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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항아리와 장독대 2

독립출판 무간 2016. 8. 21. 20:11

우리가 지난 해 큰 항아리들을 하나 둘 모으기 시작할 때의 동기는 단순했습니다. 도시로 살길을 찾아 떠난 뒤에 폐가가 되어 허물어져가는 집을 지키다가 몇 해 지나지 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깨어져 없어질 이 항아리들은 본디 농민들의 소중한 재산이었습니다. 한 섬들이 항아리는 쌀 한 섬을 주고 구했던 것이고, 닷 말들이 항아리는 쌀 닷 말을 옹기장이에게 퍼주고 장독대에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도시에 가면 이 항아리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짐을 옮기는 데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깝지만 버리고 가는 수밖에요. 그런데 광명단을 섞어 반짝반짝 윤이 나는 요즈음 옹기들과는 달리 천연유약인 잿물만 입혀 구운 이 숨쉬는 항아리들은 한 번 깨지고 나면 다시는 구워낼 수 없는 소중한 문화유산들입니다. 쓸모가 없어서 다시 구워내지 않기도 하지만 구워낼 기술을 지닌 사람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그런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장작을 몇 날 며칠씩 때어서 구워내야 하는데 수지가 맞지 않아 구워낼 엄두를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한 번 없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처음 항아리가 100개로 늘어나고 200개로 늘어날 때는 이제 그만 모아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많은 항아리를 모아 어디에 쓰랴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모아놓고 보니 하나 둘 쓸모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농사지으러 변산에 들어오면서부터 길러내는 모든 농작물에 제초제나 농약을 쓰지 않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지라, 돋아나는 풀들과 악전고투하면서 길러낸 농작물의 이파리 하나 뿌리 하나에 땀이 배어 아깝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고구마 넝쿨을 걷어 효소를 담고, 시장에 내다 팔 수 없는 조그마한 감들을 따서 식초를 담고, 바랭이풀과 싸우면서 길러낸 고추대에 매달린 끝물 고추를 따 염장해서 고추김치를 담고, 가뭄이 들어 제대로 여물지 못한 콩을 추수하다 떨어진 콩 한 톨까지 모아 간장과 된장과 고추장을 담고... 이러다보니 빈 항아리가 하나씩 둘씩 채워져 어느새 항아리 백여 개 가까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 항아리에 가득 찬 여러 가공식품들 가운데 일부는 변산 식구들이 먹고 일부는 이웃에게 나누어줄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나누어줄 차례를 생각했습니다. 변산 식구들이 아직은 자급자족 체제를 갖추고 살지 못하므로 알게 모르게 남의 덕에 사는 측면이 많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신고 있는 신발에서부터 농기구, 그릇, 전기와 전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의 덕을 입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을 생산해내는 분들에게 빚을 갚고, 남는 힘이 있으면 어려운 분들 차례로 돕기로 하자. 나이 들어 의지할 데 없는 노인들, 어려서 부모 잃은 아이들, 정신과 신체에 큰 장애를 입어 사회에 정상으로 적응해서 살기 힘든 이들과 함께 사는 방법도 연구하기로 하자. 그러려면 어지간히 소득도 있어야 하는데 아다시피 유기농이나 자연농법을 이용해서 곡식이나 남새를 길러 내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 땅을 살리고, 그 땅에서 건강한 농작물을 길러내어 이웃과 나누고 싶지 않은 농민이 어디 있으랴마는 농산물이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유기농과 자연농법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으려면 제초제, 화학비료, 농약, 항생제가 섞인 사이비 유기질 비료를 이용해서 농사짓는 것보다 몇 곱절 더 힘이 들기 때문에 젊은이들이 없는 농촌에서 노인들 일손만으로 이 일을 감당하기 힘들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현재 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 일차 생산물을 그대로 시장에 내놓을 경우에 이웃에 도움을 줄 수 있기는 커녕 우리 입에 풀칠하는 데도 바쁠 것이다. 이래저래 우리가 지은 농사에서 생기는 일차 생산품들을 가공해서 부가가치를 높일 궁리를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큰 식품공장을 세워 대량샌산 체제를 갖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하려면 비용 문제뿐만 아니라 공장제 생산에 따르는 인적, 물적 관계의 변화와 거기에 뒤따르는 여러 부작용도 함께 감당해야 한다. 어차피 항아리를 모아 장독대 위헤 놓은 뜻도, 또 흙으로 빚은 항아리에 걸맞는 장독대를 쌍으려면 토담을 치고 바닥도 살아 있는 흙을 이용해 마감하자고 고집한 것도, 사람들이 버려서 쓸모 없는 남은 '여분'을 알뜰하게 이용하여 쓸모 있는 것으로 바꾸자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니까 농사를 짓고 거기에서 생산된 것을 가공하는 데도 이 뜻을 잊지 말자.' 이렇게 다짐합니다.

 

올해는 남은 항아리에 몸에 이로운 산야초들을 채집하여 효소와 술도 담고, 콩 농사도 더 부지런히 지어 간장과 된장도 더 담고, 가까운 바다에서 나는 고기들 가운데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아서 값이 안 나가는 고기들을 항아리들에 담아 그늘지고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곳에 오래오래 위생적으로 보관하면서 곱게 삭여 맛있는 젓갈도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가 마음에 두고 있는 새로운 공동체와 실험학교를 이루어낼 재원도 마련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윤구병, 잡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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