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주자 성리학을 넘어 새로운 사상을 모색한 조선시대 철학자 이충익의 "초원담노" 풀이 연재를 시작하며 본문
조선시대『도덕경道德經』에 대한 주석서는 총 5종으로,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의『순언醇言』,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의『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1716~1787)의『도덕지귀道德指歸』, 초원椒園 이충익李忠翊(1744~1816)의『초원담노椒園談老』,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의『정노訂老』이다.
그런데 율곡의『순언』, 서계의『신주도덕경』, 보만재의『도덕지귀』, 연천의『정노』는 주자朱子 성리학性理學의 폐단을 보완하기 위한『도덕경』주석으로 볼 수 있다. 율곡의『순언』은 사림士林이 대거 조정朝廷에 등용되면서 그동안 갈고 닦았던 주자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사변체계로 명분名分을 세워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서로 정쟁政爭을 일으키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1575년 선조宣祖 8년부터 동서 분당分黨이 시작되어 정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주자 성리학에서 강조되지 않았던 ‘마음 비움’과 ‘절제’를『도덕경』에서 차용하고 도체道體, 심체心體, 수기치인修己治人 등의 주자 성리학적 체계로 다듬은 것이고, 서계의『신주도덕경』은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이라는 크나큰 고난을 당하고도 여전히 집권세력이 예송논쟁禮訟論爭과 같은 주자 성리학적 명분론名分論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으로서, ‘소박함’을 강조하는『도덕경』을『논어論語』의 “문질빈빈文質彬彬”을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며, 보만재의『도덕지귀』는 영조英祖의 탕평책蕩平策 성공 이후 당쟁黨爭이 완화되고 서양 문물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전통과학인 상수학象數學을 중심으로 자연과학까지 아우를 수 있는 주자 성리학의 형이상하적 사유체계를 탐구한 것이고, 연천의『정노』는 주자 성리학에서 성리학을 제거하여 주자학朱子學을 경세經世의 학문으로 다시 정초하는 동시에, 서계의『신주도덕경』과 달리 주자학이 원시原始 유학儒學의 사유체계를 벗어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원의『초원담노』는 주자 성리학의 폐단을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기 위한『도덕경』주석으로 볼 수 있다. 초원에게 있어서, ‘있음(有; 氣)’은 ‘없음(無; 理)’을 말미암거나 ‘없음’에서 비롯되는 바가 아니다. ‘있음’은 ‘스스로 생겨나自生’ ‘저절로 그러한自然’ 존재형상을 이룬다. ‘없음’은 ‘있음’을 말미암게 하거나 ‘있음’을 비롯되게 하는 바가 아니다. ‘없음’은 ‘스스로 생겨나’ ‘저절로 그러한’ 존재형상을 이룬다. 다시 말하면, ‘있음’과 ‘없음’은 존재양태에 있어서 ‘독립적’이다. 또한, ‘있음’과 ‘없음’은 서로 그 작용의 형상을 이룬다. ‘있음’이 아니면, ‘없음’은 그 작용의 형상을 이룰 수 없다. ‘없음’이 아니면, ‘있음’은 그 작용형상을 이룰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있음’과 ‘없음’은 작용양태에 있어서 ‘상관적相關的’이다. 따라서 초원은 그 ‘스스로 생겨나’ 독립적인 존재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하고自然’, 그 ‘스스로 생겨나는’ 바에 따라서 상관적인 작용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함自然’, “이것이 진실로 하늘과 땅의 신령스러운 가르침이고, 사람과 사물에 두루 통하는 법칙이다(是, 固天地之神敎, 而人物之弘軌也 :「後序」)”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책은 주자 성리학의 폐단을 보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던 조선시대 철학자 초원 이충익의『초원담노』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초원의「후서後序」에 대한 풀이, 각 장章의 경문經文 풀이, 각 장의 경문에 대한 초원의 주註 풀이, 초원의 주에 대한 옮긴이의【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의 경문 앞에 독음讀音을 붙여 썼다. 필요한 경우, 풀이글 옆에 해당 경문을 붙여 썼다.
각 장의 경문과 각 장의 경문에 대한 초원의 주를 풀이하는 데 다음을 주로 참조했다.
焦竑弱侯 輯·이현주 역,「老子翼」, 서울: 도서출판 두레(2000).
김윤경,『초원담노-양명학자 이충익의 노자 읽기』, 서울 : 예문서원, 2013.
김학목,『초원 이충익의 담노 역주-조선을 다시보게 만드는 한 철인의 혁명적『노자』풀이』, 서울 : 통나무, 2014.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노자, 그리고 300여 년 전에 살았던 초원에게는 우리가 잊어버린 미래가 있다. 우리의 미래가 객체성보다 주체성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절대성보다 상대성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동일성의 통일보다는 차이성의 공존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추상적 이상보다는 구체적 삶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단절과 대립보다는 소통과 협력을 중시하는 세상으로, 갈등과 투쟁보다는 조화와 평화를 중시하는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노자와 초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도덕적 교훈이나 단편적 잠언箴言을 기대하기보다 우리의 시대에 담겨있는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철학적 사색을 시도해 주길 바란다.
끝으로, 동양철학을 마음으로 읽는 눈을 열어주신 양재열 선생님, 일부러 일삼지 않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조현규 선생님, 따뜻한 비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엄재춘 선생, 일상에서 철학하기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언제나 한결같이 지지해 주시는 어머니, 그리고 김은미, 산에봄, 산에별에게 감사를 표한다.
2018년 5월
지리산 자락에서 서 만 억
'초원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원담노" 제3장 :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저절로 그러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 (0) | 2018.05.23 |
---|---|
"초원담노" 제2장 : 서로가 말마암아 이루어진 것은 아름답거나 착하지 않다 (0) | 2018.05.21 |
"초원담노" 제1장 : '없음'도 독립적인 '없음'이고, '있음'도 독립적인 '있음'이다 (0) | 2018.05.21 |
"후서"... '자연自然', 이것이 진실로 하늘과 땅의 신령스러운 가르침이고, 사람과 사물에 두루 통하는 법칙이다 (0) | 2018.05.21 |
초원의 생애, 중기 강화학파, "초원담노" (0) | 2018.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