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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06. 곡신谷神 본문
06. 곡신谷神
谷神章所以次前者, 前章正明多聞博識, 不如守中. 故次此章, 明只爲守中, 故得谷神不死. 就此章中, 義分兩別. 第一, 顯虛玄至道, 能生立二儀. 第二, 明不斷不常, 而用無勞倦.
곡신谷神 장이 앞 장의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일부러 일삼아) 익히고 배우는 바를 많아지게 하는 일은 ‘중中’을 지키는 일만 같지 못함”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 장의) 다음에 이 장이 놓이게 되었는데, (따라서 이 장은) “‘중中’을 지킴”을 일삼게 되면爲, “계곡의 신령스러운 바”와 “살고 죽는 일에 허덕이지 않게 되는 바”를 알아차리게 되고 느끼게 됨에 대해 설명한다. 이 장은 2개의 문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빔과 어렴풋함이 끝점에 다다른 도道는 (만물과) 2가지 모습(儀; 하늘과 땅)을 생겨나게 하고 자라나게立 할 수 있음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 문단, (도道는 배우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수고로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아야 함에 대해 설명한다.
第一, 顯虛玄之道, 能生立二儀.
첫 번째 문단,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빔과 어렴풋함의 끝점에 다다른 도道는 2가지 모습(儀; 하늘과 땅)을 (저절로 그러하게) 생겨나게 하고 자라나게立 할 수 있음에 대해 설명한다.
谷神不死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텅 비우고, (본체인) 신령스러운 바를 알아차리게 되면, (다시는 살고) 죽는 일에 허덕이지 않게 된다.
谷, 空虛也. 神, 靈智也. 河上公言, 谷, 養也. 言蒼生流浪生死, 皆由著欲故也. 若能導養精神, 如彼空谷, 虛容無滯, 則不復生死也.
“곡谷”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텅 빈 바라는 뜻이자 (그것을) 텅 비운다는 뜻이다. “신神”은 (본체인) 신령스러운 바靈라는 뜻이자 (그것을) 알아차린다智는 뜻이다. (따라서) 하상공河上公은 일컬었다. “곡谷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텅 빈 바와 본체인 신령스러운 바를 따르고) 기른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살고 죽는 일에 허덕이게 되는 까닭은 (그들의 삶이) 모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欲에 집착함著을 말미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본체精인 신령스러운 바神를 따르고 길러서, 저 계곡처럼 텅 비울 수 있다면,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아 마음에) 품은 바容를 텅 비워서, (마음이) 집착하는 바滯를 없게 할 수 있다면, 다시는 살고 죽는 일에 허덕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是謂玄牝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텅 빔’과 본체인 ‘신령스러운 바가 알아차려짐’) 이것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집착하지 않음’이자, ‘암컷의 부드러움’이다.
是謂, 仍上辭也. 玄, 不滯之名. 牝, 以雌柔爲義. 欲明養神如谷, 令其不死者, 無過靜退雌柔, 虛容不滯也.
“시위是謂”는 앞 문장에서 일컬은 바를 가리킨다. “현玄”은 집착滯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빈牝”은 암컷의 부드러움을 뜻한다. (따라서, 이 문장이)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본체인) “신령스러운 바神”를 (따르고) 길러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텅 비운) “계곡”과 같아진 모습이자, “살고 죽는 일에 허덕이지 않게 된” 모습이란 (일삼음에 있어서) 허물過이 없는 모습이자, 잠잠하게靜 물러나고 “암컷”처럼 부드러운 모습으로서, (일부러 일삼아 마음에) 품은 바를 텅 비우고 (마음이 그것을) 집착滯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玄牝門, 天地根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집착하지 않음’과 ‘암컷의 부드러움’은 (만물의 생겨남과 자라남의) 문門이자, 하늘과 땅의 (시작됨과 변화됨의) 뿌리이다.
言此深玄不滯之道, 雌虛柔靜之法. 能開道萬物, 生化兩儀. 故云根也.
(“현빈玄牝”) 이것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잠잠하고深 어렴풋하며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바로서 도(道; 본체體)를 일컬으며, (‘“현빈玄牝” 이것은) 암컷됨으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텅 비우고 (그것에) 부드러우며 잠잠한靜 이치(法; 작용用)를 일컫는다. (따라서 “현빈玄牝” 이것은) 만물을 생겨나게開 하고 자라나게道 할 수 있으며, (“현빈玄牝” 이것은 “하늘”과 “땅”의) 2가지 모습儀을 시작되게生 하고 변화되게化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컬었다. (“현빈玄牝”은 만물이 생겨나고 자라나는 “문門”이며, 2가지 모습인 “하늘”과 “땅”이 시작되고 변화되는) “뿌리이다.”
第二, 明不斷不常, 而用無勞倦.
두 번째 문단, (도道는 배우는 사람들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도道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기를) 수고로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아야 함에 대해 설명한다.
綿綿若存
(도道는 언제 어디서나) 어렴풋한데, (따라서) 있는 것 같다.
綿綿, 微細, 不斷貌也. 若, 似也. 存, 有也. 若言神空, 則是斷見. 若言神有, 則是常見. 前說神空, 故得不死. 仍恐學者心, 滯此空. 今言若存, 卽治於斷也. 又恐學人心, 溺於有. 故繼似字, 以治於常也.
“면면綿綿”은 (언제 어디서나 ‘있는’ 바이지만, 그 모습이) 어렴풋하고微 어슴푸레하다細는 뜻이지, (언제 어디서나) ‘없는斷’ (바로서의) 모습貌이라는 뜻이 아니다. “약若”은 그런 것 같다는 뜻이다. “존存”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교佛敎에 따르면, 본체인) “신령스러운 바神는 (언제 어디서나) 텅 빈 것(으로서 ‘없는’ 바)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견斷見이 된다. (반면에, 본체인) “신령스러운 바神는 (언제 어디에나) ‘있는’ 바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상견常見이 된다. 앞 장은 일컬었다. “(본체인) 신령스러운 바神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비어 있다. 따라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느끼게 되면得, 살고 죽는 일에 허덕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 장은 앞 장에 이어) 배우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텅 빔’(이라는 이름)에 집착滯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있는 바인 것 같다若存”라고 일컬었는데, 바로 단견斷을 다스리기 위해서이다. 또한, (이 장은) 배우는 사람들의 마음이 ‘있음’에 집착溺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존存”이라는 글자 앞에) 그런 것 같다似는 뜻을 가진 (“약若”이라는) 글자를 붙였는데, 바로 상견常을 다스리기 위해서이다.
用之不勤.
일삼음에 있어서 수고로워하지 않는다.
卽用, 此非無非有之行, 不常不斷之心. 而爲修道之要術者, 甚不勤若, 而契眞也. 故西昇經云, 動, 則有載劫, 自惟甚若勤. 吾學無所學, 乃能明自然.
“용用”, 이것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에도 집착하지 않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는 일삼음(의 모습)이자, 상견常에도 집착하지 않고, 단견斷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의 모습)이다. 따라서 도道의 본체要와 작용術을 알아차리고 느끼며 일삼는 사람들은 아주 수고로운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道의 본체와 작용인) 참된 바와 조화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승경西昇經』은 일컬었다. “(도道를 알아차리고 느끼며) 일삼음에 있어서, (도道의 본체와 작용인 참된 바에 대한) 잃어버림을 싣게 되면, 나는 정말 아주 수고로운 것 같아 보이게 된다. (따라서) 나는 (일부러 일삼아) 배우는 바가 없음을 배우는데, 따라서 (참된 바인) 저절로 그러함自然을 알아차리고 느끼며 일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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