣致柔能嬰兒
(도道의) 기운을 온전하게 하면, 부드러움에 다다라, 어린아이와 같아지게 된다.
專, 精專也. 氣, 道氣也. 致, 得也. 柔, 和也. 只爲專精道氣, 致得柔和之理. 故如嬰兒之無欲也.
“전專”은 실상에서 어긋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음이 오롯하다는 뜻이다. “기氣”는 도道의 기운을 뜻한다. “치致”는 (그러한 모습을) 얻는다는 뜻이다. “유柔”는 조화됨을 뜻한다. 말하자면, 실상에서 어긋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 바를 일삼고, 도道의 기운을 오롯하게 하면, “부드러움”이 조화되는 이치理에 “다다르게 되고”, (그것을) 얻게 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어린아이”와 같아지게 된다.
滌除玄覽, 能無疵.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씻고 없애서 어렴풋하게 살펴라, (몸과 마음에) 병病이 없게 된다.
滌, 洗也. 除, 遺也. 覽, 察也. 疵, 病也. 滌, 蕩六府. 除, 遺五情. 使神氣虛玄. 故能覽玄妙理, 內外淸夷, 而無疵病也. 然後身無所爲, 心無所取, 不爲有生, 不爲無滅. 以此而用, 豈有疵病? 此, 明自利也.
“척滌”은 씻는다는 뜻이다. “제除”는 없앤다는 뜻이다. “람覽”은 살핀다는 뜻이다. “자疵”는 병病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척滌”은 (대장, 소장, 위, 쓸개, 방광, 삼초三焦의) 6가지 장기臟器를 씻어내라는 뜻이다. “제除”는 (눈·귀·코·입·몸이 일으키는) 5가지 감정을 없애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척제滌除”는 실상에서 어긋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 신령스러운 바와 도道의 기운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텅 빈 채, 어렴풋하게 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이치理를 살필 수 있게 되고, ‘안’과 ‘밖’이 맑고 어렴풋해질 수 있게 되는데, 따라서 병病을 없앨 수 있게 된다. (“척제滌除”한) 다음에야, 몸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게 되고, 마음은 (일부러 일삼아) 취하는 바가 없게 되며, (일부러) 일삼아 삶을 가지려 하지 않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죽음을 가지지 않으려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살아가는데, 어찌 (몸과 마음에) 병病이 생겨나겠는가? (요컨대) 이것은 자신이 이롭게 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第二, 廣顯治國利他之行.
두 번째 문단, 나라를 다스려서,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愛人治國而無知
백성을 아끼고 나라를 다스리되,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는) 앎知을 없애라.
前, 旣自利道圓. 此下, 應須接物. 接物利行, 莫先治國愛民. 知, 分別知也. 慈悲覆養, 是曰愛民. 布政行化, 名爲治國. 夫治國者, 須示渟朴. 敎以無爲. 杜彼邪奸. 塞玆分別. 如此, 則擊壤之風斯返, 結繩之政可追. 故下文云, 以智治國國之賊, 不以智治國國之德.
앞 문단은 자신이 이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따라서) 그것의 다음은 마땅히 이른바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이어야 한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 방법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아끼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지知”는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는 앎智을 뜻한다. (백성을) 자비롭게 보듬고 먹이는 것, 이것이 이른바 “백성을 아끼는 일”이다. 정사政事를 베풀고 교화敎化를 펼치는 일, 일컬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의) 투박함을 내보여야 하고, (그것에) 머물러야 한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 (백성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못하게 하고, (일부러) 일삼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백성이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게 되면,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던 풍속(의 세상) 그것이 되돌아 오게 되고,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정치(의 시대)가 되돌아 오게 된다. 따라서 다음의 (65)장은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는) 앎智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나라의 적賊(과 같)이 (나라에 해로움이) 되는 일이고, (그러한) 앎智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일은 나라의 (최상의) 덕스러움德(과 같)이 (나라에 이로움이) 되는 일이다.”
明白四達而無爲
세상을 비추고 비치게 하며, 맑게 하고 희게 하며, (그것에) 다다름에 끝점이 없게 하되, 일부러 일삼는 바를 없애라.
明, 以能照得名. 白, 以潔素受稱. 四者, 四方. 達者, 無礙. 言聖人, 空慧, 明白. 妙達, 玄理. 智, 無不照. 境, 無不通. 故略擧四方, 足明八極. 且寂而能應. 所以四達, 應不乖寂. 恒自無爲也. 又解云, 四達者, 達三界及道境也.
“명明”은 (밝게) 비추고 (밝게) 비친다는 뜻이자, (밝게) 비춤과 (밝게) 비침을 일컫는다. “백白”은 맑고 희다는 뜻이자, 맑음과 흼을 일컫는다. “사四”는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뜻한다. “달達”은 끝점에 다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이른바, 성인은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는) 앎慧을 텅 비우는데, (따라서 백성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밝게) 비추고 (밝게) 비치게 하며, (백성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맑게 하고 희게 한다. (따라서) 어렴풋함이 끝점에 다다르는 바가 없게 되고, 어슴푸레함이 이치를 다하게 된다. (따라서) 앎智이 비추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 조화되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성인은) 좁게는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비추고, 넓게는 (동·서·남·북과 건乾·곤坤·간艮·손巽의) 팔극八極을 비치게 한다. 그런데 (성인은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는 앎이 텅 비어) 잠잠한 채, (그것과) 조화된다. (요컨대, 성인이 동·서·남·북의) “네 방향”(내지 팔극)을 비추고 비치게 하며 맑게 하고 희게 하며,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끝점에 다다름이 없는” 까닭은 (그것과) 조화되지만, 잠잠한 바를 어그러뜨리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달四達”에 대한) 다른 해석은 이렇다. “사달四達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모든 세계 내지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는) 도道의 경지이다.”
天地開闔而爲雌.
재앙이 일어나고 사라지더라도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는 앎을 텅 비운 채 잠잠한) 암컷됨을 일삼아라.
河上公本, 作天門. 闔, 閉也. 雌, 靜也. 天地開闔, 謂劫運成壞也. 言聖人, 混迹二儀之中, 不爲三災所及. 雖劫有廢興, 而心恒虛靜. 故莊子云, 大浸, 稽天, 而不溺. 大旱, 金石流, 土山焦, 而不熱.
(“천지天地”가) 하상공河上公 본本에는 ‘천문天門’으로 되어 있다. “합闔”은 닫는다는 뜻이다. “자雌”는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는 앎이 텅 빈 채) 잠잠하다는 뜻이다. “천지개합天地開闔”은 재앙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뜻한다. 그런데 성인은 (재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2가지 모습과 뒤섞여 살지만, (도병刀兵·역려疫癘·기근饑饉나 화火·풍風·수水의 재앙이) 재앙으로서 일삼아지지 못하고, 재앙으로서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재앙이 일어남의 모습을 갖추거나 사라짐의 모습을 갖추더라도, (성인의) 마음은 언제나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는 앎이) 텅 빈 채 잠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따라서 성인은) “큰 물길이 하늘까지 치솟더라도 빠져 죽지 않는다. 큰 더위가 쇠와 돌을 녹이고 흙과 산을 달구더라도 데어 죽지 않는다.”
生之, 畜之.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빈 도道와 같이 백성을) 살아가게 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잠잠한 덕스러움德과 같이 백성을) 자라나게 하라.
言聖人, 自利, 道圓. 利他, 德滿. 故能生化群品. 畜養含靈. 故下文云, 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말하자면, 성인은 저절로 그러하게 이롭게 되는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빈) 도道가 충만되어 있기 때문이다. 백성을 이롭게 하는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잠잠한) 덕스러움德이 충만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은) 백성을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할” 수 있으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백성을) 변화시킬 수 있다. (백성을) “자라나게 하는데”, (백성이 저절로 그러하게) 머금은 신령스러운 바(靈; 본성)에 따라 (백성을) 먹인다. 따라서 다음 (51) 장은 일컫는다. “(만물의 본체體로서의) 도道는 (만물을) 살아가게 하고, (도道의 작용用으로서의) 덕스러움德은 (만물을) 자라나게 한다. (따라서) 만물의 모습이 있게 된다.”
生而不有, 爲而不恃.
(백성을) 살아가게 하지만 (백성이 일부러 일삼아 살아가는 바를) 가지지 않게 하라, (백성을) 자라나게 하지만 (백성이 일부러 일삼아 자라나는 바를) 기대지 않게 하라.
雖復陶鑄萬物. 亭毒三才. 妙體, 眞空. 故無蒼生之可化. 爲而不恃. 豈有功用之可稱? 只爲無蒼生之可化. 故施爲利物, 亦無恩造之可恃也.
말하자면, (도道는) 만물을 살아가게 하고 자라나게 한다. 만물을 먹이고 기른다. (그런데 도道는) 어렴풋한 본체體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참되게 텅 비운다. 따라서 (도道는) 만물이 일부러 일삼아 살아가고 자라날 수 있는 바가 없게 한다. “(만물의 살아감과 자라남을) 일삼지만, (만물이 일부러 일삼아 살아감과 자라남을) 기대지 않게 한다.” (그런데) 어찌 (도道가 만물의 살아감과 자라남에 대한) 공功과 일삼는 바를 가진다고 하겠는가? 요컨대, (도道는) 만물이 일부러 일삼아 살아가고 자라나는 바가 없게 함을 일삼는다. 다시 말해, (도道는) 만물을 일삼고, 만물을 이롭게 함을 베풀지만, 은혜로움과 일부러 일삼음이 “기댈” 수 있는 바가 없게 한다.
長而不宰
(백성을) 자라나게 (하고 살아가게)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공功과 그러한 공功을 가지는 자신의) 주인이 되지 마라.
宰, 主也. 聖人, 長養群生. 實爲化主. 而忘功喪我. 故云不宰.
“재宰”는 주인이 된다는 뜻이다. 성인은 백성을 자라나게 하고 살아가게 한다. (따라서 성인은 백성의 자라남과 살아감을) 일삼고 일으키는 진실한 주체이다. 그러나 (성인은 자신의 그러한) 공功을 잊어버리고, (그러한 공功을 가지는) 자신을 잊어버린다. 따라서 일컬었다. “주인이 되지 않는다.”
第三, 結歎達道忘功之美.
세 번째 문단, 끝으로 (본체인) 도道에 다다라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림의 아름다움에 대해 찬탄한다.
是謂玄德
이것이 이른바 (깊고 멀어서) 어렴풋한 (최상의) 덕스러움德이다.
玄, 言深遠. 德, 乃上德. 歎, 此忘功. 聖人, 冥於造化. 可謂深玄. 上德也.
“현玄”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로부터) 깊고 멀다는 뜻이다. “덕德”은 바로 최상의 덕스러움德을 뜻한다. (이 문장이) 찬탄하는 바, 그것은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림’이다. 성인은 (자신이) 일삼고 일으킨 바(인 자신의 공功)에 대해 어렴풋하다. (그런데 자신이 일삼고 일으킨 바인 자신의 공功에 대한 멀고) 깊음은 (그것에 대한) “어렴풋함”이라 일컬을 수 있다. (그런데 도道는 자신이 일삼고 일삼은 바인 자신의 공功에 대해 어렴풋하다. 따라서 성인이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림’은) 최상의 덕스러움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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