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초원담노 제56장... "도를 잘 아는 사람은 말로만 하지 않는다" 본문
제 56 장
지자知者, 불언不言. 언자言者, 부지不知. 색기태塞其兌. 폐기문閉其門. 좌기예挫其銳. 해기분解其分. 화기광和其光. 동기진同其塵. 시위현동是謂玄同. 불가득이친不可得而親, 불가득이소不可得而疏. 불가득이리不可得而利, 불가득이해不可得而害. 불가득이귀不可得而貴, 불가득이천不可得而賤. 고위천하귀故爲天下貴.
(도道를 잘) 아는 사람은 말言로만 하지 않는다. 말言로만 하는 사람은 (도道를 잘) 아는 것이 아니다. (도道를 잘 아는 사람은) 그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말미암고 생겨나는 문)을 막는다. 그 (일부러 일삼음이 말미암고 비롯되는) 문을 닫는다. 그 날카로움을 꺾는다. (그러나) 그 얽힘을 푼다. 그 빛남과 어울린다. (그러나) 그 티끌과 함께 한다. 이것을 일컬어 ‘오묘한 같아짐玄同’이라 한다. (그러므로 ‘言者’를) 친근하게 대할 수 없으며, (‘知者’를) 소원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이다. (‘言者’를) 이롭게 대할 수 없으며, (‘知者’를) 해롭게 대할 수 없는 것이다. (‘言者’를) 귀하게 대할 수 없으며, (‘知者’를) 천하게 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하가 (‘知者’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도道를 잘) 아는 사람은 말言로만 하지 않는다.” (제1장에서와 같이, 도道는) 말해질 수 있는 대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데, (도道가) 그(러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말言로만 하는 사람은 (도道를 잘) 아는 것이 아니다.” (도道는) 감히 일부러 일삼아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닌데, (그러한 도道) 그것을 말言로만 하기 때문이다(知者, 不言. 知之, 無復可言. 言者, 不知. 言之, 不敢用知也).
(그런데) 이 문구는 (제81장의) 다음의 문구와 (말하는 형식을) 더불어 (같이) 한다. “진실한 말言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운 말言은 진실하지 않다.” (그러나) 말하는 형식은 거의 같지만, (그) 뜻하는 내용은 (아주) 다르다. (제81장의) 저것은 (그것이 생겨나게 된 ‘근원’이 서로) ‘다름’을 가리는 문구이다. ‘진실함’은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것이 생겨나게 되는 ‘근원’이 ‘진실함’은 ‘일부러 일삼지 않음’으로서, ‘아름다움’은 ‘일부러 일삼음’으로서, 서로)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장章의) 이것은 (그것이 생겨나게 되는 ‘근원’이 ‘일부러 일삼음’으로서, 서로) ‘오묘하게 같음玄同’(을 가리는 문구)이다. ‘앎’도 ‘알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일부러 일삼음으로써) 생겨나게 되는 것이고, ‘말言’도 ‘말해질 수 없는 대상’으로부터 (일부러 일삼음으로써) 생겨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此, 與下文. 信言, 不美. 美言, 不信. 語勢, 略同, 而意別. 彼, 爲揀異. 以信與美, 不同也. 此, 爲玄同. 以知出於不知, 而言出於不言也).
무릇, “천하”의 도道는 “같을” 따름이다. 진실로, 본래 다르지 않다. (제1장에서와 같이, 그) 나온 곳은 같은데, (그) ‘이름’이 다르다. 따라서 ‘다름’이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이름’이) ‘같지 않음’이 ‘다름’을 생겨나게 한 것이다. ‘같음’이 지극함에 이른 것이 “현동玄同”이다. (따라서) “현동玄同”하다고 할 때의 ‘같음’은 ‘다름’과 절대적인 독립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제40장에서)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할 때의 ‘있음’과 ‘없음’의 관계와 같고, (제42장에서) “‘하나’는 ‘둘’과 함께 산다”고 할 때의 ‘하나’와 ‘둘’의 관계와 같다(蓋, 天下之道, 同而已. 固, 未始異也. 同出而異名. 故生異也. 然, 非同, 生異也. 同之至者, 玄同也. 玄同也者, 非對異者也. 如, 無生有, 一生二).
(‘없음’은) ‘있음’이 있지 않음이다. ‘있음’이 아님이다. (‘없음’은 존재양태에 있어서 독립적이다) 따라서 그것을 일컬어 ‘없음’이라 한다. (‘있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작용양태에 있어서 “‘있음’은 ‘없음’으로부터 생겨난다.” ‘있음’은 ‘없음’과 상관된다. 따라서 ‘없음’은) ‘있음’과 절대적인 독립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未有有也. 以非有. 故謂之無. 非對有也).
(‘하나’는) ‘둘’이 있지 않음이다. ‘둘’이 아님이다. (‘하나’는 존재양태에 있어서 독립적이다) 따라서 그것을 일컬어 ‘하나’라 한다. (‘둘’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작용양태에 있어서 “‘하나’는 ‘둘’과 함께 산다.” ‘하나’는 ‘둘’과 상관된다. 따라서 ‘하나’는) ‘둘’과 절대적인 독립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未有二也. 以非二. 故謂之一. 非對二也).
‘없음’은 독립적이고, (그러하게) 존재한다. (‘있음’ 또한 독립적이고, 그러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있음’은 ‘없음’에 대해서, ‘없음’은 ‘있음’에 대해서 독립적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는 독립적이고, 그러하게 존재한다. ‘둘’ 또한 독립적이고 그러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둘’은 ‘하나’에 대해서) ‘하나’는 ‘둘’에 대해서 독립적이다. (존재양식의) 본래에 있어서, ‘없음’과 ‘있음’, ‘하나’와 ‘둘’은 (그 독립성을) 더불어 (같이) 한다(無者, 俄, 而有. 一者, 俄二. 始有, 無有, 與一二).
(그런데 ‘없음’과 ‘있음’, ‘하나’와 ‘둘’은 각자 독립적이고 그러하게 존재하지만, 작용양태에 있어서) 서로 상관되고, (따라서 서로) 서게 된다. (그러한 점에서, ‘없음’과 ‘있음’, ‘하나’와 ‘둘’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없음’과 ‘있음’, ‘하나’와 ‘둘’이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노자는) 그것을 “같다”라고 일컬었다(相對, 而立. 未有異也. 以非異, 故謂之同).
(마찬가지로, 노자가 일컬은) “같음”은 독립적이(고 그러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다름”과) 다르다. (“다름” 또한 독립적이고 그러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같음”과 다르다. 그런데 작용양태에 있어서) 본래, “같음”은 “다름”과 더불어 서로 상관되고, 따라서 (서로) 서게 된다. (따라서 작용양태에 있어서 “같음”과 “다름”이 본래) 서로 상관되고, 따라서 (서로) 서게 된다는 말은 그 “같음”이 (존재양태에 있어서 “다름”과 그 모습이) “오묘하게 같다”는 뜻이 아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같음”은 작용양태에 있어서 ‘서로 상관되고 따라서 서로 서게 되는’ 모습이) “오묘하게 같다”는 뜻이다(同者, 俄. 而異. 始有, 同與異, 相對, 而立. 相對, 而立, 則其同者, 非所謂玄同也. 旣玄同矣).
(따라서 작용양태에 있어서 본래 ‘서로 상관되고 따라서 서로 서게 되는’ 모습에 대한) ‘앎’은 (존재양태에 있어서 본래 서로 독립적인 모습에 대한) ‘앎이 아님’과 더불어 (뜻을 같이) 한다. (따라서 작용양태에 있어서 본래 ‘서로 상관되고 따라서 서로 서게 되는’ 모습에 대한) ‘말言’은 (존재양태에 있어서 본래 서로 독립적인 모습에 대한) ‘말言이 아님’과 더불어 (뜻을 같이) 한다. (마찬가지로, 작용양태에 있어서의 ‘없음’의 모습에 대한 ‘앎’이나 ‘말言’은 존재양태에 있어서의) ‘없음’(에 대한 ‘앎’이나 ‘말言’)이 아니다. (작용양태에 있어서의 ‘있음’에 대한 ‘앎’이나 ‘말言’은 존재양태에 있어서의) ‘있음’(의 모습에 대한 ‘앎’이나 ‘말言’)이 아니다. (작용양태에 있어서의) ‘하나’(의 모습에 대한 ‘앎’이나 ‘말言’은 존재양태에 있어서의 ‘하나’에 모습에 대한 ‘앎’이나 ‘말言’이) 아니다. (작용양태에 있어서의 ‘둘’에 대한 ‘앎’이나 ‘말言’은 존재양태에 있어서의 ‘둘’의 모습에 대한 ‘앎’이나 ‘말言’이) 아니다(知, 與不知. 言, 與不言. 非無. 非有. 非一. 非二).
이『도덕경』의 오천여 글자는 모름지기 (그 ‘본래’의 모습을 분명하게) ‘알 수 없는, 만물과 독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으면서 상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만물과 언제나 함께 하고 어디서나 만물과 함께 하는 저절로 그러한) 바’에 대한 ‘앎’(의 이야기), (그 ‘본래’의 모습을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만물과 독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으면서 상관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만물과 언제나 함께 하고 어디서나 만물과 함께 하는 저절로 그러한) 바’에 대한 ‘말言’이다(而此經, 五千餘言, 方爲不知之知, 不言之言矣).
“塞其兌. 閉其門”(의 뜻)은 앞의 “不言”과 연결되고, “挫其銳. 解其分”(의 뜻)은 앞의 “不知”와 연결된다(塞兌閉門, 貼上不言. 挫銳解紛, 貼上不知).
【해 설】
노자가 말한 “兌”와 “門”은 ‘일부러 일삼음’이 생겨나거나,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비롯되는 바이며, “塞”과 “閉”는 정서적 또는 육체적, 정신적 혹은 물질적 ‘편안함’ 내지 ‘이로움’을 추구하는 마음이 원인으로 작용되지 않았는지 밝히거나 살핌으로써,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생겨나게 되거나 비롯되어지지 않도록 하며,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의지하거나 행위하는 것과 같은 ‘일부러 일삼음’이 말미암아지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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