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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37. 도상무위道常無爲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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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37. 도상무위道常無爲

독립출판 무간 2023. 8. 23. 13:01

37. 도상무위道常無爲

 

 

道常無爲章, 卽是第三段. 文, 正明結會. 就此章內, 文開兩別. 第一, 結道宗. 明寂. 而常動. 第二, 結學人宗. 顯玄妙. 極重玄.

도상무위道常無爲 장은 이른바 (『상경上經』을 크게 나눈 세 단락 중) 세 번째 단락이다. (따라서 이 장의) 문장은 (이 단락의) 결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장의 안을 살피건대, 문단이 펼쳐져 2개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은 도道의 본체宗에 대해 결론짓는다. (따라서) 설명한다. “(도道의 본체宗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잠잠함이다. 따라서 (도道는) ‘늘 그러하게’ 일삼는다.” 두 번째 문단은 (도道를 닦고) 배우는 사람이 본체宗로 삼아야 할 바에 대해 결론짓는다. (따라서) 설명한다. “(도道를 닦고 배우는 사람이 본체宗로 삼아야 하는 바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함과 어슴푸레함이다. (따라서 도道를 닦고 배우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해 ‘늘 그러하게’) 거듭 (어슴푸레함과) 어렴풋함의 끝점에 다다라야 한다.”

 

 

第一, 結道宗. 明寂, 而常動.

첫 번째 문단은 도道의 본체宗에 대해 결론짓는다. (따라서) 설명한다. “(도道의 본체宗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잠잠함이다. 따라서 (도道는) ‘늘 그러하게’ 일삼는다.”

 

道常無爲, 而無不爲.

도道는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음이 없지만, 일삼지 않음이 없다.

 

凝常之道, 寂. 而無爲. 從體起用. 應物施化. 故曰而無不爲. 前句, 是本, 後句, 是迹. 此, 明本迹. 迹本. 寂動. 動寂. 之義也.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한) “늘 그러함”이 엉겨 있는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잠잠하다. 다시 말해, (“도道”는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음이 ‘없다.’” (그런데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본체體를 말미암아 (“늘 그러하게”) 작용用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만물과 어우러진 채, (만물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가짐이 ‘없게’ 하기 위해) 교화를 베푼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따라서 (도道는) 일삼지 않음이 ‘없다.’” (요컨대) 앞 문장은 (“도道”의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본체體에 대해 밝히는 문장인 반면, 뒤 문장은 (“도道”의 일삼음이 ‘있는’) 작용(迹; 用)에 대해 밝히는 문장이다. (이른바) 이 문장은 설명한다.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본체本로써 일삼는다. (다시 말해, 도道의) 일삼음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본체本로 삼는다. (도道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잠잠함으로써 일삼는다(動; 迹). (다시 말해, 도道의) 일삼음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잠잠하다.” 이것이 (이 문장이 전하고자 하는) 뜻이다.

 

侯王若能守, 萬物當自化.

제후와 임금이 만약 (다스림에 있어서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음이 ‘없지만’, 일삼지 않음이 없는 도道를) 지킬 수 있다면, 백성이 마땅히 저절로 교화되게 될 것이다.

 

萬乘之主, 五等之君, 若能守持此道者, 八荒萬國, 自然從化. 行人亦爾, 所以偏擧王侯者, 明君王爲化, 利物弘多也.

만 대의 전차를 다스리는 천자天子와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 다섯 등급의 제후들 가운데, “만약” (다스림에 있어서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음이 ‘없지만’”, “일삼지 않음이 없는”) 그러한 “도道”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여덟 방향 (곧 천하의) 모든 나라들이 저절로 그러하게 (자신을) 따르게 되고, (천하의 모든 백성이 자신의 백성으로) 교화되게 될 것이다. (덧붙여, “늘 그러하게” “일부러 일삼음이 ‘없지만’”, “일삼지 않음이 없는”) 그러한 “도道”를 배우고) 닦는 사람 역시 그러할 것인데, (노자가 이 문장에서) “임금”과 “제후”를 특별히 예로 든 까닭은 (“만약”) 제후와 “임금”이 (그러한 “도道”를 지킴으로써) 교화를 일삼게 되면, 백성을 이롭게 함이 (그러한 “도道”를 배우고 닦는 사람의 경우에서보다) 넓혀지게 되고, 많아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第二, 結學人宗. 顯玄妙. 極重玄.

두 번째 문단은 (도道를 닦고) 배우는 사람이 본체宗로 삼아야 할 바에 대해 결론짓는다. (따라서) 설명한다. “(도道를 닦고 배우는 사람이 본체宗로 삼아야 하는 바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어렴풋함과 어슴푸레함이다. (따라서 도道를 닦고 배우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해 ‘늘 그러하게’) 거듭 (어슴푸레함과) 어렴풋함의 끝점에 다다라야 한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백성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교화함에 있어서, 다시 말해 (그들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일으키고 닦게 함에 있어서, 나는 장차 (그들의) 그것을 진정시킬 것이다. (일부러 일삼음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소박하고) 투박한 도道로써.

 

作, 起修也. 樸, 道也. 言衆生, 初從化起修者, 必有心欲於果報也. 旣起斯欲, 卽須以無名, 樸素之道, 安鎭. 其心, 令不染有. 此, 以空遣有也.

“작作”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일으키고 닦는다는 말이다. “박樸”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도道”를 가리킨다. 이른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처음으로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한) “교화”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한) 일으킴이나 닦음을 말미암는 사람은 반드시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의) 모습(果報; 형태·상태)에 대해, 마음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마음이) 일으킨 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는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고”,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투박하고” 소박한 “도道”로써, 안정되어야 하고, “진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마음이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 (이른바) 그것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을) 텅 비움으로써, (그것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다.

 

無名之樸, 亦將不欲.

(나아가, 일부러 일삼음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소박하고) 투박한 도道, (이것) 또한 (나는) 장차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게 할 것이다.

 

非但不得欲於有法, 亦不得欲於此無名之樸也. 前. 以無遣有. 此, 則以有遣無. 有無, 雙離. 一中道也.

(이 문장이 뜻하는 바는) 단지, (일부러 일삼음이) ‘있는’ 마음의 모습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을 얻지 않아야 하는 것뿐 아니라, 또한 (일부러 일삼음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투박한 바(樸; 道)”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을 얻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앞 문장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으로써,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의 모습)으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해야 한다”고 일컫는다. 이 문장은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으로써,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는’ 모습)으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해야 한다”고 일컫는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의 모습)과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는 모습)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것이) ‘일중(一中; 一玄)’의 이치이다.

 

不欲以靜, 天下自正.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과 ‘없음’ 모두에 대해)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이 그것 모두에 대해) 멈추게 되면,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된다.

 

靜, 息也. 前, 以無名遣有. 次, 以不欲遣無. 有無旣遣, 不欲, 還息. 不欲, 旣除, 一中, 斯泯. 此, 則遣之又遣, 玄之又玄. 所謂探幽索隱, 窮理盡性者也. 旣, 而一切諸法, 無非正眞. 梯稗瓦甓悉, 皆至道. 故云天下, 自正. 此一句, 結衆妙之門也.

“정靜”은 멈춘다는 말이다. (앞) 앞 문장은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음’으로써,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앞 문장은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해)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음’으로써,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으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과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이) 이미 (모두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말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는다”는 뜻이자, (마음이 그렇게 하기를) 멈춤으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음”이 이미 사라졌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음”이 이미 사라졌다는 말은 ‘일중(一中; 一玄)’이 이미 사라졌다는 뜻이 된다. 이것이 바로 ‘멀어지고 또 멀어짐’이며, (1장이 일컬은) “어렴풋하고 또 어렴풋함”이다. (이것이 ‘중현重玄’ 바로 ‘거듭 어렴풋함’이다. 이것이 바로) 그윽한 바를 탐구하고 비밀스러운 바를 탐색하는 일이자, (세상의) 리理를 궁리하고, (만물의) 본성을 발휘하는 일이다. 이미, (그렇게 되면) 따라서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모든 것이 바르지 않거나, 참되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피나 돌피, 기와나 벽돌 모두가 (그윽한 바와 비밀스러운 바, 다시 말해 리理나 본성에 있어서) 모두 도道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컬었다.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된다.” (요컨대) 이 한 문장은 (1장이 일컬은) “중묘지문衆妙之門”에 대한 결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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