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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05. 천지天地 본문

자실산책

성현영의 노자의소 05. 천지天地

독립출판 무간 2022. 5. 29. 15:08

05. 천지天地

 

 

天地章, 所以次前者, 前章明虛玄至道, 超萬象之先. 故次此章, 顯忘功用聖人與二儀合德. 卽此章中, 義開三別. 第一, 擧聖人天地, 施化忘功. 第二, 寄槖簽兩器, 顯明妙用. 第三, 斥多聞博學, 不如體眞.

천지天地 장이 앞 장의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이 모두) 텅 빈 채 어렴풋하고 지극한 도道는 천지만물을 넘어 (그것에) 앞섬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이 앞 장의 다음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장은 으로써 천하를 일삼지만, ‘이라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채우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린 채 (천하의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라 천하를) 일삼는 성인과 (성인이 천하를 일삼는) 2가지 모습이 (모두 도道의 작용인) 덕스러움 조화됨을 설명한다. 이 장은 3개의 문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 성인과 천지는 (백성과 만물을) 일삼아서 변화시키지만施化, (그러한) 공功을 잊어버림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 문단, ‘풀무’와 ‘피리’의 2가지 물건을 예로 들어, (도道와 천지와 성인의) 어렴풋한 일삼음에 대해 설명한다. 세 번째 문단, (일부러 일삼아) 익히는 바와 배우는 바를 많아지게 하는 일을 멈추라고 하는데, (그것이) 참된 바(; )를 (알아차리거나) 느끼는 일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第一, 擧聖人天地, 施化忘功.

첫 번째 문단, 성인과 천지는 (백성과 만물을) 일삼아서 변화시키지만施化, (그러한) 공功을 잊어버림에 대해 설명한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하늘과 땅은 (만물을) 사랑스럽게 여기거나 대하지 않는데, (따라서) 만물을 (짚이나) 풀로 엮어 만든 강아지처럼 여기거나 대한다.

 

仁, 恩也. 芻狗, 草狗也. 莊子云, 已陳之芻狗. 且圓窮在上, 方峙在下, 二儀覆載, 亭毒群生. 而言不仁者, 視萬物如一狗也. 何者? 夫芻狗之爲物, 但有狗名, 而無狗實也. 况一切萬物, 虛幻亦然, 莫不相與皆空. 故無恩報之可責也.

“인仁”은 사랑스럽게 여지거나 대한다는 뜻이다. “추구芻狗”는 (제사 때 쓰기 위해 짚이나) 풀로 엮어 만든 강아지이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이미 추구芻狗를 (젯상에) 올렸다.” 위에 자리하는 둥근 바의 끝점, 아래에 자리하는 모난 바의 끝점, (이) 2가지의 모습은 (만물을) 덮어주고 실어주며, 만물을 먹여주고 길러주는, 크고 지극한 공功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 이 만물을) “사랑스럽게 여기거나 대하지 않는다”고 일컬은 까닭은 (“하늘”과 “땅”은) 만물을 한 마리의 (짚이나 풀로 엮어 만든) 강아지처럼 여기거나 대하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추구芻狗”는 ‘강아지’라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붙인 짚묶음이나 풀뭉치)일 뿐, (살과 뼈가 있는) ‘강아지’로서의 실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만물(의 실상)이 텅 비어 있고 잠잠함이 또한 그러하며, (“하늘 ) 모습이 더불어 모두 (실상이) 텅 비어 있(고 잠잠하)지 않음이 없다. 따라서 (“하늘”과 “땅”에게 만물을) 사랑스럽게 여기거나 대해야할 책무가 없으며, (만물에게 “하늘”과 “땅”의 여김과 대함에 대해 어떠한) 보답을 해야할 책무가 없다.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은 (백성을) 사랑스럽게 여기거나 대하지 않는데, (따라서) 백성을 (짚이나) 풀로 엮어 만든 강아지처럼 여기거나 대한다.

 

聖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齊其明. 故能空心利物, 功侔造化. 所以先擧天地, 次顯聖人. 聖人雖復拯救蒼生, 更不見能化所化, 亦同芻狗, 虛幻無實也. 前擧二儀, 徧該無識, 故稱萬物, 後顯聖人, 意在有情, 故言百姓. 非是不化無識爲有識, 能稟敎故也. 非是不化無識, 爲有識, 能稟敎故也.

“성인”은 “하늘”과 “땅”과 더불어 그 덕스러움德이 조화되고, 해와 달과 더불어 그 밝음을 견주게 된다. 왜냐하면, (성인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텅 비운 채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데, (따라서 성인의) 공功은 (“하늘”과 “땅”처럼 크게) 일삼아지게 되고, (해와 달처럼 밝게) 변화되게 된다. 따라서 앞 문장에서 “하늘”과 “땅”을 일컬은 다음, (이 문장에서) “성인”을 일컬는 것이다. “성인”은 백성蒼生을 구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사랑스럽게 여기거나 대하는 백성이냐 아니냐에 대해 (비추거나) 살피기를 다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인) 또한 (“백성”을) “추구芻狗”처럼 여기거나 대하기 때문이며, (그것의) 실상이 텅 비어 있고 잠잠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하늘  성인은 백성과 만물에 대한 여김이나 대함의 결과적 내용이 아니라, 과정적 대상에서 차이가 날 따름이다. 따라서) 앞 문장은 (“하늘”과 “땅”인) 2가지 모습을 설명하면서 (알아차리거나 느끼는 마음이 자리하지 않는) 무정(無情; 無識)’까지 두루 가리켰기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해) “만물”이라 이름 지어 불렀으며, 이 문장은 (그러한) 마음이 자리하는 ‘유정有情’(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 대상에 대해) “백성”이라 이름 지어 부른다. (“성인 유정有識을 대상으로 삼는 까닭) 그것은 (“성인) ‘무정無識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인 유정有識으로서) ‘유정有識 (대상으로) 일삼아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능하기 때문이다.

 

第二, 寄槖簽兩器, 以明妙用.

두 번째 문단, ‘풀무’와 ‘피리’의 2가지 물건을 예로 들어, (도道와 천지와 성인의) 어렴풋한 일삼음에 대해 설명한다.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하늘과 땅 사이, 그것은 마치 풀무와 피리 같다!

 

槖, 韛袋也. 籥, 簫管也. 夫天地聖人, 虛心利物, 譬彼笙管, 方玆韛袋. 虛心之義, 繼在下文.

“탁槖”은 풀무이다. “약籥”은 피리이다. “하늘”과 “땅”과 성인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 마음을 텅 비운 채 만물(과 백성)을 이롭게 하는데, 피리笙管와 풀무에 비유된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는) 마음을 텅 비움’의 의미는 다음 문장에서 설명된다.

 

虛而不屈, 動而愈出.

텅 비어 있지만 고갈되지 않고, 움직이면 끊임없이 생겨난다.

 

屈, 竭也. 橐籥內空. 故出聲氣不竭. 亦猶天地無心. 故能生化無窮也. 動而愈出者, 言橐籥動, 則聲氣生. 聖人應, 則經敎出也.

“굴屈”은 고갈된다는 뜻이다. “풀무”와 “피리”는 속이 텅 비어 있다. 따라서 바람을 내고 소리를 내는 데 고갈되지 않는다. 따라서 “하늘”과 “땅”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모습에 비유된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은 만물을) 자라나게 하고 변화되게 하지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텅 비어 있어서, 자라나게 함과 변화되게 함이) 끝점에 다다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동이유출動而愈出”은 “풀무”와 “피리”가 “움직이면”, 바람과 소리가 (끝점에 다다르는 바가 없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비유컨대) 성인이 “움직이면”, 가르침經敎 (끝점에 다다르는 바가 없이) 생겨난다.

 

第三, 斥多聞博學, 不如體眞.

세 번째 문단, (일부러 일삼아) 익히는 바와 배우는 바를 많아지게 하는 일을 멈추라고 하는데, (그것이) 참된 바(; )를 (알아차리거나) 느끼는 일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多聞數窮, 不如守中.

(일부러 일삼아) 배우고 익히는 바를 많아지게 하는 일과 하는 말을 많아지게 하는 일은 ‘중中’을 지키는 일만 같지 못하다.

 

多聞, 博贍也. 數窮, 多言也. 博學多言, 唯益世智. 旣不體道. 理歸於窮. 中, 一道也. 多聞, 適足有爲. 守中, 卽長生久視. 以此格量, 故不如守中也. 故莊子云, 文滅質, 博溺心. 又陽朱云, 鄰人, 以多歧亡羊. 學者, 以多方喪道也.

“다문多聞”은 (일부러 일삼아) 배우고 익히는 바를 많아지게 한다는 뜻이다. “삭궁數窮”은 (일부러 일삼아) 하는 말을 많아지게 한다는 뜻이다. (일부러 일삼아) 배우고 익히는 바를 많아지게 하고, (일부러 일삼아) 하는 말을 많아지게 하는 일은 (일부러 일삼는) 세상의 앎智을 많아지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도道를 (알아차리거나)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치理가 (그 이치로움이 고갈되는) 끝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중中”은 도道와 하나가 된다는 뜻한다. “다문多聞”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有爲으로 가는 일이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이 되는 일이다. “중中을 지키는 일”은 삶을 오래 가게 하는 일이자, 삶을 오래 보게 하는 일이다. 따라서 (“다문多聞”과 “삭궁數窮”은) “중中을 지키는 일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아) 꾸미는 일은 (아름다운 바의) 본체 고갈시키고, (일부러 일삼아 익히고) 배우는 일은 (저절로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비고 잠잠한)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또한, 양주陽朱는 일컬었다. “치는 사람들은 갈림길이 많아서 양羊을 잃어버리게 된다. (일부러 일삼아 익히고) 배우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많아서 도道를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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