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노자산책 : 도덕경 제2장. 성인은 분별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는 모습으로 살고, 그것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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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산책 : 도덕경 제2장. 성인은 분별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는 모습으로 살고, 그것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다

독립출판 무간 2017. 2. 11. 13:05

제 2 장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 사오이斯惡已,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 사불선이斯不善已。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교長短相較, 고하상경高下相傾, 음성상화音聲相和, 전후상수前後相隨, 항야恒也。

시이성인처무위지사是以聖人處無爲之事,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

만물작언이불시萬物作焉而弗始, 생이불유生而弗有, 위이불지爲而弗志。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부유불거夫唯弗居, 시이불거是弗去。


천하 사람들은 모두 남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그렇게 할 것이 못되며, 모두 남들이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은 그렇게 할 것이 못된다.

언제 어디서나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며, 김과 짧음은 서로 드러내고, 높음과 낮음은 서로 뒤바뀌며, 내지른 소리와 들리는 소리는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분별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는 모습으로 살고, 그것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다.

만물이 일어나면 함께 일어나고, 밖으로 나가면 함께 나가며, 일을 하면 함께 일을 한다.

만물과 함께 하지만 분별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는 것이다.

오직 분별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개지미지위미天下皆知美之爲美, 사오이斯惡已, 개지선지위선皆知善之爲善, 사불선이斯不善已

위미爲美에서 위爲와 위선爲善에서 위爲는 ‘가리킨다謂’, ‘말한다曰’, ‘안다知’는 뜻이다.

사斯는 천하개지미지위미와 개지선지위선을 의미한다.

오惡는 미美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천하개지미지위미를 부정한다.

불선不善은 선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지선지위선을 부정한다.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교長短相較, 고하상경高下相傾, 음성상화音聲相和, 전후상수前後相隨, 항야恒也

유有와 무無, 난難과 이易, 장長과 단短, 고高와 하下, 음音과 성聲, 전前과 후後 등은 존재양태나 존재양식에 있어서 만물 또는 세계가 소유하고 있는 다양한 측면들을 의미한다.

상相은 서로 관계한다는 의미이다.

생生, 성成, 교較, 경傾, 화和, 수隨는 부단히 변화하는 모습을 비유한다.

항恒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러하다’는 뜻으로서 제1장 “상도常道”와 “상명常名”에서 상常과 의미가 통한다.


시이성인처무위지사是以聖人處無爲之事,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

처處는 ‘머문다’는 뜻으로서 행行과 의미가 통하고, 무위無爲는 불언不言과 의미가 통하며, 사事는 교敎와 의미가 통한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감각하거나 지각하는 데 있어서 ‘분별하지爲 않고無’ ‘분별함爲이 없으며無’, 의지하거나 행위하는 데 있어서 분별된 감각이나 지각을 바탕으로 ‘일부러 일삼지爲 않고無’ ‘일부러 일삼음爲이 없다無’는 것이다.

노자가 무위를 주장하는 이유는 첫째 만물 또는 세계는 존재양태나 존재양식에 있어서 “미美”와 “오惡”, “선善”과 “불선不善”, “유有”와 “무無”, “난難”과 “이易”, “장長”과 “단短”, “고高”와 “하下”, “음音”과 “성聲”, “전前”과 “후後” 등과 같이 다양한 측면들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감각하거나 지각하는 데 있어서 분별하거나爲 분별함爲이 있고有, 의지하거나 행위하는 데 있어서 분별된 감각이나 지각을 바탕으로 일부러 일삼거나爲 일부러 일삼음爲이 있다有는 것은 개인적으로 지향하거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욕구나 가치,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만물 또는 세계를 한정하거나 분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셋째 만물 또는 세계는 스스로 혹은 저절로 그러하게 서로 관계하며 부단히 변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들이 있는데, 첫째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감각하거나 지각하는 데 있어서 분별하지 않고 분별함이 없으며, 의지하거나 행위하는 데 있어서 분별된 감각이나 지각을 바탕으로 일부러 일삼지 않고 일부러 일삼음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감각하거나 지각하는 것, 그리고 의지하거나 행위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지향하거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욕구나 가치,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스스로 혹은 저절로 그러하게 서로 관계하며 부단히 변화하는 만물 또는 세계를 한정하거나 분리함으로써 그것을 왜곡하지 않는다는 의미라는 점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상도常道”와 “상명常名”으로 상징되는 만물 또는 세계는 “가도可道”하거나 “가명可名”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제1장), 감각기관을 활용하거나 지각능력을 발휘하는 것, 그리고 의지하거나 행위하는 것 자체는 만물 또는 세계의 스스로 혹은 저절로 그러한 측면들 중 일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감각하거나 지각하는 데 있어서 분별하지 않고 분별함이 없으며, 의지하거나 행위하는 데 있어서 분별된 감각이나 지각을 바탕으로 일부러 일삼지 않고 일부러 일삼음이 없다는 것은 분별되거나 일부러 일삼은 것 이 외의 것들에 대해서 열려있을 것을 요청한다는 점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분별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데 적용되는 기준은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하거나 소외시키거나 차별화하는 잣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다른 면모들로부터 한정하거나 배제시키거나 획일화하는 잣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가儒家의 사례를 빌려보면, 도덕적 완성이나 도덕적 사회건설과 같은 목표나 이상을 상정해 놓고, 그것에 도달하도록 강요하거나 모든 것들을 통일하도록 강제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것이 아니면 억압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일탈된 것들에 대해서 폭력이 가해지는 경우마저도 용인된다.


만물작언이불시萬物作焉而弗始, 생이불유生而弗有, 위이불지爲而弗志

작作, 생生, 위爲는 만물 또는 세계가 부단히 변화하는 모습을 비유한다.

불시弗始는 ‘의존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불유不有는 ‘귀속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불지弗志는 ‘의지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만물 또는 세계가 “작作”, “생生”, “위爲”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스스로 혹은 저절로 그러한 것을 따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성인이 만물 또는 세계로 하여금 “작作”, “생生”, “위爲”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스스로 혹은 저절로 그러한 것을 따르게 한다는 것은 성인이 자신의 스스로 혹은 저절로 그러한 것을 따르는 만물 또는 세계의 “작作”, “생生”, “위爲”와 언제나 함께 있고 어디서나 함께 함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함께 있고 함께 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인이 만물 또는 세계를 “작作”, “생生”, “위爲”하게 하면서 동시에 “불시不始”, “불유不有”, “부지不志”할 수는 없기 때문인데, 만물 또는 세계를 “작作”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始”하는 것이 되고, “생生”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유有”하는 것이 되며, “위爲”하게 하는 것이 바로 “지志”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공功은 “작作”, “생生”, “위爲”를 의미한다.

거居는 “시始”, “유有”, “지志”를 의미한다.


부유불거夫唯弗居, 시이불거是以弗去

거去는 만물 또는 세계와 분리되어 있는 모습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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