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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04. 도충道冲 본문

자실산책

성현영의 노자의소 : 04. 도충道冲

독립출판 무간 2022. 2. 15. 11:55

04. 도충道冲

 

 

道冲章所以次前者, 前章旣令忘智會道, 妙體一中. 故次此章, 卽明至道以中爲用. 就此一章, 義開四別. 第一, 明雖復以中爲用, 應須遣中. 第二, 顯聖智虛凝, 爲物宗匠. 第三, 示韜光晦迹, 俯應下凡. 第四, 結歎聖人超於萬象之首.

도충道冲 장이 앞 장의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 앎智을 잊고 도道와 조화되라, (다시 말해) 어렴풋한 본체 (곧) (;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에도 집착하지 않는 모습)과 하나되라”고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을 (앞 장의) 다음에 놓았는데, (일삼음에 있어서) 도道(의 끝점)에 다다름 으로써 일삼음임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 장은 네 개의 문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 으로써 일삼음, () 일삼음이 ‘중中’(이라는 이름)을 버림에 대해 설명한다. 두 번째 문단, 성인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 곧 이라는 이름이 모두) 텅 비었는데, (따라서 그것이) 천하를 일삼는 (성인의) 원리이자 방법임을 설명한다. 세 번째 문단, (자신의) 빛남을 가리고 일삼은 바를 감추며, (자신을) 보통 사람들 아래로 낮추고 (그들과) 조화되는 (성인의) 모습에 대해 설명한다. 네 번째 문단, 끝으로 보통 사람들萬象을 넘어선 최상의 모습을 갖춘 성인에 대해 찬탄한다.

 

 

第一, 明以中爲用, 應須遣中.

첫 번째 문단, 으로써 일삼음, (곧) 일삼음이 ‘중中’(이라는 이름)을 버림에 대해 설명한다.

 

道冲而用之, 又不盈.

(천하를 일삼음에 있어서 성인의) 이치가 되는 바는 ‘중中’인데, 따라서 (성인은 그것에 따라) 일삼으며, 따라서 (성인은 일부러 일삼아 ‘중中’이라는 이름을) 채우지 않는다.

 

冲, 中也. 言聖人施化, 爲用. 多端, 切當而言, 莫先中道. 故云, 道冲而用之. 此, 明以中爲用也. 而言又不盈者, 盈, 滿也. 向一中之道, 破二偏之執. 二偏旣除, 一中還遣. 今恐執敎之人, 住於一中, 自爲滿盈. 言不盈者, 卽是遣中之義.

“충冲”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에도 집착하지 않는 모습인) ‘중中’을 뜻한다. 성인은 펼치고 펼친다. 일삼고 일삼는다. 그런데 (그러한) 다양한 바들이 ‘중中’의 이치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일컬었다. “(천하를 일삼음에 있어서 성인의) 이치가 되는 바는 ‘중中’인데, 따라서 (성인은 그것에 따라) 일삼는다.” (다시 말해) 이것은 ‘중中’으로써 일삼는 (성인의) 모습을 설명한다. 이어서, “우불영又不盈”이라고 일컬었는데, “영盈”은 채운다는 뜻이다. (그런데) 첫 번째 ‘중中’의 이치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과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에 대한) 2가지 집착 버려야 한다. (이어서, 두 번째 ‘중中’의 이치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2가지 집착이 버려지고, ‘중中’(이라는 이름이) 다시 버려져야 한다. 따라서 (“우불영又不盈”은 첫 번째 ‘중中’의 이치에 대한) 가르침에 집착하는 사람이 첫 번째 ‘중中’의 이치를 알아차리는 것에 머문 채, (‘중中’이라는 이름을) 일부러 일삼아 채우고 “채울” 것을 걱정하는 문장이다. (요컨대) “우불영又不盈”은 ‘중中’(이라는 이름)을 버린다는 뜻이다.

 

 

第二, 顯聖智虛凝, 爲物宗匠.

두 번째 문단, 성인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이라는 이름 곧 이라는 이름이 모두) 텅 비었는데, (따라서 그것이) 천하를 일삼는 (성인의) 원리이자 방법임을 설명한다.

 

淵似萬物宗

(‘으로써 일삼는 성인의 모습, 비유컨대) 잔잔한 물결의 모습, 천하가 (살피고) 비추어야 할 거울과 같다.

 

淵, 止水也, 以况聖人. 言止水能鑒於人, 聖智能照萬法. 故大匠取則於止水, 衆生宗極於聖人. 而言似者, 明無宗而宗, 宗不定宗也. 故莊子云, 人莫鑒於流水, 而必鑒於止水. 又云, 止水, 爲澄, 爲淵. 宗, 則大宗師義也.

“연淵”은 물결이 잔잔한 모습으로서, 성인(이 일삼는 모습)을 비유한다. 잔잔한 물결이 사람의 얼굴을 비출 수 있듯이, 성인의  천하 이치를 살필 수 있다. 따라서 큰 장인(인 성인)은 잔잔한 물결의 모습을 취하고 물결의 잔잔한 모습을 (일삼는) 방법으로 삼으며, 천하衆生는 (그러한 모습의) 성인을 (일삼는) 원리로 삼고 다다를 끝점으로 취한다. “사似”라고 일컬은 까닭은 (성인은 취하는 바는) 원리이지만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으로서의) 원리가 없는 바이자, 원리이지만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으로서의) 원리 집착하지 않는 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사람은 흐르는 물결에 (얼굴을) 비출 수 없다. 반드시 잔잔한 물결에 비출 수 있다.” 또한, 일컬었다. “지수止水”는 (물빛이) 맑아진다는 뜻이자, (물결이) 잔잔해진다는 뜻이다.” “종宗”은 큰 원리이자 거울이라는 뜻이다.

 

 

第三, 示韜光晦迹, 俯應下凡.

세 번째 문단, (자신의) 빛남을 가리고 일삼은 바를 감추며, (자신을) 보통 사람들 아래로 낮추고 (그들과) 조화되는 (성인의) 모습에 대해 설명한다.

 

挫其銳, 解其忿.

(일부러 일삼아 앞으로) 나아감을 멈추게 하고, 그 성냄과 화냄을 풀어버리고 흩어버린다.

 

挫, 止也. 銳, 進也. 旣重玄, 行足. 自利, 道圓. 爲物, 師宗. 故此下明利他也. 體知物境虛幻, 令進求之人息於貪競也. 而言解忿者, 忿, 嗔怒也. 解, 釋散也. 夫忿懟生乎違順, 違順起乎妄心. 聖人達違順之兩空, 體妄心之非有. 故能誘導蒼生, 令歸眞實. 釋散其懷, 而破嗔癡也.

“좌挫”는 멈추게 한다는 뜻이다. “예銳”는 (일부러 일삼아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성인은) 거듭 어렴풋해지는데, 실천이 (어렴풋한 앎과) 조화되기 때문이다. 저절로 이롭게 되는데, 도道가 조화되기 때문이다. (‘중中’으로써) 천하를 일삼는데, (천하의) 거울이 되고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장 다음은 (성인이 천하)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해 설명한다. (성인은) 천하가 (일부러 일삼는 바를) 텅 비우고 잠잠한 모습 느끼고 알아차리게 하는데,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아) 나아가거나 구하는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탐하거나 다투는 것을 멈추게 한다. “해분解忿”에서 “분忿”은 성내고 화낸다는 뜻이다. “해解”는 풀어버리고 흩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성냄”과 화냄은 내 마음에 맞거나 맞지 않는 데서 생겨나고, ‘내 마음에 맞음’과 ‘맞지 않음’은 (내 것에 맞아야 한다는) 헛된 마음에서 일어난다. 성인은 ‘내 마음에 맞음’과 ‘맞지 않음’이 모두 (실상이) 텅 빈 바임을 알아차리고, (내 것에 맞아야 한다는) 헛된 마음이 (실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非有임을 느낀다. 따라서 (성인은) 천하蒼生를 가르치고 이끄는데, (다시 말해, 사람들이) 참되고 실상인 바(; )로 되돌아가게 한다. 그 마음에 품은 바를 풀어버리고 흩어버리는데,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아 탐냄 과 그렇게 탐내지만 구하지 못해서) 성냄 (‘성남에 가려서 참되고 실상인 바를 알아차리거나 느끼지 못하는) 어리석음 버리게 한다.

 

和其光

그 빛남을 (천하와) 조화시킨다.

 

光, 智照也. 言聖人智慧光明, 與日月齊照. 而韜光晦迹, 共凡智相和. 聖德潛被, 不曜於物. 故下文云, 光而不曜.

“광光”은 (참되고 실상인 바에 대한) ‘앎智’으로써 (천하를 살피고 사람들을) 비춘다는 뜻이다. 성인의 ‘앎智慧’은 “빛나고” 밝은데, 해나 달과 같이 (천하와 사람들을 살피고) 비춘다. 그런데 (성인은 자신의) “빛남”을 감추고 일삼은 바를 숨긴 채, (천하) 사람들과 서로 “조화된다.” (비유컨대) 성인의 덕스러움은 옷 속에 가려지는데, (따라서) 천하에 빛나지 않는다. 따라서 다음 (58장의) 문장은 일컬었다. “빛나지만 번쩍이지 않는다光而不曜.”

 

同其塵

그 티끌된 바와 조화된다.

 

塵, 則色聲等六塵也. 猶如世間塵土, 能點穢淨物. 色聲等法, 能汚染淸行. 故名爲塵也. 而言同者, 聖人降世逢時, 晦迹應凡. 旣韜彼智光, 亦混玆塵穢, 色聲無別, 眼耳固同, 處塵不染. 所以爲異也.

“티끌된 바塵”란 (···· 5가지) 색깔, (····5가지) 소리 등 (저절로 그러한 바에 대해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알아차리거나 느낀 바인) 6가지 감각의 결과六塵이다. 비유컨대, 천하世間 감각의 결과로 만들어진 세계인데, (따라서 천하는) 맑은 사람들(; )을 얼룩지게 하거나 (그렇게) 더럽힐 수 있다. 색깔, 소리 등의 감각결과는 (사람들의) 밝은 일삼음을 더럽히거나 (그렇게) 물들일 수 있다. 따라서 이름 지어 불렀다. “티끌된 바.” “동同”이라고 일컬은 까닭, (비유컨대) 성인은 천하世에 내려와 머물지만, (‘빛남’을 숨기고) 일삼은 바를 감춘 채, 사람들 조화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인은 자신의) ‘앎智’과 ‘빛남’을 (; ) 속에 감춘 채, “티끌된 바”와 (더불어) 뒤섞인 채 (그것과 더불어) 더럽게 검어지며, (일부러 일삼은) 색깔과 소리를 나누거나 가르지 않은 채 눈과 귀를 (그것과) 더불어 “조화되게 한다.” (그러나) “티끌된 바”에 머물지만, (그것에) 물들지 않는데, (이것이 성인이 천하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되는 까닭이다.

 

湛似常存

(일삼음에 있어서) 잠잠하고 집착하지 않음,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다.

 

湛, 凝寂也. 似, 不定也. 言聖人雖復和光同塵. 而神凝姑射. 動, 不乖寂. 故云常存.

“담湛”은 잠잠하다는 뜻이다. “사似”는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인(의 몸)은 (천하에 자리한 채, 그것의) “빛남”과도 조화되고, “티끌됨”과도 조화된다. 그러나 (성인의) 마음은 (신선神仙이 사는) 고야姑射에 자리한다. (다시 말해, 성인은 “티끌된” 천하를) 일삼지만, (일삼음에 있어서) 잔잔한 바를 어그러뜨리지 않는다. 따라서 일컬었다.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게) 자리한다.”

 

 

第四, 結歎聖人, 超於萬象之首.

네 번째 문단, 끝으로 보통 사람들萬象을 넘어선 최상의 모습을 갖춘 성인에 대해 찬탄한다.

 

吾不知誰子, 象帝之先.

나는 (도道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지만, (천지만물의 본체體로서) 하늘보다 앞서는 것 같다.

 

吾, 老君自稱也. 言此卽寂卽應之聖道, 不知從誰而生. 故言誰子也. 象, 似也. 帝, 天也. 旣能生天生地. 似如天地之先也. 故莊子云, 神鬼神帝, 生天生地. 又云, 先天地生, 而不爲老. 然至道幽玄, 寂寥恍惚. 不生不滅, 不先不後. 而今言先者, 欲明先而不先, 不先而先. 故加以象也. 而今言先者, 欲明先而不先, 不先而先. 故加以象也.

“나吾”는 노자(老子; 老君) 자신을 가리킨다. (“부지수자不知誰子”) 이것은 (“티끌된 바) 잠잠한 채 (그것과) 조화되는 성인과 같은 (최상의 모습을 가진) 도道이기 때문에, (노자는 도道가) 누구를 말미암아 생겨나는 바인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컬었다. “누구의 자식인지.” “상象”은 ‘~ 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뜻이다. “제帝”는 하늘을 가리킨다. (는 천지만물의 본체이다. 따라서 도) 하늘을 생겨나게 할 수 있고, 땅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늘과 땅보다 “앞서는” 것 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신령스러운 ‘혼鬼’과 신령스러운 ‘제帝’가 하늘을 생겨나게 했고, 땅을 생겨나게 했다.” 또한, 일컬었다.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겨났지만, 늙지 않는다.” 그러나 지극한 (본체) 도道는 어렴풋하고 어렴풋하며, 잠잠하고 잠잠하며, 어슴푸레하고 어슴푸레하다. (따라서, 무엇을 말미암아) 생겨나는 바라고 일컬을 수도 없고 (늙어서) 사라지는 바라고 일컬을 수도 없으며, (무엇보다) 앞이 되는 바라고 일컬을 수도 없고 뒤가 되는 바라고 일컬을 수도 없다. (따라서 앞선다고 일컬어도 안 되고, ‘뒤선다고 일컬어도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앞선다”라고 일컬은 까닭은 (천지만물의 본체로서는 천지만물보다) 앞서지만 (언제 어디서나 천지만물과 조화되는 작용으로서는 천지만불보다) 앞서지 않으며, (그러한 작용으로서는) 앞서지 않지만 (그러한 본체로서는) 앞선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先” 자 앞에) “상象” (자를) 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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