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후서"... '자연自然', 이것이 진실로 하늘과 땅의 신령스러운 가르침이고, 사람과 사물에 두루 통하는 법칙이다 본문
「후서後序」
‘없음無’을 귀하게 여기는 무리는 (‘있음有’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의 학문이 그 (되돌아가고 돌이켜야 할) ‘근원’을 알지 못하는 것을 수준 낮게 여겼다.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무리는 (‘없음’을 귀하게 여기는 무리가 이야기하는) 현묘한 ‘이치’가 (실제의) 사물(이나 사건)을 아우르지 못하는 것을 불만으로 여겼다. 각자 스스로 (자신을) 주인으로 높이고 (남을) 시종으로 낮추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녹아들거나 (서로를) 품어 안지 못했다. (따라서) ‘있음’과 ‘없음’이 모두 (그 의미가 올바르게) 규정되거나 (그 관계가 올바르게) 설정되지 못했다. 따라서 (저절로 그러한) 이치와 법칙이 어그러뜨려지고 망가뜨려졌다(無家, 卑世學之迷其本. 有家, 嫌玄理之不綜物. 各自主奴. 不相融攝. 有無, 俱不成立. 而道術裂).
무릇, 노자의 일컬음 (제2장의 “有無相生”). 말하자면, ‘있음’과 ‘없음’은 서로 (그 작용의) 형상을 이룬다. ‘있음’이 아니면, ‘없음’은 (그 작용의) 형상을 이룰 수 없다. ‘없음’이 아니면, ‘있음’은 (그 작용의) 형상을 이룰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있음’과 ‘없음’은 작용양태에 있어서 상관적이다) (夫, 老子之言. 曰, 有無相形. 非有, 無以形無. 非無, 無以形有也).
또한 (노자는 제1장에서) 일컬었다.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兩者, 同出而異名.” (말하자면) ‘있음’과 ‘없음’은 ‘(그) 이름이 (서로) 다르지만, (서로 그) 나온 곳을 같이 한다.’ (‘있음’도 ‘스스로 생겨나’ ‘저절로 그러하게’ 존재하는 바이고, 없음’도 ‘스스로 생겨나’ ‘저절로 그러하게’ 존재하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있음’과 ‘없음’은 존재양태에 있어서 독립적이다) ‘있음’과 ‘없음’은 곧 (독립적인) ‘있음’과 (독립적인) ‘있음’이다. ‘天地之始’와 ‘萬物之母’에는 다름이나 같음이 (분별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앞섬이나 뒤섬이 (분별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14장에서와 같이 “뒤섞여서 하나로 된 바混而爲一”이자, 제25장에서와 같이 “뒤섞여 있으면서 이루는 바有物混成”이기 때문이다) (又曰.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兩者, 同出而異名. 有與無, 名異, 而同出. 有無, 卽有有. 而天地之始, 與萬物之母, 非有異同, 非有先後也).
지금,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무리의 주장. 말하자면, “지극한 ‘없음’은 (무엇을) 낳을 수 없다. 따라서 ‘처음’으로 생겨나는 것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다.” 그 (‘처음’의 ‘있음’이 그 지극한) ‘없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처음’의) ‘있음’이 ‘스스로 생겨나는’ 것임을 부각시킨다(今, 有家之言. 曰, 至無者, 無以能生. 故始生者, 自生也. 以明其不生於無, 而自生之特有).
무릇, 하늘과 땅이 생겨나고, (그) 다음에 바야흐로 ‘하늘’과 ‘땅’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무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하늘과 땅이 ‘스스로 생겨나는’ 바로서의 ‘처음’(의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노자가 일컬은 “無, 名天地之始”에서 ‘無’) 그것을 이름 붙여 ‘有’라고 이름 부르는 일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이라는 이름은 붙여질 수도 없고, 이름 불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일은 일부러 일삼아 이름 붙여서 부를 수 ‘없는無’ 대상인 ‘스스로’ 생겨나는’ 바로서의 ‘처음’(의 ‘있음’)인 하늘과 땅을 “萬物之母”와 같이) 이름 붙여서 부를 수 ‘있는有’ 대상으로 일부러 일삼는 일이기 때문이다(夫, 天地生, 而後方有天地. 若, 指天地自生之始, 而號之曰有. 天地之名, 不立, 不成. 爲有).
다시 말하면,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무리는) ‘이미’ 생겨나 있는 (하늘과 땅) 그것을 말미암은 다음에, (그) ‘스스로 생겨나는’ 바로서의 ‘처음’(의 ‘있음’인 하늘과 땅)의 근원을 (일부러 일삼아) 소급해서, 그것을 이름 붙여 ‘없음’이라 이름 부른다. (따라서) 이때의 ‘없음’은 (‘있음’과 그 존재양태에 있어서 독립적이거나, ‘있음’과 그 작용양태에 있어서 상관적인 것으로서의 ‘없음’이 아니라, 단지 ‘이미’) ‘있음’을 말미암아, (그 근원을 일부러 일삼아 소급한 것으로서, ‘없음’이라) 이름 붙여지고 이름 불려진 (‘없음’일 따름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同出而異名”라고 일컬었던 것이다(故, 因旣生之後, 推原自生之始, 而號之曰無. 此無, 因有, 而立名者. 故曰同出而異名也).
‘스스로 생겨나는自生’ 것은 스스로 생겨날 따름이다. ‘저절로 그러한自然’ 것은 저절로 그러할 따름이다. 하늘과 땅은 (‘自生’하고 ‘自然’하는 바) 그것에 따라서 (하늘로서) 높고 (땅으로서) 두텁다. 만물은 그것에 따라서 생기고 자라며 시든다. ‘이미’ ‘(自)生’하고 ‘(自)然’하는 바, 그것을 일컬어 바야흐로 ‘있음’이라 한다(自生者, 不得不生者也. 自然者, 不得不然者也. 天地, 以之高厚. 萬物, 以之芸芸. 旣生而然, 方謂之有).
‘있음’이 (독립적으로) 있다는 말은 ‘없음’도 (독립적으로)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노자는 그 ‘이미’ ‘自生’하고 ‘自然’하는 바의 “처음母”을 가리켜, 그것을 “있음有”이라 일컬었듯이) 그 (‘이미’) ‘(自)生’하고 ‘(自)然’하는 바의 “처음始”을 (가리켜, 그것을) “없음無”이라 일컬었다(有有, 斯有無. 乃指其生而然者之始, 謂無也).
(무릇) 생겨나는 것은 ‘스스로’ 생겨난다. (그 ‘스스로’) 생겨나는 바에 따라서 (그 존재와 작용의) 형상이 (저절로) ‘그러하게’ 되는 것이 (노자가 일컬은) ‘자연自然’이다. (‘자연自然’에는) 어떠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도 없다. (‘자연自然’은) 그런 뜻이다(生者, 自生. 順有而爲形然者, 自然. 本無. 而語).
다시 말하면, 이것이 (노자가) “同出而異名”이라고 한 이유이고, (제25장에서) “일부러 일삼아 그것을 글자로 써서 말하자니 도道”라고 한 이유이다. 따라서 (오직) ‘있음’을 높이 받들어서 ‘없음’을 비판하거나, (오직) ‘없음’을 높이 받들어서 ‘있음’을 비판하는 일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논쟁과 같다(故, 此, 其所以同出而異名, 而强爲之字曰道者也. 然則, 崇有而攻無, 與崇無而攻有, 卽朝三之論也).
노자의 일컬음의 대략은 (‘이미’ ‘自生’하고 ‘自然’하는 존재로서, 생김·자람·시듦, 감각·지각·의지·행위 등과 같은 작용에 있어서)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잘 실천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는 마음의) ‘맑음’과 ‘고요함’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이다(蓋以老子之言, 善無爲, 而貴淸靜).
또한 (노자는 제40장에서) 일컬었다. “(천하)만물은 (일삼음이) ‘있음’으로써 살아간다. (그러므로 천하만물의 일삼음이) ‘있음’은 (도道와 같이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으로부터 생겨내야 한다.” 만약, (이 문구를) ‘없음’이 ‘있음’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이) 문구를 폭넓게 이해하지 못한 잘못(때문)이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있음’이 (‘만물’ 밖에 따로) 있고, (그 ‘만물’ 밖에 따로 있는 ‘있음’이) ‘만물’을 낳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사람들이 (노자가 말한 것과) 그 (뜻이) 일치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노자는) 어째서 유독 제40장에서 하필 “있음”과 “없음”, (‘만물’의 ‘있음’으로써) “살아감”, (‘있음’의 ‘없음’으로부터) “생겨나야 함”을 일컬었는가? 무릇, 그것은 그 (‘만물’의) “살아감”을 말미암아, (‘만물’이 살아가면서 되돌아가야 할) ‘근원’과 (돌이켜야 할) ‘처음’을 논한 것이다(又曰. 萬物生於有, 有生於無. 似若無先於有者, 此不能弘通文句之過也. 如謂, 有有, 生萬物, 人知其不恊. 何獨於上句必曰, 有無, 能生有乎? 此, 蓋因其生, 而原始之論也).
(노자가 살았던) 당시는 주周나라 말기였는데,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와 법칙이 (그러한) 세태를 부추기고 (그러한) 행태를 쫓아가며, (그 되돌아가야 할) ‘근원’을 어그러뜨리고 (그 돌이켜야 할) ‘처음’을 망가뜨렸다. (따라서 백성의 일부러 일삼은) 속임수와 거짓됨이 (만물이 각자 자라나듯) “무수히 일어났다(並作 : 제16장).” (따라서)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다. (따라서) 노자는 (그러한 당시를) 탄식하며, (그것을) 구제할 이치를 고민했는데, (따라서 노자는) 또한 그 ‘근원’으로 ‘되돌아감’(과 그 ‘처음’을 돌이킴)을 일컬었을 따름인 것이다. (當, 周之衰, 世之治方術者, 隨流逐迹, 迷失原始. 詐僞, 並作. 天下, 大亂. 老子, 慨然, 思撟救之方, 亦曰反其本而已).
(노자가 되돌아가야 할 ‘근원’이자 돌이켜야 할 ‘처음’으로 일컬은) ‘자연自然’은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저절로 그러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스스로’ 생겨나서 존재양태에 있어서 독립적인 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하고 (그 ‘스스로’ 생겨나는 바에 따라서 그 작용양태에 있어서 상관적인 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하다는 뜻이다. (만약, 그 ‘스스로’ 생겨나서 존재양태에 있어서 독립적인 형상을 이룸도) 그러하지 않고 (그 ‘스스로’ 생겨나는 바에 따라서 작용양태에 있어서 상관적인 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하지 않다면, 어찌 (그 ‘스스로’ 생겨나서 존재양태에 있어서 독립적인 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하고, 그 ‘스스로’ 생겨나는 바에 따라서 작용양태에 있어서 상관적인 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한) “만물과 언제나 함께 있고 어디서나 함께 할(常 : 제1장)” 따름이겠는가? (自然者, 不得不然. 不得不然者, 然乎然. 不然乎不然, 安常而已?)
(요컨대, 그 ‘스스로’ 생겨나 ‘독립적인’ 존재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하고自然’, 그 ‘스스로’ 생겨나는 바에 따라서 ‘상관적인’ 작용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함自然’) 이것이 진실로 하늘과 땅의 신령스러운 가르침이고, 사람과 사물에 두루 통하는 법칙이다. 만약, 무릇, ‘있음’과 ‘없음’에 대한 분별이라면, 노자가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일컬었는데, “同出而異名”이다. (그런데) 지금, “同出而異名”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 못한 채, (‘없음’을 귀하게 여기는 무리나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무리와 같이, ‘있음’과 ‘없음’에 대한 일부러 일삼은 분별) 그것에 집착하는 일은 곧 그 (노자가 살았던 당시처럼) 또한 (그러한) 말기(의 세태를 부추기고, 그러한 행태를 쫓아감으로써, 그 되돌아가야 할 ‘근원’을 어그러뜨리고, 그 돌이켜야 할 ‘처음’을) 망가뜨리는 일이며, (그 ‘스스로’ 생겨나 ‘독립적인’ 존재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하고自然’, 그 ‘스스로’ 생겨나는 바에 따라서 ‘상관적인’ 작용형상을 이룸도 ‘저절로 그러한自然’) 이치를 온전하게 실천하는 일이 아니다(是, 固天地之神敎, 而人物之弘軌也. 若夫有無之辨, 聖人明言之, 曰同出而異名焉. 今乃, 昧於同出而異名, 之執, 則其亦末流之失, 而非道之全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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