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성현영의 노자의소 : 22. 곡즉曲則 본문
22. 곡즉曲則
曲則章所以次前者, 前章擧孔德容貌, 於敎未周. 故次此章, 重顯孔德行能, 以爲物範. 就此一章, 文開四別. 第一, 擧因地四行, 以示謙和. 第二, 明妙體一中, 爲物楷式. 第三, 彰果上四德, 對顯前行. 第四, 援引古實, 結歎曲全.
곡즉曲則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큰 덕스러움德”의 모습을 설명했지만, (그) 설명이 자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 장 다음에 놓인 이 장은 “큰 덕스러움德”이 실천되고 실현된 모습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모범으로 삼게 한다. 이 한 장을 살피건대, 문단이 펼쳐져 4개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은 ‘땅’(의 덕스러움德)을 말미암는 4가지 행실을 설명함으로써, (그것처럼) 겸손해야 하고 (그것과) 조화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두 번째 문단은 어렴풋한 본체(體; 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음이 텅 빈) ‘일중一中’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야 함을 설명한다. 세 번째 문단은 뒤의 4가지 덕스러운德의 결과를 “빛나게 하는데”, (4가지 덕스러운德 결과는) 앞의 (4가지) 행실에 말미암은 것이다. 네 번째 문단은 옛말을 인용하고 결론지어 찬탄한다. “멈추어라. 따라서 온전히 일삼게 된다.”
第一, 擧因地四行, 以示謙和.
첫 번째 문단은 ‘땅’(의 덕스러움德)을 말미암는 4가지 행실을 설명함으로써, (그것처럼) 겸손해야 하고 (그것과) 조화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曲則全.
(땅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멈춘다. 따라서 온전한 바가 된다.
屈. 曲, 隨順. 不忤物情, 柔弱, 謙和. 全, 我生道. 故莊子云, 吾行却曲, 無傷吾足. 此一句, 忘違, 順也.
(“곡曲”은 ‘나’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멈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곡曲”은 (‘나’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멈춘 채, 만물의 실상을) 쫓아서 따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곡曲”은) 만물의 실상을 거스르지 않은 채, (그것에) 부드럽고 연하며, 겸손하고 조화된다는 뜻이다. “전全”은 (따라서 땅인) 내가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도道에 따라 (온전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인간세人間世」에서) 일컬었다. “나의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걸음이 쉬어지고 멈춰지니, 나의 발을 다치게 함이 없다.” (요컨대) 이 한 문장(이 말하는 것)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도道에 대한) 거스름을 잊어버리라,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도道를) 따르라”는 것이다.
枉則正.
(땅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넘치게 한다. 따라서 곧은 바가 된다.
枉, 濫也. 體知枉直不二. 故能受於毁謗. 而不伸其怨枉, 翻獲正直也. 此一句, 忘毁譽.
“왕枉”은 (‘나’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넘치게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도道의) 본체體가 알아차려지면, (‘나’의) “휘어짐”과 (‘내’가) ‘곧아짐’이 (서로) 둘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도道의 본체體가 알아차려지면, ‘나’는 그 “휘어짐”에 대한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남’의) ‘비난’을 받아들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 “휘어짐”에 따른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나’의) ‘원망’을 (‘남’에게) 펼치지 않을 수 있게 되며, (따라서 ‘나’는) “바르고” 곧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남’으로부터)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한 문장(이 말하는 것)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남’의) ‘비난’이나 ‘칭찬’을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窪則盈.
(땅은) 아래가 된다. 따라서 (덕스러움德이) 가득 차게 된다.
窪, 下也. 謙卑遜讓. 退己處下. 不與物競. 故德行盈滿也. 此一句, 忘高, 下.
“와窪”는 아래가 된다는 뜻이다. (자신의 위상이나 입장을) 겸손하게 낮추고 겸손하게 사양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위상이나 입장)을 뒤로 물리고 아래에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 만물과 더불어 (일부러 일삼아) 다투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덕스러운德 행실이 (자신과 세상에) “가득 차게” 된다. (요컨대) 이 한 문장(이 말하는 것)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높음’을 잊어버리라, (다시 말해) ‘낮음’이 되라”는 것이다.
弊則新
(땅은) 욕됨을 당한다. (그러나 총애받음을 일부러 일삼아 탐내지 않는다) 따라서 (그 덕스러움德이 날로) 새로워지게 된다.
弊, 辱也. 能處鄙惡弊辱, 而不貪榮寵, 卽其德日新. 此一句, 忘榮辱也.
“폐弊”는 욕됨을 당한다는 뜻이다. 천하고 추한 바인 “욕됨을 당함”에 머무른 채, 영화로운 바인 “총애받음”을 (일부러 일삼아) 탐내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덕스러움德이 날로 “새로워지게 된다.” 이 한 문장(이 말하는 것)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영화로움과 욕됨을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第二, 明妙體一中, 爲物楷式.
두 번째 문단은 어렴풋한 본체(體; 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음이 텅 빈) ‘일중一中’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야 함을 설명한다.
少則得, 多則惑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모습이자 텅 빈 모습인) ‘일중一中’에 머물면 (어렴풋한) 본체(體; 道)를 얻게 되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과 ‘없음’에) 집착하게 되면 미혹되게 된다.
少者, 謂前曲全等行, 不見高下, 處一中也. 多, 謂滯於違順等法, 不離二偏也. 體, 一中, 則得, 滯二偏, 故惑也.
“소少”는 앞의 “곡즉전曲則全” 등의 행실로서, ‘높음’과 ‘낮음’을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갈라서) 살피지 않고, (그러한 일부러 일삼은 나눔이나 가름이 ‘없는’, 다시 말해 그것이 텅 빈) ‘일중一中’에 머묾을 뜻한다. “다多”는 (일부러 일음이 ‘있음’에) 집착하고,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거스르거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따르는 등의 모습으로서,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과 그것이 ‘없음’에 집착하는) 2가지 모습을 멀리하지 못함을 뜻한다. (요컨대, 이 한 문장이 말하는 것은 어렴풋한) “본체(體; 道)는 ‘일중一中’으로써 얻게 되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과 ‘없음’의) 2가지 모습을 집착하기 때문에 미혹되게 된다”는 것이다.
是以聖人, 抱一爲天下式
따라서 성인은 ‘일중一中’을 지켜서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是以, 仍上辭也. 抱, 守持也. 式, 法則也. 言聖人, 持此一中之道, 軌範群生. 故爲天下修學之楷模也.
“시이是以”는 앞에서 말한 바를 잇는다. “포抱”는 (알아차림과 실천으로써 그것을) 지킨다는 뜻이다. “식式”은 모범이 된다는 뜻이다. 이른바, “성인”은 이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자 텅 빔인) ‘일중一中’의 이치를 지켜서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다시 말해, 세상의 (도道를) 닦고 배우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것이다.
第三, 彰果上四德, 對顯前行.
세 번째 문단은 뒤의 4가지 덕스러운德 결과를 “빛나게 하는데”, (4가지 덕스러운德 결과는) 앞의 (4가지) 행실에 말미암은 것이다.
不自見故明.
(성인은 ‘나’와 만물의 ‘상相’을) 일부러 일삼아 살피지 않는데, 따라서 (지혜가 ‘나’와 만물을) 밝게 비추게 된다.
物我, 皆空. 不見有我身相. 故智惠, 明照也.
(본성에 있어서) 만물과 ‘나’는 모두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텅 비어 있다. (따라서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만물과 ‘나’는) ‘나’와 ‘자신’이라고 하는 ‘상相’을 (일부러 일삼아) “살피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지혜가 (‘나’와 만물 모두를) “밝게” 비추게 된다.
不自是故彰.
(성인은 ‘자신’을) 일부러 일삼아 옳게 여기지 않는데, 따라서 (그 덕스러운德 행실이) 돋보이게 된다.
自他, 平等. 不是己, 而非物. 故其德行, 顯著.
‘나의 입장’과 ‘남의 입장’은 (상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옳고 그름은 분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위상이) 평등하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나’를 옳게 여기거나 ‘남’을 그르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덕스러운德 행실이 돋보이게 된다.
不自伐故有功
(성인은 자신의 공功을) 일부러 일삼아 취하지 않는데, 따라서 (큰) 공功을 가지게 된다.
伐, 取也. 雖復亭毒群生, 而芻狗百姓, 推功於物. 故有大功也.
“벌伐”은 취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백성을 자라나게 하고 살아가게 해 주지만,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긴 채, (그러한) “공功”을 백성에게 미루어야 한다. 따라서 크게 “공功”을 가지게 된다.
不自矜故長
(성인은 자신의 공功을 백성에게 미룬 채) 스스로 우쭐하지 마라. 따라서 (그 덕스러운德 행실이) 오래 가게 된다.
只爲推功於物, 不自矜誇. 故德行長遠也.
다만, 백성에게 (자신의) 공功을 미룰 뿐, “스스로 우쭐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그 덕스러운德 행실이 오래 가게 된다.
夫唯不爭, 故天下莫能與爭.
(성인은) 무릇 오직 (일부러 일삼아) 다투지 않는데, 따라서 세상 사람들 누구도 (그와) 더불어 다투지 못하게 된다.
此, 卽歎美. 四德之人, 妙達違順, 謙以自牧, 不與物爭. 故天下群品, 無能與不爭者, 爭也.
이 문장은 따라서 찬미한다. “(앞의) 4가지 덕스러움德을 갖춘 사람은 (도道의 본체體인) ‘어렴풋함’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거스르고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따름에 다다르고, 겸손하게 스스로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거두어들이며,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일부러 일삼아) ‘다투지 않는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 중에 (일부러 일삼아) ‘다투지 않는’ 그와 더불어 (일부러 일삼아) ‘다툴’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된다.”
第四, 援引古實, 結歎曲全.
네 번째 문단은 옛말을 인용하고 결론지어 찬탄한다. “멈추어라. 따라서 온전히 일삼게 된다.”
古之所謂曲則全, 豈虛語? 故成全而歸之.
옛날 사람들이 일컬은 바 “곡즉전曲則全”이 어찌 빈말이겠는가? 왜냐하면,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도道를) 온전히 일삼게 됨”을 이루게 되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昔人, 所謂屈曲, 柔順, 以全其道, 此語, 有實. 諒非虛言. 但能依敎, 修行, 不與物爭, 則大成全德, 物歸於己也.
옛날 사람들이 일컬은 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멈추어라.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부드러우라. (다시 말해, 그것을) 따르라. 따라서 그 도道를 온전히 일삼게 된다”, 이 “말”은 실상을 가진다. (다시 말해) 정말로 “빈”말이 아니다. 따라서 (그) 가르침에 의지하고, (그것을) 닦고 일삼으며,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면”, (그) 덕스러움德을 “온전히 일삼게 됨”을 크게 이루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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