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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02. 천하개지天下皆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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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영의 노자의소 : 02. 천하개지天下皆知

독립출판 무간 2022. 2. 4. 03:10

02. 천하개지天下皆知

 

 

天下皆之章, 卽是第二大段, 第一章, 廣明道法. 此章所以次前者, 前章明有無二觀, 麄妙不同. 故次此章, 卽顯無爲之能, 有爲之弊. 就此章中, 義分爲兩. 第一, 明凡情, 執滯, 顚倒, 生迷. 第二, 顯聖智, 虛凝, 忘功, 濟物.

천하개지 장은 (상권을 크게 나눈 세 단락 중) 두 번째 큰 단락의 첫 번째 장으로서, 도道의 실현에 대해 설명한다. 이 장이 앞 장의 다음에 놓인 까닭은 (자연 곧 도 곧 만물의 본성 곧 리 곧 교를 실천하는) “유욕有”과 “무욕無”의 2가지 방법과 (그) 차이不同에 대한 앞 장의 설명이 거칠고 어렴풋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 장의) 다음에 놓인 이 장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의 효능과 일부러 일삼는 바가 있음의 병폐에 대해 설명한다. (요컨대) 이 장은 의미 상 두 문단으로 나뉜다. 첫 번째 문단, 보통 사람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붙잡고, 집착하며, 일어서고, 넘어지는데, (따라서) 어리석게 됨을 설명한다. 두 번째 문단, 성인은 지혜로운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대한) 집착을 텅 비우고, 공功을 잊어버리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만물을 구제하게 됨을 설명한다.

 

 

第一, 明凡情, 執滯, 顚倒, 生迷. 就此章中, 又開二別. 初兩句, 汎辯美善, 擧體不眞. 後六句三雙, 明諸法無實. 初汎辯美善, 擧體不眞.

첫 번째 문단, 보통 사람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붙잡고, 집착하며, 일어서고, 넘어지는데, (따라서) 어리석게 됨을 설명한다. 이 문단은 다시 두 문장으로 나뉜다. 앞 두 문장은 아름답게 여기고 대함 착하게 여기고 대함에 대해 설명하고, (2가지 모두의 실상이) 본래 참되지 못함을 설명한다. 뒤 세 쌍 여섯 문장은 여러 여김과 대함이 실상이 없음을 설명한다. 먼저, “아름답게 여기고 대함”과 “착하게 여기고 대함”에 대해 설명하고, (2가지 모두의 실상이) 본래 참되지 못함을 설명한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세간의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리고 일삼는 아름다운 바, 그것은 아름답지 못한 바일 따름이다.

 

天下者, 世間之總名也. 皆, 咸悉也. 美, 悅愛也. 上元經云, 諸天之下, 諸地之上, 其中人物, 名曰世間. 言一切蒼生, 莫不躭滯諸塵, 妄執美惡. 違其心者, 遂起憎嫌, 名之爲惡. 順其意者, 必生愛染, 名之爲美. 不知諸法, 卽有卽空. 美惡旣空, 何憎何愛? 故莊子云, 毛嬙孋姬, 人之所美,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又云, 美者自美, 吾不知其美. 惡者自惡, 吾不知其惡. 以斯所驗, 豈有美惡哉? 故知世間執美爲美, 此卽惡矣.

“천하天下”는 세간 곧 모든 것에 대한 이름이다. “개皆”는 모두를 뜻한다. “미美”는 기쁘게 여기고 친하게 대한다는 뜻이다. 『상원경上元經』은 일컬었다. “모든 하늘 아래, 모든 땅 위, 그 사이의 사람과 사물, (이 모든 것을 이름 지어 부른 것이) 이른바 세간이다.” 그런데 세간의 사람들은 여러 티끌에 빠진 채 집착하지 않음이 없는데, 아름답게 여기고 대하는 바 아름답지 못하게 여기고 대하는 바를 헛되이 집착하지 않음이 없다. (일삼고자 하는) 그 마음을 거스르는 것은 미워하는 데 이르거나 싫어함을 일으켜서 그것을 “아름답지 못한 바惡”로 이름 지어 부르고 여기며 대한다. (일삼고자 하는) 그 의지에 맞는 것은 반드시 기쁘게 여기고 친하게 대함과 (그렇게) 물들여짐을 일으킨 채, 그것을 “아름다운 바”로 이름 지어 부르고 여기며 대한다. (이것은) 여러 여김과 대함이 (실상이) 있는 바 같지만, (그것이) 텅 빈 바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아름답게 여기고 대하는 것 아름답지 못하게 여기고 대하는 것이 본래 (실상이) 텅 빈 바인데, (따라서 그것을) 어찌 기쁘게 여기고 친하게 대하거나 미워하겠는가?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고대의) 모장毛嬙과 이희孋姬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는 미녀들이지만, 물고기가 그 모습을 보면 물속 깊이 들어가 버리고, 새가 그 모습을 보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린다.” 또한, 일컬었다. “(세간의 사람들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하고, (자기) 스스로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겠다. (세간의 사람들도)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고, (자기) 스스로도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아름답지 못한 사람인지 알아차리지 못하겠다.” 이로써 알아차리건대, 어찌 아름다운 바 아름답지 못한 바 (실상으로서 본래) 있는 것이겠는가? 요컨대, 세간(의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아) 집착하고 (일부러) 일삼는 “아름다운 바美”, 이것은 곧 “아름답지 못한 바惡”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세간의 사람들이) 모두 알아차리고 일삼는 착한 바, 그것은 착하지 못한 바일 따름이다.

 

言凡鄙之流, 迷於眞理, 非但躭淫聲色, 抑乃貪著名譽, 求名喪身, 利己害物. 不知名善擧體虛妄. 故下文云, 名與身孰親? 莊云, 爲善無近名. 又云, 其所矜惜, 無非名善者也. 是知矜名執善於理不臧, 唯當忘善惡, 而居中. 方會無爲之致也. 後明諸法無實.

이른바, 세간의 사람들이 비천하게 되는 과정, 참된 (본성이자 실상인) 리理에 대해 어리석게 되고, 이내 (일부러 일삼은) 음란한 소리와 색깔에 빠지게 되며, 이내 (일부러 일삼아) 이름이 드러남을 탐내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드러난) 이름을 구하다 자신을 망치게 되며, (일부러 일삼아) 자신을 이롭게 하다가 천하를 해치게 된다. (이것은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과 착함 본래 실상이 텅 비고 헛된 바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권의 44장은 일컬었다. “이름과 자신 중 어느 것이 친하게 여기고 대할 바인가?”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저절로 그러한) 착함善을 일삼되, (일부러 일삼은) 이름을 가깝게 하지 마라.” 또한, 일컬었다. “그 우쭐하게 하고 뽐내게 하는 바,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과 착함善 아닌 것이 없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에 우쭐하고 “착함善”에 집착하는 것이 (참된 본성이자 실상인) 리理에 따르는 일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착함善”과 “착하지 못함惡”을 잊어버림으로써, (“아름다움 아름답지 못함”, “착함이나 착하지 못함不善과 같은 실상이 아닌 바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고, 참된 본성인 리와 같이 실상인 바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난)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의 끝점 조화되어야 한다. 이후, 여러 여김과 대함이 실상이 없음을 설명한다.

 

有無相生

있음과 없음은 서로 낳는다.

 

有無二名, 相因相立. 推窮理性, 卽體而空. 旣知有無相生, 足明萬法無實.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음과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有”,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와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음無”의 2가지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말미암고 서로(에게서 서로가) 세워진다. (따라서) 리理를 끝점에 다다르게 한 바와 본성을 끝점에 다르게 한 바는 이른바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고자 하는 바로서 도) 본체(; 자연)이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빔(; 작용)이다. (따라서) “있음有”과 “없음無”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 바임을 알아차리게 되면, 여러 여김과 대함이 실상이 없는 바을 알아차리게 된다.

 

難易相性

어려운 바와 쉬운 바는 서로 이룬다.

 

空心慧觀, 無易無難. 分別執情, 有難有易. 是知難易二法, 相互而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빈 마음으로 지혜롭게 비추고 살피기 때문에, “쉬운 바易”도 없게 되고, “어려운 바難”도 없게 된다. (일부러 일삼아) 나누고 가르는分別 마음으로 (그것이 그러한 것으로 여기고 대하며) 붙잡아 두고 일삼고자 하기 때문에, “어려운 바難”도 있게 되고, “쉬운 바易”도 있게 된다. 따라서 “어려운 바難”와 “쉬운 바易”의 2가지 여기고 대함은 서로(가 서로를) 말미암고 서로(가 서로를) 이루는 바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長短相形

긴 바와 짧은 바는 서로 드러난다.

 

以長形長, 則無長. 以短比短, 則無短. 故知長短相形, 而有者也.

긴 것을 가지고 길다는 것을 드러내 보라, (짧은 것에 비해서 길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일 뿐) 이른바 (긴 것으로 여기고 대하는 바의 실상인) “긺長”은 없다. 짧은 것을 가지고 짧다는 것을 나타내 보라, (긴 것에 비해서 짧다고 여기고 대하는 것일 뿐) 이른바 (짧은 것으로 여기고 대하는 바의 실상인) “짧음端”은 없다. 따라서 길고 짧음은 서로 드러나고, (긴 바와 짧은 바로 여기고 대함에) 따라서 긴 것과 짧은 것이 있게 됨을 알아차려야 한다.

 

高下相傾

높은 바와 낮은 바는 서로 다툰다.

 

傾, 奪也. 夫有高, 則有下. 無下, 則無高. 何者? 夫以尺比寸, 尺卽爲高. 以尺比丈, 尺卽爲下. 向者之高, 今之成下. 故知高下傾, 無定相. 更相傾奪. 所以皆空也.

“경傾”은 (서로) 다툰다는 뜻이다. 그런데 “높은 바高”가 있기 때문에, “낮은 바下”가 있게 된다. “낮은 바下”가 없으면, “높은 바高”도 없게 된다. 무슨 뜻인가? 1척(尺; 약 30㎝)이 1촌(寸; 약 3㎝)과 비교되면, 1척은 “높은 바高”가 된다. (그러나) 1척이 1장(丈; 약 300㎝)과 비교되면, 1척은 “낮은 바下”가 된다. (똑같은 1척이지만) 앞에서는 “높은 바高”가 되고, 뒤에서는 “낮은 바下”가 된다. 따라서 “높은 바高”와 “낮은 바下”가 (서로) 다투는데, (모두) 정해진 실상이 없기 때문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다시 말해, (여기고 대하는 바로서의 “높음高”과 “낮음下”이) 서로 뒤집히고 빼앗기는데, (“높음高”과 “낮음下”의 실상이) 모두 텅 빈 바이기 때문이다.

 

音聲相和

음音과 성聲은 서로 조화된다.

 

夫宮商絲竹, 相和而成. 推求性相, 卽體皆寂. 以况萬有, 虛假亦然.

궁宮과 상商 (등의 음音), 현악기와 관악기 (인 거문고와 가야금 등의 “성聲”)은 서로 조화되고 서로 완성한다. (그러나 “음音”과 “성音”의) 본성과 실상을 미루어 비추고 살피건대, 이른바 본체가 모두 잠잠하다(; 텅 비었다). (각角·치徵·우羽의 “음音”, 타악기인 북과 장구의 “성音”과 같이 일부러 일삼은) 다른 것들 역시 (그) 텅 빔과 헛됨이 또한 그러하다.

 

先後相隨

앞이 되는 바와 뒤가 되는 바는 서로 따른다.

 

夫以今望昔, 所以有今. 以昔望今, 所以名昔. 而今自非今, 何能有昔? 昔自非昔, 豈有今哉? 旣其無昔無今, 何先何後? 是有先有後者. 三時相隨. 而竟無實體也.

‘지금’에서 ‘옛날’을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은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인) ‘지금’이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서 ‘지금’을 바라볼 수 있는 까닭은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른) 이름인 ‘옛날’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지금’이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부른) ‘지금’이 아닌 바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어찌 (‘지금’에서) ‘옛날’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 ‘옛날’이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부른) ‘옛날’이 아닌 바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옛날’에서) 어찌 ‘지금’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만약) 그 ‘옛날’도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바(로부터 나온 것)이고, (그) ‘지금’도 (일부러 일삼아 지어 부를 이름이) 없는 바(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어찌 “앞이 되는 바善”가 있게 되고, “뒤가 되는 바後”가 있게 되겠는가? 이것이 “앞이 되는 바先”가 있게 되는 까닭이고, “뒤가 되는 바後”가 있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3가지 시간이 서로 따르게 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앞이 되는 바先”와 “뒤가 되는 바後”가) 실상이 없는 본체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第二, 顯聖智, 虛凝, 忘功, 濟物.

두 번째 문단, 성인은 지혜로운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대한) 집착을 텅 비우고, 공功을 잊어버리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천하를 구제하게 됨을 설명한다.

 

是以聖人治.

성인은 이로써 다스린다.

 

是以, 連上之辭也. 聖人者, 體道契眞之人也. 亦言聖者, 正也. 能自正己, 兼能正他. 故名爲聖. 治, 理也. 卽此聖人慈悲求物, 轉無爲之妙法. 治有欲之蒼生. 所治近指上文, 能治屬在於下. 仍前以發後. 故云聖人治也.

“시이是以”는 앞(의 문단)에서 말한 바를 뜻한다. “성인聖人”은 도道를 체득한 사람, (이른바) 참된 바(; 자연)와 조화된 사람이다. 또한 성인聖者 (천하의 참되지 못한 바를) 바로잡는 사람이다. (“성인”은) 스스로 자신(의 참되지 못함)을 바로잡고, 더불어 (참되지 못한) 천하를 바로잡는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불러 “성스러운 사람聖”이라 한다. “치治”는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인의 자비 곧 천하를 구제함이고,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게 함 곧 어렴풋하게 여기고 대하게 함이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 곧 천하蒼生를 “다스림”이다. (요컨대, 성인의) “다스림”의 본체는 앞 문단(에서 말한 바)이고, “다스림”의 작용은 다음 문장(에서 말하는 바)이다. (이른바) 앞 문단(의 내용)을 말미암아 뒤 문장(의 내용)을 펼친다. 따라서 일컬었다. “성인은 (이로써) 다스린다.”

 

處無爲之事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일삼음에 임한다.

 

言聖人寂而動, 動而寂. 寂而動, 無爲而能涉事. 動而寂, 處事不廢無爲. 斯乃無爲卽爲, 爲卽無爲. 豈有市朝山谷之殊? 拱墨當塗之䣓耶? 故言處無爲之事也.

성인은 잠잠하게 움직이고, 움직이되 잠잠하다. ‘잠잠하게 움직인다’는 말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일삼음에 다다른다는 뜻이다. ‘움직이되 잠잠하다’는 말은 일삼음에 임하여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게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일삼음이자, 일삼음에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이다. (성인에게 있어서) 시장과 조정에 있을 때 산과 계곡에 있을 때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 그것이 어찌 차이나겠는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있을 때 팔을 걷어붙인 채 나설 때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 그것이 (어찌) 차이나겠는가? 따라서 일컬었다.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일삼음에 임한다.”

 

行不言之敎

(일부러 일삼은) 말이 아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빈 잠잠한) 모습으로써 가르친다.

 

妙, 體眞源. 絶於言象. 雖復虛寂. 而施化無方. 豈唯眞不乖應? 抑亦語於不妨黙? 旣而出處語黙. 其致一焉. 端拱寂然. 而言滿天下. 豈曰杜口, 而稱不言哉? 故莊子云, 言而足者, 則終日言而盡道. 言而不足者. 則終日言而盡物.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어렴풋한 바는 (도道의) 본체(; 자연)이고, (만물의) 참된 바(; )이며, (천하의) 근원(; 본성)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부러 일삼은) 言象을 벗어나 있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텅 빈 채 잠잠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만물과 천하를) 바로잡지施化 못하는 바가 없다. 이른바, 어찌 (어렴풋한 바에 대한) 참됨이 (그것을) 따름과 (서로) 어긋나겠는가? 이른바, 어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에 대한 어렴풋한) 은 (그것에 대한) 침묵과 (서로) 어긋나겠는가? 그것은 (서로) 하나에 다다른다. (따라서 성인은) 가만히 손을 모은 채 잠잠하게 자리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이 하나의) 이 되어 천하를 (가득) 채우게 된다. (그런데) 어찌 (성인이) 입을 다문다고 하겠으며, 을 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이 (그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바라면, 하루 내내 말을 해서라도 (천하의 근원인) 도道를 표현하겠다. 그러나 은 (그것을 표현하기에) 부족한 바이다. 따라서 하루 내내 말을 하더라도 (의 작용인) 천하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萬物作而不爲始

(먼저) 천하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자신의 본성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고, (그다음 몸으로 그것을) 따르게 함으로써, (일부러 일삼아) 앞이 됨을 일삼지 않게 한다.

 

萬物者, 一切群生也. 作, 感動也. 始, 先也. 聖人無心, 有感斯應. 譬彼明鏡, 方玆虛谷. 感而後應. 不爲物先. 故莊子云, 常和而不唱也.

“만물萬物”은 천하一切群生를 뜻한다. “작作”은 (먼저 마음으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본성을) 느끼고 (그다음 몸으로 그것에) 따른다는 뜻이다. “시始”는 (일부러 일삼아) 앞이 된다는 뜻이다. 성인은 (먼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천하의 본성을 느끼고, (그다음 몸으로 그것에) 따른다. 마치, 저 맑은 거울과 같고, 이 텅 빈 계곡과 같다. (따라서 성인은 먼저 천하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자신의 본성을 마음으로) 느끼게 하고, 그다음 (몸으로 그것에) 따르게 한다. (따라서) 천하가 (일부러 일삼아) 앞이 됨을 일삼지 않게 한다. 따라서 『장자莊子』는 일컬었다. “언제 어디서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과) 조화되게 하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있음을) 지향하게 하지 않는다.”

 

爲而不恃

(천하를) 바로잡지만 (그) 공功에 기대지 않는다.

 

爲, 施化也. 恃, 怙賴也. 夫聖人虛懷. 逗機利物. 自他平等, 物我兼忘. 雖有大功, 終不恃賴, 忘其功也.

“위爲”는 바로잡는다施化는 뜻이다. “시恃”는 기댄다는 뜻이다. 이른바, 성인은 (마음에 일부러 일삼아) 품은 바를 텅 비운다. (따라서) 천하에 맞추어 천하를 이롭게 한다. (따라서) 자신과 천하(에 대한 여김과 대함)이 고르고 한결같아진다. (따라서) 천하와 자신(의 고르고 한결같지 못함)이 더불어 잊힌다. (따라서) 큰 공功을 이루더라도 끝내 (그것에) 기대지 않는데, (자신이 이룬) 그 공功을 (스스로)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成功不處

공功을 이루지만,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

 

覆載萬物, 功格天地. 照燭蒼生, 光逾日月. 而推功於物, 不處其德也.

(성인은) 천하萬物를 보듬고 살피는데, (그) 공功이 하늘과 땅에 버금간다. 천하蒼生를 비추고 밝히는 데, (그) 밝음이 해와 달을 넘어선다. 그러나 (성인은 그) 공功을 천하에게 돌린 채, 그 덕스러움에 머물지 않는다.

 

夫唯不處是以不去

이른바 오로지 (공功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지지 않게 된다.

 

夫者, 語端. 唯之言獨. 夫能造化天地, 亭毒含靈, 有大至功, 而推功於物者, 其唯聖人乎? 只爲能忘其功, 而至功彌遠. 聖德斯在, 是以不去.

“부夫”는 ‘이른바’라는 뜻이다. “유唯”는 ‘오로지’라는 뜻이다. ‘이른바’, 하늘과 땅을 살피고 천하含靈 보듬는 크고 지극한 공功이 있지만, (그러한) 공功을 천하에게 돌릴 수 있는 사람이 ‘오로지’ 성인뿐이겠는가? (‘오로지 성인이 아니더라도) 단지, (‘이른바’) 그러한 공功을 잊어버릴 수 있거나 (그러한 공功에 대한 잊어버림을) 일삼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공을 천하에게 돌릴 수 있게) 되는데, (따라서 크고) 지극한 공功이 멀어짐에 다다르게 되고, (따라서) 성스러운 덕스러움 이것이 자리하게 되며, 따라서 (그러한 공功이) “사라지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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