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성현영의 노자의소 : 35. 대상大象 본문
35. 대상大象
大象章, 所以次前者, 前章, 無方之用, 利物, 忘功. 故次, 此章, 顯忘功之人, 爲物所歸往. 就此章內, 文有三重. 第一, 明物之歸依, 皆獲利益. 第二, 擧樂餌爲譬, 表理敎虛玄. 第三, 示非色非聲, 而妙用無盡.
대상大象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인 까닭은 앞 장이 설명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일삼은) 방향(을 가짐)이 없음, 그것이 (도道의) 일삼음(의 모습)이다. (따라서 도道는) 천하를 이롭게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린다.” 따라서 (이 장이 앞 장) 다음에 놓이게 되었는데, (따라서) 이 장은 설명한다. “(천하를 이롭게 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공功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천하가 되돌아오고 찾아드는 바를 일삼게 된다.” 이 장의 안을 살피건대, 문단이 세 번 거듭됨을 가진다.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천하가 (도道로) 되돌아가 (그것을) 의지하게 되면, 모두가 이로움이 더해짐을 얻게 된다.” 두 번째 문단은 ‘음악’과 ‘음식’을 예로 들어 비유를 일삼음으로써, (노자 자신이 일컫는) ‘리理’와 ‘교敎’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텅 빈 바이자, (그것이) 어렴풋한 바임을 설명한다. 세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은 일부러 일삼은 ‘오색五色’과 같은) ‘색깔’이 아니어야 하고, (‘오음五音’과 같은) ‘소리’가 아니어야 하는데, 따라서 (도道와 같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일삼음이 (그 공능의 끝점을) 다함이 없게 된다.”
第一, 明物之歸依, 皆獲利益.
첫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천하가 (도道로) 되돌아가 (그것을) 의지하게 되면, 모두가 이로움이 더해짐을 얻게 된다.”
執大象, 天下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도道의 일삼음의 모습을 지키면, 천하가 찾아들게 된다.
執, 持也. 此, 不執, 而執. 執, 無所執. 大象, 猶大道之法象也. 卽前章, 忘大之聖人, 持無形之大象, 常善救物, 爲天下歸往也. 莊子云, 王駘 … 立, 不敎. 坐, 不議. 虛而往, 實而歸 … 宣尼, 將引天下, 歸之, 是也.
“집執”은 지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때의 ‘지킨다’는 말) 이것은 (일부러 일삼아) 지키지 않음으로써, ‘지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지키지만, (일부러 일삼아) 지키는 바를 가짐이 없다는 뜻이다. “대상大象”에서, “대大”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도道를 비유하고, “상象”은 (그러한 도道의 일삼음의) 모습을 비유한다. 따라서 앞 장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한) 잊어버림이 큰 성인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의) 모습을 가짐이 없는 도道의 (일삼음의) 모습을 지키고, (따라서) 언제나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잘하며, (따라서) ‘천하’가 되돌아오고 ‘찾아들게 함’을 일삼게 된다”는 것이다. 『장자莊子』는 (「덕충부德充符」에서) 일컬었다. “왕태王駘가 … (일부러 일삼아) 서자, (‘천하’가 떠나갔다. 따라서) 가르치지 못했다. (일부러 일삼아) 앉자, (‘천하’가 되돌아갔다. 따라서) 의론하지 못했다. (그런데 왕태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텅 비우자, (‘천하’가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들었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가득 채우자, (‘천하’가 의론에 참여하기 위해) 되돌아왔다 … 공자(孔子; 宣尼)가 장차 ‘천하’를 이끌(어 다다르)고자 하고, 되돌아가고자 한 그것이 (바로) 이것이다.”
往而不害, 安平太.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도道를 지키면, 천하가) 찾아들게 되고, 해롭지 않게 되며, 평안함과 평화로움이 커지게 된다.
太, 大也. 言蒼生, 往至聖所, 皆獲利益, 而無損害. 所獲之利, 卽是安平 等, 大乘之法也. 不害, 則明其援苦. 平安, 則語其與樂.
“태太”는 커진다는 말이다. (“왕이불해往而不害”는) 이른바 천하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한 “성인”의 모습으로 “찾아듦”으로써, 모두가 이로움이 더해짐을 얻게 되고, 따라서 덜어짐과 “해롭게 됨”이 없게 된다는 뜻이다. (덧붙여, 천하가) 이로움을 얻게 된다는 것은 바로 (천하가) “평안하게 되고”, “평화롭게 된다”는 것 등인데,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대승大乘이 다다르고자 하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천하가) “해롭지 않게 된다”는 말은 바로 (천하) 그것이 ‘괴로움’으로부터 구제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천하가) “평안하게 되고, 평화롭게 된다”는 말은 바로 (천하) 그것이 ‘즐거움’을 부여받게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第二, 擧樂餌爲鼻, 表理敎處玄.
두 번째 문단은 ‘음악’과 ‘음식’을 예로 들어 비유를 일삼음으로써, (노자 자신이 일컫는) ‘리理’와 ‘교敎’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텅 빈 바이자, (그것이) 어렴풋한 바임을 설명한다.
樂與餌, 過客止.
(일부러 일삼은) 소리와 맛, 나그네의 걸음을 그치게 만드는 바.
樂, 絲竹宮商也. 餌, 飮食滋味也. 樂, 有聲, 可悅. 餌, 有味, 可翫. 可樂可翫. 故暫過之客, 逢, 必止住, 耽愛也.
“악樂”은 (일부러 일삼아 만든) 현악기와 관악기가 내는 ‘궁宮’음이나 ‘상尙’음(과 같은 ‘소리’)이다. “이餌”는 (일부러 일삼아 만든) 마실 거리와 씹을 거리가 내는 (단 것이나 쓴 것과 같은) ‘맛’이다. (이른바) “악樂”은 (일부러 일삼은) ‘소리’를 가짐으로써, (사람의 귀를) 기쁘게 할 수 있다. “이餌”는 (일부러 일삼은) ‘맛’을 가짐으로써,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은 ‘소리’인) “악樂”이 될 수 있어야 (사람의 귀를) 기쁘게 할 수 있다. (일부러 일삼은 ‘맛’인 “이餌”가 될 수 있어야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잠시 지나던 손님이 (그것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걸음을) “그치고” 멈추게 되며, 즐기고 아끼게 되는 것이다.
道出言, 澹無味.
(그러나) 도道가 내뱉는 말은 담백해서 맛이 없다.
至道, 虛寂. 其, 體. 希夷. 所以出言, 澹. 然無味. 非如樂餌, 可翫可悅. 故音樂有聲, 行者爲之止住, 道言無味, 學者罕見留心. 嗟乎, 世人迷妄之甚! 但知淫聽有聲之聲, 詎能呾嚼無味之味耶? 深歎愚徒. 故有斯譬.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한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텅 비어 있고, 잠잠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본체體이다. (따라서 그것이 일삼는 바는 또렷하게)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따라서 (그것이) “내뱉는 말”은 담백하다. 다시 말해, (일부러 일삼은 단맛이나 쓴맛과 같은 또렷하고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맛이 없다.” (비교컨대, 앞 문장이 일컬은) “악樂”이나 “이餌”와 같이, (사람의 입을) 즐겁게 하거나 (사람의 귀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른바, 음악은 ‘소리’가 있어서 지나던 사람도 걸음을 그침과 머묾을 일삼지만, “도道”가 내뱉는 “말”은 “맛이 없어서” 배우는 사람조차 (그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이 드물다. 오호, 세상 사람들의 미혹됨과 망령됨이 심함이여! 단지, 음란한 소리와 (일부러 일삼은) ‘소리’를 가진 소리만을 알아차리는데, 어찌 “맛이 없는” 맛을 음미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이 문장에서 노자는) 어리석은 무리에 대해 가슴 깊이 탄식한다. 따라서 이러한 비유가 생겨나게 되었다.
第三, 示非色非聲, 而妙用無盡.
세 번째 문단은 설명한다.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은 일부러 일삼은 ‘오색五色’과 같은) ‘색깔’이 아니어야 하고, (‘오음五音’과 같은) ‘소리’가 아니어야 하는데, 따라서 (도道와 같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한 일삼음이 (그 공능의 끝점을) 다함이 없게 된다.”
視不足見.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은 그 모습을) 살펴보더라도 (그것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살펴보기에 충분하지 않아야 한다.
至道, 窈冥. 妙, 絶形色, 非如餚饌等法. 故不可以眼識求.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한 “도道”는 (그 일삼는 모습이)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하다.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한 바는 (‘사물’과 같은 뚜렷한) 모양이나 (‘오색五色’과 같은 또렷한) 색깔이 끊어진 바로서, (‘오미五味’와 같은 또렷하고 뚜렷한 맛을 가진) 안주나 반찬 등의 모습과 같지 않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 눈으로써 알아차림을 구함이 불가능하다.
聽不足聞.
(그 소리를) 들어보더라도 (그것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들어보기에 충분하지 않아야 한다.
大音, 希聲. 體, 非商角. 豈如鍾鼓, 可以耳聞? 聖道出言, 其例, 亦爾.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의 정도가) 큰 소리는 들어보더라도 (그것을 또렷하고 뚜렷하게) 들어볼 수 없는 소리이다.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끊어진) 본체體(의 소리)로서, (일부러 일삼은 ‘오음五音’의 하나인) ‘상商’음이나 ‘각角’음과 같지 않다. (따라서) 어찌 종소리나 북소리가 같이 (그것을) 귀로써 (또렷하고 뚜렷하게) “들어볼 수 있겠는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한) 성스러운 “도道가 내뱉는 말”, 그 예가 또한 그러하다.
用不可旣.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일삼음은 (그 쓰임새의 끝점을) 다할 수 없게 된다.
旣, 盡也. 至道之言, 澹. 然虛遠, 非聲非色, 絶視絶聽. 若鏡之心, 物來, 斯照. 如谷之響, 感, 而遂通. 是, 知無用之用, 其用難盡.
“기旣”는 (그 끝점을) 다한다는 말이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 끝점에 다다름이) 지극한 “도道가 내뱉는 말”은 “담백하다.” 다시 말해,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텅 비어 있는 바이자, (그것으로부터) 멀어진 바로서, (일부러 일삼은 ‘오음五音’과 같은) 소리도 아니고, (일부러 일삼은 ‘오색五色’과 같은) 색깔도 아니며, (또렷하게) 살펴볼 수 있는 바도 아니고, (뚜렷하게) 들어볼 수 있는 바도 아니다. (따라서 이른바) 거울과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따라서) 사물이 다가오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비치게 된다. 계곡과 같은 울림이 되어야 하는데, (사물이 울리게 되면, 그것을 그대로) 느끼게 되고, (그것과 더불어) 어우러짐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알아차리게 된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일삼음, 그러한 일삼음은 (그 쓰임새의 끝점을) 다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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