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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08. 상선上善 본문

자실산책

성현영의 노자의소 : 08. 상선上善

독립출판 무간 2022. 7. 18. 11:25

08. 상선上善

 

 

上善章所以次前者, 前章略明忘我之行, 未顯功能. 故次此章, 廣擧忘我之人, 有殊能妙用. 就此一章, 義開三別. 第一, 正標上善, 法喩兩陳. 第二, 汎擧三能, 廣明七德. 第三, 結歎柔弱, 所以無疵.

상선上善 장이 앞 장의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일부러 일삼고자하는 바가 있는) ‘자신’을 잊어버린 일삼음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했지만, (그것의) 빼어남과 능함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은 앞 장의 다음에 놓이게 되었는데, 따라서 (이 장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 ‘자신’를 잊어버린 사람은 어렴풋한 일삼음 빼어남과 능함을 가짐에 대해 설명한다. 이 장은 3개의 문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 “잘 함善”에 대해 설명하는데, (“잘 함善”의) 모습이 2가지로 나뉜다. 두 번째 문단,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의 모습이 가지고 있는) 3가지 (빼어남과) 능함, 7가지 덕스러움에 대해 설명한다. 세 번째 문단, 끝으로 (비유컨대 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부드럽고 연한데, 따라서 허물이 없게 됨을 찬탄한다.

 

 

第一, 正標上善, 法喩兩陳.

첫 번째 문단, “잘 함善”에 대해 설명하는데, (“잘 함善”의) 모습이 2가지로 나뉜다.

 

 

上善若水

최상의 잘 함善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잊어버린 채,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물水의 모습과 같다.

 

善, 有二種. 一, 執. 二, 忘. 此, 是忘善. 故稱爲上. 水, 有多種利用. 故偕况之, 利用功能, 具列於下.

“잘 함善”에는 2가지 모습이 있다. 첫 번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대한) 집착하기(를 “잘 함善”)이다. 두 번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대한) 잊어버리기(를 “잘 함善”)이다. 이 문장이 설명하는 “잘 함善”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대한) 잊어버리기를 “잘 함善”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대한 잊어버리기를 잘 함 잘 함) 최상으로 일컫고 삼는다. 그런데 “물水”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잊어비린 채,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다음 문장은 (“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잊어버린 채,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다양한) 모습의 빼어남 능함 (성인의 덕스러움) 비유하고 나열한다.

 

 

第二, 汎擧三能, 廣明七德.

두 번째 문단,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의 모습이 가지고 있는) 3가지 (빼어남과) 능함, 7가지 덕스러움에 대해 설명한다.

 

水善利萬物

물水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데 있어서, 성인이 백성의 본성에 따라서 그들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것처럼) 하기를 잘 한다.

 

言水在天, 爲霧露. 在地, 爲泉源. 津潤沾洽. 利物弘多. 以此功能. 故况聖德? 聖德應感. 善功機權方便, 開化. 其義如水. 故以爲喩也.

“물水”이 ‘하늘’에 있을 때에는 안개와 이슬이 된다. ‘땅’에 있을 때에는 옹달샘 웅덩이가 된다. (따라서 “물水”이 ‘하늘’에 있을 때에는 날짐승의 입을) 적셔주고 (‘땅’에 있을 때에는 길짐승의 목을) 축여준다. (이렇듯, “물水”이) 만물을 (일삼고) 이롭게 함은 (대상의 범위가) 넓고 (방법의 차이가) 크다. 이것이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물水”이 가지고 있는) 빼어남 능함이다. 그런데 성인의 덕스러움은 어떠한가? 성인의 덕스러움德은 (백성 각자의 본성을) 말미암고 (그것에) 조화된다. (다시 말해, 성인은 백성 각자의 본성에 따라 자신의) 능함 빼어남 다르게 드러내는 방법으로써, (그들을) 일삼고 변화시킨다. 그 (능함과 빼어남을 드러내는 방법이 대상에 따라) 다름이 “물水”과 같다. 요컨대, (이 문장은 만물 각자의 본성에 따라 그것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물水”(의 모습으)로써, (백성 각자의 본성에 따라 그들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성인의 덕스러움) 비유하고 있다.

 

又不爭

또한, (물水은 만물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水, 性柔和. 不與物爭. 方圓任器. 壅決隨人. 上善之行, 應物亦爾.

“물水”은 부드러움과 조화됨을 본성으로 삼는다. (따라서) 만물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다.”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난 모습이 되기도 하고 둥근 모습이 되기도 한다. 사람이 길을 막으면 멈추고 길을 터면 흐른다. (요컨대) “상선上善”의 일삼음이란 (일삼는 데 있어서) 만물(의 본성)과 조화됨일 따름이다.

 

處衆人之所惡

(물水은) 보통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고 대하며 아래로 낮추어 보는 곳에 자리한다.

 

所惡者, 卑下之地. 卑下之地, 水則居之. 言衆人, 皆捨下趣高, 憍慢陵物. 上善, 獨去高取下, 柔和靜退.

“소오所惡”는 천하게 여기고 대하며 아래로 낮추어 보는 곳을 뜻한다. 천하게 여기고 대하며 아래로 낮추어 보는 곳, “물水”은 바로 그런 곳에 자리한다. 요컨대, 보통 사람들은 모두 ‘아래로 낮추어짐’을 버리고 ‘높이 받들어짐’을 취하는데, (따라서 천하게 여기지고 대해지며 아래로 낮추어지는 사람들에게) 교만하고, (그들을) 업신여긴다. (그러나) “상선上善”(의 성인)은 홀로 ‘높이 받어짐’을 버리고 ‘아래로 나추어짐’을 취하는데, (따라서 그들과) 부드럽게 조화되고, 조용하게 (그들의 뒤로) 물러난다.

 

故幾於道

따라서 (물水이 일삼는 모습은) 도道(가 일삼는 모습)에 가깝다.

 

幾, 近也. 言行此三能, 故近於道. 三能已了. 次明七德.

“기幾”는 가깝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앞에서 일컬은 3가지 (빼어남과) 능함 일삼는 모습은 도道(가 일삼는 모습)에 가깝다. (이로써,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의 모습이 가지고 있는) 3가지 (빼어남과) 능함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다음 문장은 (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삼는 의 모습이 가지고 있는) 7가지 덕스러움에 대해 설명한다.

 

居善地

자리함이 아래로 낮추기를 잘 한다.

 

水, 性趣下. 以下爲安. 上善, 好謙. 以謙爲吉. 故用卑下. 而爲善地. 所謂處乎不競之地.

은 아래로 낮추어짐을 본성으로 삼는다. 아래로 낮추어짐을 편안하게 여기고 대한다. (다시 말해) “상선上善”은 겸손함을 좋아한다. 겸손함을 길한 바로 삼는다. 따라서 (“물水”은 천하게 여겨지고 대해지며 아래로 낮추어짐을 일삼는다. 다시 말해, (“물水”은 천하게 여겨지고 대해지며 아래로 낮추어짐을) “잘 하기善”를 일삼는다. 따라서 (“물水”은 만물이 자리하기 위해 일부러 일삼아) 다투지 않는 곳에 자리한다.

 

心善淵.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맑고 투명하게 하기를 잘 한다.

 

淵, 止水也. 言止水, 淸潔泓澄. 淵深, 難測. 上善, 心源虛遠. 靜照亦然. 故淵靜, 則鑒人. 心虛, 則照物.

“연淵”은 물결이 잔잔한 “물水”(의 모습)을 뜻한다. 물결이 잔잔한 은 맑고 깨끗하며 맑고 투명하다. “물결이 잔잔한 물水”은 깊이를 재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 “상선上善”은 마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움과 멀리함을 근원으로 삼는다. (마음이 일부러 일삼는 바에 대해) 잠잠함과 (그것을 살피고) 비춤(을 근원으로 삼음)이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물결이 잔잔한 물水”은 잠잠한데, 따라서 사람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텅 비어 있으면, 백성 비추는 거울이 된다.

 

與善仁

(만물과) 더불어 젖어들고 스며들기를 잘 한다.

 

仁, 恩也. 言水, 性霑濡. 惠潤於物. 聖德慈救. 恩被蒼生. 慈救, 則不隔怨親. 霑濡, 則豈揀淨穢?

“인仁”은 사랑스럽게 여기고 대한다는 뜻이다. “물水”은 (만물과 더불어) 젖어듦 스며듦을 본성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물水”은) 만물을 사랑스럽게 여기고 대하며, (만물에게) 젖어들고 스며든다. (따라서) 성인의 덕스러움德은 (백성을) 자비롭게 구제한다. (다시 말해, 성인은 자신의) 사랑스럽게 여기고 대함이 백성에게 젖어들고 스며들게 한다. (그런데 성인이 백성을) 자비롭게 구제한다는 말은 바로 (백성을 구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싫어하는 백성이나 좋아하는 백성을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성을 일삼는 성인의 근원이 그들과 더불어) 젖어듦과 스며듦인데, (성인이) 어찌 (그들의) 깨끗함 더러움을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리겠는가?

 

言善信

말言이 실상을 그대로 비추기를 잘 한다.

 

信, 實也. 水, 能澄鑒儀貌. 姸醜不欺. 聖言證理. 信如符契. 亦言, 海水三潮, 不失時候. 况聖智逗機, 不遺三品.

“신信”은 실상에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물水”은 모습이나 모양 그대로 비추는 데 능하다. (따라서) 아름다움이나 추함이 속여지지 않는다. 성인의 “말言”은 실상을 (그대로) 드러낸다. (따라서 성인의 “말言”이) “실상에 어긋나거나 벗어나는 바가 없음”은 (비유컨대 맞닿는) 부절이나 (지켜진) 계약과 같다. 그러나 (성인의) “말言”은 (비유컨대) 바닷물이 다양한 물길로 갈리고 나뉘어 흐르지만, 계절의 변화를 잃어버리지 않는 (모습과 같)다. 왜냐하면, 성인의  (백성의 다양한) 근기 조화되지만, (그러한) 다양한 근기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正善治

(치우침을 평평하게) 바로 잡는 다스림을 잘 한다.

 

水, 性平. 而無僻. 聖, 心正. 而治邪. 莊云, 平, 中准, 大匠, 取則焉.

“물水”은 평평함을 본성으로 삼는다. 따라서 (일삼음에) 치우침이 없게 된다. (따라서) 성인은 (백성의 치우침을) 바로 잡는 데 마음을 쓴다. 다시 말해, (성인은 백성의) 치우침을 (바로 잡기 위해) 다스린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수평계의 가운데에 자리하는 평평함, 큰 장인이 기준으로 삼는 바.

 

事善能

만물이 (각자 자신의 본성대로) 능해지게 하기를 잘 한다.

 

水, 性多能. 隨事利益. 聖智, 虛察. 順物成功.

“물水”은 (만물의) 다양한 바(; 본성)가 능해지게 함을 본성으로 삼는다. (다시 말해, “물水”은) 만물(; 본성) 말미암아 (만물의) 이로움이 더해지게 한다. (따라서) 성인의 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운 채, (백성 각자의 본성을 비추고) 살핀다. (다시 말해, 성인은) 백성(; 본성) 말미암아 (그들이 각자 자신의) 공功을 이루게 한다.

 

動善時

일삼음이 에 맞게 하기를 잘 한다.

 

水冬凝夏釋. 流結隨時. 况聖智, 虛忘. 感來則應. 觀機動寂. 不失事宜. 出處黙語, 不二而一.

“물水”은 겨울에 (얼음으로) 엉기고, 여름에 (“물水”로) 풀린다. (다시 말해, “물水”의) 풀림 엉김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인의 앎智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우고, 잊어버린다. (백성 각자의 본성을 알아차리고) 느끼는 대로 조화된다. (다시 말해, 성인은) 백성 각자의 본성을 (비추고) 살펴서 “일삼거나” (일삼음을 멈추어) 잠잠해진다. (다시 말해, 성인은) 일삼음 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요컨대, 성인의) 나아감과 (멈추어) 자리함, 말 없음과 (내뱉어) 말함, (그 일삼음의 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지만, 일삼음의 빼어나고 능한 모습이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모습인 그 덕스러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第三, 結歎柔弱, 所以無疵.

세 번째 문단, 끝으로 (비유컨대 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부드럽고 연한데, 따라서 허물이 없게 됨을 찬탄한다.

 

夫唯不爭, 故無尤.

이른바 오로지 다투지 않는데, 따라서 허물이 없게 된다.

 

夫唯, 義同前釋. 唯水與聖. 獨以不爭, 爲能虛柔順. 故無尤過也.

“부유夫唯”는 앞의 (2)장이 (“부유불처시이불거夫唯不處是以不去에서) 설명한 바(“이른바 오로지”)와 뜻이 같다. “오로지” “물水”만이 성인과 (그 덕스러움) 더불어 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물水”만이 일부러 일삼아 만물과) “다투지 않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움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부드러움과 (만물의 본성에) 따름을 일삼으며, (그것에) 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水”은 만물을 일삼음에 있어서) ‘흠’이나 ‘티’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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