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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담노 제54장... "덕스러움을 닦음,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몸을 살피는 것일 따름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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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담노 제54장... "덕스러움을 닦음,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몸을 살피는 것일 따름이다"

독립출판 무간 2018. 10. 22. 21:35


54

 

 

선건자善建者, 불발不拔. 선포자善抱者, 불탈不脫. 자손子孫, 제사祭祀, 불철不輟. 수지우신修之于身, 기덕내진其德乃眞. 수지우가修之于家, 기덕내여其德乃餘. 수지우향修之于鄕, 기덕내장其德乃長. 수지우방受之于邦, 기덕내풍其德乃豊. 수지우천하修之于天下, 기덕내보其德乃普. 고이신관신故以身觀身, 이가관가以家觀家, 이향관향以鄕觀鄕, 이방관방以邦觀邦. 이천하관천하以天下觀天下. 오하이지천하연재吾何以知天下然哉? 이차以此.

 

잘 심은 것은 뽑히지 않는다. 잘 감싼 것은 벗겨지지 않는다. 아들과 손자가 제사祭祀를 지내고, (따라서 그 이치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사람에게 있는 그것을 닦으면, 그 덕스러움이 이내 참되어진다. 한 집안에 있는 그것을 닦으면, 그 덕스러움이 넉넉해진다. (그러므로) 한 마을에 있는 그것을 닦으면 그 덕스러움이 넓어진다. 한 나라에 있는 그것을 닦으면 그 덕스러움이 풍성해진다. 천하에 있는 그것을 닦으면 그 덕스러움(천하에) 두루 미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덕스러움이 얼마나 참된 지를 살펴봄)으로써 다른 사람을 알 수 있고, 한 집안(의 덕스러움이 얼마나 넉넉한 지를 살펴봄)으로써 다른 집안을 알 수 있으며, 한 마을(의 덕스러움이 얼마나 넓은 지를 살펴봄으)로써 다른 마을을 알 수 있고, 한 나라의 덕스러움이 얼마나 풍성한 지를 살펴봄으)로써 다른 나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천하(에 덕스러움이 얼마나 두루 미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천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천하가 어떠한지 알겠는가? 이로써.

 

 

잘 심어서 뽑히지 않게하고, “잘 감싸서 벗겨지지 않게하는 방법이 있는가? “한 사람에게 있는 (덕스러움) 그것을 닦음”, 이것이다. “한 사람에게 있는 (덕스러움) 그것을 닦음”,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無爲’) 으로써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有爲’) 을 살피는 것일 따름이다(善建不拔, 善抱不脫, 有道乎! , 修之于身, 是也. 修之于身, 如何? 以身觀身而已矣).

 

(그런데) 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본래) ‘無爲인 몸有爲의 몸이 되게 함이 있다. 따라서 (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한 사람에게 있는 덕스러움, 그것을 닦음”) 그것은 有爲의 몸으로써 (본래) ‘無爲인 몸을 살피는 일되는데, (이것은 본래 하나였던 몸을) ‘無爲의 몸有爲의 몸으로 둘이 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본래 한 몸이기 때문에) ‘눈썹을 보지 못하는 것인데, (본래 한 몸인) ‘쓸개가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멀어지게 되는 셈이다(不知道者, 以身爲己有. 則是, 以己觀身, 身與己爲二. 於是乎? , 不見睫, 肝膽, 楚越矣).

 

(그러나) 오직, 를 아는 사람은 밝게 안다. (본래 하나였던 몸이 無爲의 몸有爲의 몸으로 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無爲였던 몸有爲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임을. 다시 말하면, 를 아는 사람은) ‘有爲의 몸無爲의 몸(따로)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唯知道者, 曠然. 不知己之有身).

 

(‘의 바탕인 흙···바람) ‘사대四大(‘마음의 바탕인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지각) ‘육근六根이 모두 그것을 부여한 (5장에서와 같이, “만물을 버려진 추구처럼 대하는以萬物爲芻狗”) ‘하늘’(無爲’)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마음이 언제 어디서나 편안해지게 된다. (‘四大六根모두’ ‘하늘無爲되돌아감’) 이것을 일컬어 以身觀身라고 한다(四大, 六根, 各還賦與之天. 而眞君, 常晏然. 此之謂以身觀身).

 

(따라서) “以家觀家하면, ‘아비는 아비다워지고 아들을 아들다워지며, ‘지아비는 지아비다워지고 지어미는 지어미다워지게 된다. 따라서 집안의 도리가 바르게 된다(以家觀家, 則父父子子, 夫夫婦婦, 而家道正).

 

(따라서) “以天下觀天下하면, (통치자는)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남쪽을 바라보(는 것 밖에 없)지만, 천하가 () 다스려지게 된다(以天下觀天下, 則恭己南面, 而天下治).

 

(요컨대) “천하나라(다스림의) 근원은 無爲의 몸에 있는 것이다. (다스림의) 요체는 그 (통치자가) ‘有爲의 몸을 가지지 않는 것에 있을 따름인 것이다(天下國家之本, 在身. 其要, 在乎不有其身而已矣).

 

해 설

이 장에서, 우리가 주목해할 점들이 있다. 첫째 노자는 修之於身, 其德乃眞에서 가 만물 또는 세계 속에 내재함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는 대명사(代名詞 ; 代詞)로서 를 지시하며, 는 전치사(前置詞 ; 介詞)로서 원인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둘째, 노자는 만물 또는 세계 속에 내재하는 도가 다름 아닌 덕스러움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사람에게 내재하면서 닦음의 대상이 되는 (; )’닦음으로써 참되어지는대상이 되는 덕스러움은 그 한 사람에게 있어서 위상位相이 차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은 修之於家, 其德乃餘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만물 또는 세계 속에 내재하는 덕스러움이란 무엇인가. 51道生之, 德畜之”, 40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37道常無爲등을 감안할 때, 그리고 제40장의 과 제37장의 無爲가 운동상태 내지 작용모습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차이 나지 않음을 전제할 때, 덕스러움이란 만물 또는 세계 속에 내재하는 도의 일부러 일삼지 않는 운동상태 내지 작용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만물 또는 세계 속에 내재하는 덕스러움은 다름 아닌 만물 또는 세계에 내재하는 그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만물 또는 세계 속에 내재하는 도이자 덕스러움인 일부러 일삼지 않는 운동상태 내지 작용모습이란 만물 또는 세계가 자신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라서 생겨나고, 자라며, 시드는 운동상태 내지 작용모습과 본질적으로 차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닦는다는 것은 일부러 일삼지 않는 운동상태 내지 작용모습을 지킨다’, ‘운동 내지 작용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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