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왕필산책 : 도덕경 제38장 왕필주 "높은 수준의 덕스러움과 낮은 수준의 덕은 다르다" 본문
제 38 장
상덕上德, 부덕不德. 시이유덕是以有德. 하덕下德, 부실덕不失德. 시이무덕是以無德. 상덕上德, 무위無爲, 이무이위而無以爲. 하덕下德, 위지爲之, 이유이위而有以爲. 상인上仁, 위지爲之, 이무이위而無以爲. 상의上義, 위지爲之, 이유이위而有以爲. 상례上禮, 위지爲之, 이막지응而莫之應, 즉양비則攘臂, 이잉지而扔之.
고실도故失道, 이후덕而後德. 실덕失德, 이후인而後仁. 실인失仁, 이후의而後義. 실의失義, 이후례而後禮. 부례자夫禮者, 충신지박忠信之薄, 이란지수而亂之首. 전식자前識者, 도지화道之華, 이우지시而愚之始. 시이대장부是以大丈夫, 처기후處其厚, 불거기박不居其薄. 처기실處其實, 불거기화不居其華. 고거피故去彼, 취차取此.
높은 수준의 덕스러움德은 (낮은 수준의) 덕德과 다르다. (일부러 일삼거나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는) 덕스러움德이 있기 때문이다. 낮은 수준의 덕德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은) 덕德을 내버리지失 않는다. 그러므로 덕스러움德이 없는 것이다. 높은 수준의 덕스러움德은 일부러 일삼지 않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는다. 낮은 수준의 덕德은 (일부러) 그것을 일삼거나, (일부러 그것을) 일삼고자 한다. 높은 수준의 인仁은 (일부러) 그것을 일삼지만, (일부러 그것을) 일삼고자 하지는 않는다. 높은 수준의 의義는 (일부러) 그것을 일삼고, (일부러 그것을) 일삼고자 한다. 높은 수준의 예禮는 (일부러) 그것을 일삼고, 그것에 따르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며, 그것에게로 잡아당긴다.
그러므로 도道가 망가지고失 (낮은 수준의) 덕德이 뒤따르며, (도道의 운동모습 내지 작용상태인 높은 수준의) 덕스러움德이 망가지고 인仁이 뒤따르며, 인仁이 망가지고 의義가 뒤따르며, 의義를 망가지고 예禮가 뒤따르는 것이다. 무릇, 예禮는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의) 충실함과 진실함의 얇아진 바로서, 혼란의 근원이다. 앞의 인仁, 의義, 예禮는 도道(내지 덕스러움德)의 껍데기로서, 어리석음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그 두터운 바를 따르지, 그 얇아진 바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 알맹이를 따르지, 그 껍데기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기 때문이다.
“德”은 (만물이) 얻는 바得이다. (도道는 만물이) 언제 어디서나 얻게 하지, 잃게 하지 않는다. (만물을) 이롭게 하지, 해롭게 하지 않는다. 따라서 “덕스럽다德”고 한 것이다. (만물이) 어떻게 덕스러움德을 얻을 수 있는가? “道”를 말미암아서. (만물이) 어떻게 덕스러움德을 다할 수 있는가? “無”로써 일삼아서用. “無”로써 일삼으면, 싣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 따라서 만물이 “無”로써 일삼으면, 만물이 가지 못하는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만물이) “有”로써 (일삼으면), 그 생겨남生을 면하기에 부족하다. 따라서 하늘과 땅이 비록 넓지만, “無”로써 마음을 삼는 것이다. 비록 성인聖과 임금(의 위상)이 크지만, 텅 비움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이 나고 자라며 시드는 모습을) “돌이켜 살핀다(吾以觀復 : 제16장)”고 한 것인데, 그렇게 하면 하늘과 땅의 마음이 보이게 되며, 날마다至日 그것을 생각하면 앞선 왕들의 지극함이 보이게 된다. 따라서 그 사사로움을 없애고 그 ‘몸身’을 없애면, 천하四海에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며, 멀든지 가깝든지 이르지 못하는 곳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 ‘몸己’을 죽이지만, 그 마음을 남긴다면, 제 한 몸體조차 스스로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되며, 살과 뼈가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德者, 得也. 常得, 而無喪. 利, 而無害. 故以德爲名焉. 何以得德? 由乎道也. 何以盡德? 以無爲用. 以無爲用, 則莫不載也. 故物無焉, 則無物不經. 有焉, 則不足以免其生. 是以天地, 雖廣, 以無爲心. 聖王, 雖大, 以虛爲主. 故曰以復而視, 則天地心見, 至日, 而思之, 則先王之至覩也. 故滅其私, 而無其身, 則四海莫不贍, 遠近莫不至. 殊其己, 而有其心, 則一體不能自全, 肌骨不能相容).
【해 설】
왕필주 “德者, 得也(이하, 글자를 읽는 소리音를 아울러 밝히지 않는다)”에서 得의 대상은 만물 각자의 본성性, 본성의 명령性命,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 : 제25장)”이다. 다시 말하면, 왕필에게 있어서 德은 만물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하는 것이다.
왕필주 “何以盡德”에서 盡은 실천 내지 실현을 의미한다.
왕필주 “由乎道也”에서 由는 “따른다(法 : 제25장)”는 의미이다.
왕필주 “以無爲用”에서 無는 ‘없다’는 뜻으로서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나 욕구,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用은 ‘일삼는다’는 뜻으로서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의지하거나 행위한다는 의미이다.
왕필주 “莫不載也”에서 載는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며, 시들게 한다는 의미이다.
왕필주 “則無物不經”에서 經은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시드는 전체 과정을 의미한다.
왕필주 “有焉, 則不足以免其生”에서 有는 生의 원인으로서 개인적으로 지향하거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욕구나 가치,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름을 의미하며, 生은 有의 결과로서 제2장의 “뛰어난 것賢”, “얻기 어려운 재화難得之貨”, 제9장의 “금金”과 “옥玉”, “부유해지는 것富”과 “고귀해지는 것貴”, 제12장의 “오색五色”, “오음五音”, “오미五味”,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馳騁畋獵”, 제13장의 “총애寵”, 제18장의 “자애로움慈”, “효성孝”, “충신忠臣”, 제19장의 “성인이 되는 것聖”, “똑똑한 사람이 되는 것智”, “어진 것仁”과 “의로운 것義”, “만들기 어려운 것巧”, “이롭게 하는 것利”, 제20장의 “學”, 제24장의 “돋보이려고 발뒤꿈치를 드는 것企”, “앞서 가려고 큰 걸음으로 걷는 것跨”, “따지거나 가리는 것自見”, “잘난 체하는 것自是”, “뽐내는 것自伐”, “우쭐거리는 것自矜”, 제27장의 “轍迹”, “瑕謫”, “籌策”, “關鍵”, “繩約” 등이 비슷한 부류에 속한다.
왕필주 “以無爲心”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왕필주 “至日, 而思之, 則先王之至覩也”에서 之와 至는 “虛”를 의미하며, 覩는 “視”를 의미한다.
왕필주 “故滅其私, 而無其身”과 “殊其己, 而有其心”에서 私, 身, 己, 心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에 따른 감각, 지각, 의지, 행위를 의미한다.
왕필주 “四海莫不贍, 遠近莫不至”는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無不爲 : 제37장)”는 의미이다.
왕필주 “一體不能自全, 肌骨不能相容”은 “물고기가 연못을 벗어나는 것(魚不可脫於淵 : 제36장)”과 같은 “문제상황(大患 : 제13장)”으로서, “다툼을 벌이고(爭 : 제3장)”, “도둑질을 일삼으며(爲盜 : 제3장)”, “눈이 멀거나 귀가 멀거나 입맛이 망가지거나 행동이 어지러워진(令人目盲, 令人耳聾, 令人口爽, 令人心發狂, 令人行妨 : 제12장)”, “단절과 대립, 갈등과 투쟁이 중심이 되는 세상(常有欲, 以觀其徼 : 제1장)”을 비유한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덕스러움德을 따르는 사람은 오직 도道 이것을 일삼는다. (낮은 수준의) 덕德을 일삼지 않는다. 그 덕스러움德은 (일부러) 붙잡음이 없으며, (일부러) 일삼음이 없다. 따라서 덕스러움德이 있는 것이며, “일삼지爲 못함이 없는(제37장)” 것이다. (일부러) 구하지 않는데 얻는 것이며, (일부러) 일삼지 않는데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덕스러움德은 있지만, ‘덕스러움德’이라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덕德은 (일부러) 구해서 그것을 얻고, (일부러) 일삼아서 그것을 이루며, (일부러) 착한 것을 내세워서 백성을 다스린다. 따라서 ‘덕德’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이다. (일부러) 구해서 그것을 얻게 되면, 반드시 잃어버림失이 있게 된다. (일부러) 일삼아서 그것을 이루게 되면, 반드시 망가뜨림敗이 있게 된다. ‘착함’이라는 이름이 생겨나면 ‘착하지 못함’이 일어나게 된다應. 다시 말하면, 낮은 수준의 덕德은 (일부러) 그것을 일삼으며, “有”로써 일삼는 것이다(是以上德之人, 唯道是用. 不德. 其德, 無執, 無用. 故能有德, 無不爲. 不求而得, 不爲而成. 故雖有德, 而無德名也. 下德, 求而得之, 爲而成之, 則立善, 而治物. 故德名有焉. 求而得之, 必有失焉. 爲而成之, 必有敗焉. 善名生, 則有不善應焉. 故下德, 爲之, 而有以爲也).
【해 설】
왕필이 말한 “붙잡음이 없음無執”은 노자가 말한 “팔을 걷어붙이며攘臂, 그것에게로 잡아당김而扔之”이 없음을 의미한다.
왕필주 “無不爲”에서 爲는 ‘일삼는다’는 뜻으로서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의지하거나 행위한다는 의미이다.
왕필주 “立善, 而治物”에서 立은 제도화 내지 형식화를 의미하며, 善은 개인적으로 지향하거나 사회적으로 합의된 욕구나 가치, 목표나 이상 등으로서 인仁, 의義, 예禮 등을 의미한다.
왕필주 “必有失焉”과 “必有敗焉”에서 失과 敗의 대상은 백성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이다.
“無以爲”는 (일부러) 치우치거나徧 (일부러) 일삼는爲 바가 없다는 뜻이다. 무릇, “無爲”하지 못한 채, (일부러) 그것을 일삼는 것은 모두 수준 낮은 덕德이다. “仁”, “義”, 예절禮節이 그것이다. 장차, 덕스러움德을 수준 높은 것과 수준 낮은 것으로 나누고, 수준 낮은 덕德에 비교하여對 말하면擧, 높은 수준의 덕스러움德은 “無以爲”에 이른 것으로서 수준 낮은 덕德의 끝점極이다. 수준 낮은 덕德 중에서 수준이 높은 것을 따지면量, “仁”이 그것이다. “無以爲”에 이르기에 충분하지만, 그래도 (일부러) 그것을 일삼는 (바가 있)다爲. “爲之, 而無以爲”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또는 “有”로써 일삼음)과 (일부러) 그것을 일삼음은 “환란(患 : 제13장)”이 되는 것이다. ‘근본’은 “無爲”에 있으며, ‘어미’는 “無名(제1장)”에 있다. ‘근본’과 ‘어미’를 내버린 채, 그 ‘아들’을 따른다면適, 비록 ‘공功’이 크더라도, 반드시 ‘구제하지 못함’이 있게 된다. 비록 이름이 아름답더라도, ‘거짓됨僞’이 또한 반드시 생겨나게 된다. (일부러) 일삼지 않고서 이루지 못하며, (일부러) 내세우지 않고서不興 다스리지 못한다. 때문에 (일부러) 그것을 일삼게 된다. 따라서 크게 두루 널리 “仁”을 ‘시행함施’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렇게 된다는 사실) 그것을 아끼는愛 사람은 (그렇게 해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아끼는데, 치우치거나 사사로이 하는 바가 없다. 따라서 수준 높은 “仁”을 “爲之, 而無以爲”라고 한 것이다(無以爲者, 無所徧爲也. 凡不能無爲, 而爲之者, 皆下德也. 仁義禮節是也. 將明德之上下, 輒擧下德以對, 上德至於無以爲, 極下德. 下之量上, 仁是也. 足及於無以爲, 而猶爲之焉. 爲之, 而無以爲. 故有爲, 爲之, 患矣. 本在無爲, 母在無名. 棄本捨母, 而適其子, 功雖大焉, 必有不濟. 名雖美焉, 僞亦必生. 不能不爲, 而成, 不興, 而治. 則乃爲之. 故有宏普博施仁. 愛之者, 而愛之, 無所偏私. 故上仁爲之, 而無以爲也).
【해 설】
왕필주 “無所徧爲”에서 徧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의지하거나 행위한다는 뜻으로서 ‘치우침偏’을 의미한다.
왕필주 “上德至於無以爲”와 “足及於無以爲”에서 至와 足及은 ‘가깝다’거나 ‘비슷하다’는 의미이다.
왕필주 “母在無名”에서 無名은 “덕스러움이라는 이름이 없다無德名”는 의미이다.
왕필주 “適其子”에서 子는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또는 “有”로써 일삼음)有爲”과 “(일부러) 그것을 일삼음爲之”을 의미한다.
아끼되, 두루 하지 못하면, ‘바름’과 ‘참됨’을 억누르거나 가로막게 된다. 그것을 당연하거나 합당한 것으로 여겨서,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성내고, 굽히며, 부추기고祐, 다그친다直. 저것을 도와주고, 이것을 공격한다. 사물(things)을 대하거나物 사건(event)을 대하는 데事 있어서, 사사롭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上義爲之, 而有以爲”라고 한 것이다(愛, 不能兼, 則有抑抗正眞. 而義理之者, 忿, 枉, 祐, 直. 助彼, 攻此. 物事, 而有以心爲矣. 故上義爲之, 而有以爲也).
【해 설】
왕필이 말한 “아낌愛”은 노자가 말한 “어짊(仁 : 제5장)”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왕필이 말한 “두루 함兼”은 노자가 말한 “추구처럼 대함(以萬物爲芻狗 : 제5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왕필이 말한 “억누름抑”이나 “가로 막음抗”은 노자가 말한 “(일부러) 그것을 일삼음爲之”이나 “일부러 일삼고자 함(또는 “有”로써 일삼음)而有以爲”을 의미하며, 왕필이 말한 “바름正”과 “참됨眞”은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한다.
왕필주 “義理之”는 앞선 왕필주 “立善, 而治物”과 의미가 통하는데, 義와 理는 立과 治를 의미하며, 之는 善을 의미한다.
왕필주 “忿”, “枉”, “祐”, “直”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의지하거나 행위하는 양태 내지 양식을 의미한다.
왕필주 “助彼, 攻此”에서 彼는 “당연하게 여겨진 것義”이나 “합당하게 받아들여진 것理”으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한 바나 일부러 일삼은 바를 의미하며, 此는 “바른 것正”이나 “참된 것眞”으로서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한다.
왕필주 “有以心爲”는 앞선 왕필주 “偏私”와 의미가 통한다.
곧게 하되, 바르고 참되게篤 하지 못하면, 겉모양飾을 꾸미거나游 겉치레文를 가꾸게修 된다. 그것을 따라야 하거나禮 받들어야 하는敬 것으로 여겨서, (그것을) 가꾸는 것을 높이고, 받드는 것을 좋아하며(또는 반기며), (그것에) 나아가는 것往을 본받게 하고, 벗어나는 것來을 꾸짖는다.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냄과 화냄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上德, 爲之, 而莫之應, 則攘臂, 而扔之”라고 한 것이다(直, 不能篤, 則有游飾修文. 禮敬之者, 尙好修敬, 校責往來. 則不對之間, 忿怒生焉. 故上德, 爲之, 而莫之應, 則攘臂, 而扔之).
【해 설】
왕필주 “直, 不能篤”에서 篤은 ‘바르고 참되게 대한다’는 뜻으로서, “추구처럼 대한다(以萬物爲芻狗 : 제5장)”는 의미이다.
왕필주 “上德, 爲之”에서 德을 “禮”로 풀이했다.
무릇, 큼의 끝極, 오직唯 도道! (만물이) 그것에서 말미암아 이미 나아갔는데, 어찌 (그것을) 높이겠는가? 따라서 비록 활발하게 움직이더라도 크게 넉넉한 것이다. 만물은 오직猶 각자 그 덕스러움德을 얻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물은) 비록 “無”로써 일삼는 것用을 귀하게 여기지만, (따라서) “無”로써 일삼아야 하지만(또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아야 하지만), ‘몸體’을 버리지 못한다. “無”로써 일삼아야 하지만(또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지 않아야 하지만), ‘몸’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 크게 됨을 잃게 된다失. 이른 바, “失道, 而後德”인 것이다(夫, 大之極也, 其唯道乎! 自此已往, 豈足尊哉? 故雖盛業大富. 而有萬物, 猶各得其德. 雖貴以無爲用, 不能捨, 無以爲, 體也. 不能捨, 無以爲, 體, 則失其爲大. 所謂失道, 而後德也).
【해 설】
왕필주 “自此已往”은 “도道의 양면적 속성(二儀之道 : 제4장 왕필주)”에 대한 부연이다. 此는 도道를 지시한다. 따라서 自此는 도道가 만물을 나게 하고 자라게 하며 시들게 하는 근원임을 의미한다. 已往은 도道가 만물이 나고 자라며 시드는 과정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함께 함을 의미하는 동시에, 만물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로서, 다시 말하면 덕스러움德으로서 만물 속에 내재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왕필은 “豈足尊哉?”라고 반문한 것이다.
왕필이 말한 “盛業大富”에서 盛業은 “그 날카로움은 꺾지만, 그 얽힘은 풀고, 그 빛남과 어울리지만, 그 티끌과 함께 하며(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 제4장)”, 만물에 “두루 미치고(周行 : 제25장)”, 만물을 “살게 하며, 공功을 이루게 하고, 입혀주고, 먹여주는(生, 功成, 衣養萬物 : 제34장)” 것과 같은 도道의 운동모습 내지 작용상태를 의미하며, 大富는 “힘들어 하지 않는다(用之不勤 : 제6장)”는 의미이다.
왕필주 “有萬物猶各得其德”로 미루어 볼 때, 왕필이 말한 덕스러움德은 만물 각자 속에 내재하는 나고 자라며 시드는 원리로서, 만물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이다.
왕필주 “不能捨無以爲體”에서 體는 “有”로써 일삼음有爲 내지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있음 有以爲”을 비유하는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른 감각(또는 감각하고자 함), 지각(또는 지각하고자 함), 의지(또는 의지하고자 함), 행위(또는 행위하고자 함)를 의미한다.
왕필주 “失其爲大”는 큼의 끝인 도道처럼 크게 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無”로써 일삼으면用, 그 ‘어미’를 얻게 된다德. 따라서 자신이 수고롭지 않게 되는 것이며, 백성物이 다스려지지 않음이 없게 되는 것이다. 낮은 수준의 덕下은 (도道) 이것에서 (말미암아) 이미 나아갔지만, 일삼음의 ‘어미’를 잃어버렸다. (따라서 다스림에 있어서) “無爲”하지 못한 채, (일부러 일삼아爲之而無以爲) 널리 시행함施을 귀하게 여긴다(仁). (“無爲”와 “無以爲”로써) 널리 시행하지 못한 채, (일부러 일삼은爲之而有以爲) ‘바름’과 ‘곧음’을 귀하게 여긴다(義). (“無爲”와 “無以爲”로써) 바르게 하거나 곧게 하지 못한 채, (일부러 일삼은爲之而莫之應則攘臂而扔之) 겉모양이나 받듦敬을 귀하게 여긴다(禮). 이른 바, “失德, 而後仁. 失仁, 而後義. 失義, 而後禮”인 것이다(以無爲用, 德其母. 故能己不勞焉, 而物無不理. 下, 此已往, 失用之母. 不能無爲, 而貴博施. 不能博施, 而貴正直. 不能正直, 而貴飾敬. 所謂, 失德, 而後仁. 失仁, 而後義. 失義, 而後禮也).
【해 설】
왕필주 “德其母”에서 德을 “얻는다得”는 뜻으로 풀이했다. 母는 도道를 의미한다.
왕필주 “能己不勞焉”에서 己는 통치자를 의미한다.
무릇, “禮”는 (도道 또는 덕스러움德의) “충실함”과 “진실함”이 두텁지 못하고, 어울림通과 소박함(簡; 素樸 : 제19장)이 드러나지 못한 채, (일부러 일삼아) 겉모양表을 꾸짖거나 갖추게 하고, (따르지 않거나 벗어날) 기미機微가 있으면 다투거나 제재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바이자, “근원”이 되는 바이다. 무릇, “仁”과 “義”는 본성內에서 비롯되는發 것이지만, 그것을 (일부러) 일삼기 때문에, 거짓되게 된다. 하물며, 겉모양 꾸미기에 힘쓰는데, 오래 갈 수 있겠는가! 따라서 “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라고 한 것이다(夫, 禮也, 所始首, 於忠信不篤, 通簡不陽, 責備於表, 機微爭制. 夫, 仁義, 發於內, 爲之, 猶僞. 況務外飾, 而可久乎! 故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也).
【해 설】
노자가 말한 “忠信”은 도道 또는 도道의 운동모습 내지 작용상태인 덕스러움德을 대상으로 삼는다면, 왕필이 말한 “通簡”은 만물 각자 속에 내재하는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으로서, 만물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왕필이 말한 “양면적 도道의 속성”을 감안할 때, 양자兩者가 본질적으로 상이相異한 것은 아니다.
왕필주 “機微爭制”에서 機微는 “校責往來”에서 來와 의미가 통한다.
왕필주 “仁義發於內, 爲之猶僞”에서 內는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하며, 爲之는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서 “벗어난 채來”, 일부러 그것을 일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왕필에게 있어서 도道 또는 덕스러움德의 가장 원초적 작용모습 내지 작용상태이자, 인간의 가장 기본적 정서로서, “仁”, “義”, “禮”는 부정되지 않는다. 일부러 “그것을 일삼거나爲之”, 그것을 “일부러 일삼고자 함有以爲”으로써, 그것이 “거짓되게 됨僞”이 비판될 따름이다.
왕필주 “可久乎!”에서 久는 “忠信”을 대상으로 삼는다.
“前識”은 백성으로 하여금 (일부러 일삼아) 앞서게 하거나,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게 한다分別는 뜻이다. 바로, 낮은 수준의 덕德을 따르는 부류(가 다스리는 방식)이다. 그 총명聰明을 사용함으로써 백성을 앞서게 하거나 나누고 가르며, 그 지력智力을 사용함으로써 많은 일들을 일삼는다營.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통치자가) 비록 그 (백성의) 실정情을 얻는다德 하더라도 (그 백성의) 간사함과 교묘함이 더욱 치밀해지게 된다. 비록 그 (백성의) 칭송譽이 자자하다 하더라도 (그 백성의) 돈독함과 신실함을 더욱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비록) 노력하더라도 일들이 어지러워지게 되며, (비록) 힘쓰더라도 다스림이 어려워지게 된다. 비록 성스러움과 지혜로움을 사용하더라도 백성이 더욱 해롭게 된다. (그러나) ‘자신己’을 내버려 둔舍 채 백성을 따르면, (일부러) 일삼음이 없더라도 넉넉해진다. “素樸(제19장)”을 유지하면, (일부러 일삼은) 법령과 제도를 사용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낮은 수준의 덕德을 따르는 부류가) 얻으려고 하는 바인 “저것”에 귀 기울이며聽, 유지해야할 바인 “이것”을 멀리하는棄 일은 도道의 껍데기를 아는 것으로서, 어리석음의 근원이다(前識者, 前人而識也. 卽下德倫也. 竭其聰明, 以爲前識, 役其智力, 以營庶事. 雖德其情, 姦巧彌密. 雖豊其譽, 愈喪篤實. 勞而事昏, 務而治薉. 雖竭聖智, 而民愈害. 舍己任物, 則無爲而泰. 守夫素樸, 則不順典制. 聽彼所獲, 棄此所守, 識道之華, 而愚之首).
【해 설】
왕필주 “前人而識”에서 前은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으로서 앞서게 한다는 의미이며, 識은 ‘식별한다’는 뜻으로서 분별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前과 識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감각하거나(또는 감각하고자 하거나) 지각하거나(또는 지각하고자 하거나) 의지하거나(또는 의지하고자 하거나) 행위하는(또는 행위하고자 하는) 모습 내지 상태로서, “팔을 걷어붙이며攘臂, 잡아당기는而扔之” 모습 내지 상태에 비유될 수 있다.
왕필이 말한 “聰明”은 영리하고 기억력이 좋으며 재주가 있음을 의미하며, “智力”은 사리事理를 밝혀서 잘 처리하고 헤아리는 능력을 의미한다.
왕필주 “雖德其情”에서 德은 “얻음得”을 의미하며, 情은 통치자가 일삼는 내용을 따르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통치자가 일삼는 방식을 좋아하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등에 대한 모습 내지 상태를 의미한다.
왕필주 “舍己任物”에서 舍는 내버려 둠捨을 의미하고, 己는 나누거나 가름 내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음을 의미하며, 任은 “따름”(法 : 제25장)을 의미하고, 物은 백성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한다.
왕필이 말한 “篤實”은 통치자의 다스림의 내용과 방식 등에 대한 백성의 “신뢰(信 : 제17장)”를 대상으로 삼는다.
왕필주 “無爲而泰”에서 泰는 “事”·“昏”과 “治”·“薉”에 대한 부정상태이다.
따라서 (통치자가) 진실로 그 (다스림이) 공功이 되게 하는 어미를 얻게 되면, 백성이 살아가는 것作에 대해서 말하지 않게 된다. 백성을 살아가게 하는 것存에 대해서 수고로워 하지 않게 된다. 일삼지만用, (그) 모양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다스리지만御, (그) 이름을 붙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반대로) “仁”과 “義”의 이름이 높여질 수 있는 것이며可顯, 따름禮과 받듦敬의 이름이 귀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可彭. 무릇, (통치자가) 그것을 “실음(載 : 제10장)”에 있어서 큰 도道로써 하며, 그것을 “막음(鎭 : 제37장)”에 있어서 “무명(無名 : 제37장)”으로써 하게 되면, 백성이 (일부러 일삼아) “높이 받드는(尙 : 제3장)” 바가 없게 되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營 바가 없게 된다. (따라서 백성으로 하여금) 그 곧고 바른 바貞를 저마다 따르게 하고, 그 바르고 참된 바誠를 섬기게 하며事, 일삼게 하면, “仁”이 두터움을 “얻게 되고德”, “義”를 실천함이 바르게 되며, “따르고” 받듦이 맑아지게 된다(故苟得其爲功之母, 則萬物作焉, 而不辭也. 萬物存焉, 而不勞也. 用, 不以形. 御, 不以名. 故名仁義可顯, 禮敬可彭也. 夫載之以大道, 鎭之以無名, 則物無所尙, 志無所營. 各任其貞, 事用其誠, 則仁德厚焉, 行義正焉, 禮敬淸焉).
【해 설】
왕필주 “爲功之母”에서 功은 “다스림(治 : 제3장)”을 의미하며, 母는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을 “따르는(法 : 제25장)” 것으로서, 백성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맡김任”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爲功之母는 “무위(無爲 : 제37장)”를 의미하는 것이다.
왕필이 말한 “作”과 “存”은 삶의 양태 내지 양식을 의미하는데, 나고, 자라며, 죽거나 운동하고, 작용하며, 활동하는 모습 내지 상태를 포괄한다.
왕필주 “不辭”는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나누거나 가리지 않음(不自見 : 제22장)”을 의미한다.
왕필이 말한 것처럼 “不勞”할 수 있는 것은 백성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맡기기 때문이다.
왕필주 “用不以形”에서 形은 “형벌제도典”를 의미하며, “御不以名”에서 名은 “명분질서制”를 의미한다.
왕필주 “名仁義可顯, 禮敬可彭”에서 顯과 彭은 일부러 일삼아 “꾸짖거나責” “갖추게 한다備”는 의미이다.
왕필주 “載之以大道, 鎭之以無名”에서 載는 “흥하게 한다(興 : 제36장)”는 뜻으로서, “부추김祐”이나 “다그침直”, “도와줌助”을 의미하고, 鎭은 “폐하게 한다(廢 : 제36장)”는 뜻으로서, “억누름抑”이나 “가로막음抗”, “공격함攻”을 의미하며, 之는 仁, 義 禮, 敬을 의미하고, 無名은 “소박함(素樸 : 제19장)”이나 “통나무”(樸 : 제37장)로서 백성 각자에 내재하는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한다.
왕필주 “物無所尙, 志無所營”에서 尙과 營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감각하거나(또는 일부러 일삼아 감각하고자 하거나), 지각하거나(또는 일부러 일삼아 지각하고자 하거나), 의지하거나(또는 일부러 일삼아 의지하고자 하거나), 행위하는(또는 일부러 일삼아 행위하고자 하는) 것을 전제로 삼는다.
왕필주 “各任其貞, 事用其誠, 則仁德厚焉, 行義正焉, 禮敬淸焉”에서 其貞과 其誠은 백성 각자에 내재하는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하며, 厚, 正, 淸은 “무위(無爲 : 제37장)”의 모습 내지 상태를 의미한다.
(통치자가) 그 실어주는 바를 멀리하고棄, 그 생겨나게 하는 바를 내버려 둔舍 채, 그 법령成과 제도形를 일삼고, 그 총명함을 사용하면役, (백성의 일부러 일삼은) “仁”이 바르고 참되어지며誠, (백성의 일부러 일삼은) “義”가 겨루어지고競, (백성의 일부러 일삼은) “禮”가 다투어진다爭. “仁”의 덕스러움德이 두터워지는 것은 “仁”의 (일부러) 일삼음으로써 달성되는能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義”의 실천이 바르게 되는 것은 “義”의 (일부러) 일삼음으로써 성취되는成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禮”의 받듦敬이 맑아지는 것은 “禮”의 일삼음으로써 실현되는濟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그것을 싣는 데 있어서 ‘도道’로써 해야 하며, 그것을 거느리는 데統 있어서 ‘어미’로써 해야 한다. (통치자가) 그것을 따르게 하더라도顯 (백성이) 높이는尙 바가 없게 되며, (통치자가) 그것을 받들게 하더라도彭 (백성이) 겨루는 바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무릇 이름할 수 없음無名을 일삼아야 한다. (나라의) 법령名이 바르고 참되어지기篤 때문이다. (통치자는) 무릇 모양 없음無形을 일삼아야 한다. (나라의) 제도形가 성취되기成 때문이다. (통치자가) ‘어미’를 지키면서 그 ‘아들’을 따르며存, ‘근본’을 받들면서崇 그 ‘말단’을 높인다면擧, (나라에) 제도形와 법령名이 함께 하게 되며俱有, (다스림에) 잘못邪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크게 아름다운 것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는) 하늘과 짝하며, (크게) 빛나는 것華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지作 않는다. 따라서 ‘어미’는 멀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근본’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仁”과 “義”는 ‘어미’에 의해서 생겨난 바이지, ‘어미’(의 덕스러움德 자체)가 될 수 없다. 形과 器는 ‘장인匠’에 의해서 이루어진 바이지, ‘장인’(의 재능 자체가) 될 수 없다. 그 ‘어미’를 내버린捨 채 그 ‘아들’을 일삼으며, 그 ‘근본’을 멀리한 채 그 ‘말단’을 따르면適, 법령에 분별됨分이 생겨나며有, 제도에 어긋남止이 생겨나게 된다. 비록 그 큼을 다한다極고 하더라도 반드시 두루 하지 못함이 생겨나게 된다. 비록 그 아름다움을 담아낸다(또는 이룬다)盛 하더라도 반드시 근심거리와 걱정거리가 생겨나게 된다. 공功이 그것을 일삼음爲에 있는데, 어찌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따름處”에 만족하겠는가? (棄其所載, 舍其所生, 用其成形, 役其聰明, 仁則誠焉, 義其競焉, 禮其爭焉. 故仁德之厚, 非用仁之所能也. 行義之正, 非用義之所成也. 禮敬之淸, 非用禮之所濟也. 載之以道, 統之以母. 故顯之而無所尙, 彭之而無所競. 用夫無名. 故名以篤焉. 用夫無形. 故形以成焉. 守母以存其子, 崇本以擧其末, 則形名俱有, 而邪不生. 大美配天, 而華不作. 故母不可遠, 本不可失. 仁義, 母之所生, 非可以爲母. 形器, 匠之所成, 非可以爲匠也. 捨其母而用其子, 棄其本而適其末, 名則有所分, 形則有所止. 雖極其大, 必有不周. 雖盛其美, 必有患憂. 功在爲之, 豈足處也?).
【해 설】
왕필주 “舍其所生”에서 生은 ‘살아감’을 의미하는데, “萬物存焉”에서 存과 의미가 통한다.
왕필주 “用其成形”에서 成形은 “守夫素樸, 則不順典制”에서 典制와 의미가 통한다.
왕필주 “仁則誠焉, 義其競焉, 禮其爭焉”에서 誠, 競, 爭은 백성들이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라서 그렇게 하고자 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일삼아 그렇게 하고자 하거나 그렇게 하는 함으로써 “높이 받들어 지거나(尙 : 제3장)” “귀하게 여겨지기(貴 : 제3장)” 위해서 그렇게 하고자 하거나 그렇게 하는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감각하거나(또는 감각하고자 하거나), 지각하거나(또는 지각하고자 하거나), 의지하거나(또는 의지하고자 하거나), 행위하는(또는 행위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誠, 競, 爭은 “무위(無爲 : 제37장)”에 대한 부정적 모습 내지 상태를 전제한 표현으로서, 반의적反意的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왕필주 “仁德之厚, 非用仁之所能也. 行義之正, 非用義之所成也. 禮敬之淸, 非用禮之所濟”에서 그 “덕스러움이 두터운” 仁, 그 “실천이 바른” 義, 그 “받듦이 맑은” 禮는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하고, 用은 통치자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백성이 감각하거나 지각하거나 의지하거나 행위하도록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것을 의미하며, 厚, 正, 淸은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르는 것을 의미하고, 能, 成, 濟는 통치자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은 것을 의미한다.
왕필주 “載之以道, 統之以母”에서 載와 統은 用을 의미하고, 之는 그 “덕스러움이 두터운 인仁德之厚”, 그 “실천이 바른 의行義之正”, 그 “받듦이 맑은 예禮敬之淸”로서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을 의미하며, 道와 母는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한다.
왕필주 “顯之而無所尙, 彭之而無所競”에서 顯과 彭은 用을 의미하고, 之는 통치자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은 仁, 義, 禮로서, 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 “충실함과 진실함이 얇아진 것忠信之薄”이자, 그 “껍데기華”에 해당하며, 無所尙과 無所競은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不貴 : 제3장)”, 그것을 “일삼고자 하지(可欲 : 제3장)” 않으며, 그것으로 인하여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心不亂 : 제3장)”는 의미이다.
왕필주 “用夫無名. 故名以篤焉. 用夫無形. 故形以成焉”에서 無名과 無形은 도道 내지 덕스러움德,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를 의미하고, 名은 典, 制, 形과 의미가 통한다.
왕필주 “形名俱有”에서 俱有는 ‘지켜진다’ 또는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왕필주 “大美配天, 而華不作”에서 配天과 不作은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제5장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와 의미가 통한다.
“仁義, 母之所生, 非可以爲母. 形器, 匠之所成, 非可以爲匠也”에서 왕필은 보다 원인적이냐 또는 보다 결과적이냐, 보다 근본적이냐 혹은 보다 말단적이냐 차원에서 仁義와 母, 形器와 匠을 상대적으로 ‘구별區別’한 것이지, 양분적兩分的 내지 이분적二分的 차원에서 절대적으로 ‘차별差別’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非 또는 非可는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제1장)”, “大道廢, 有仁義(제18장)”, “낮은 수준의 덕德과 다름不德”과 “낮은 수준의 덕德을 버리지 않음不失德”, 덕스러움德이 “두터운 상태厚”와 덕스러움德이 “얇아진 상태薄” 등과 같은 ‘상관相關’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왕필주 “名則有所分, 形則有所止”에서 分은 백성이 “그것을 피해갈 방법을 찾는 것(下知避之 : 제17장 왕필주)”을 의미하며, 止는 백성이 “그것에 따르지 않는 것(其令不從 : 제17장 왕필주)”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分과 止는 통치자, 법령, 질서 등을 백성이 “업신여기는(侮之 : 제17장)” 것으로서, 백성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대한 통치자의 “믿음이 부족하거나(信不足焉 : 제17장)” 통치자, 법령, 질서 등에 대한 백성의 “믿지 못함(有不信焉 : 제17장)”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현상인 것이다.
왕필주 “雖極其大, 必有不周. 雖盛其美, 必有患憂”에서 大와 盛은 선치善治 내지 선정善政을 의미하며, 不周와 患憂는 착오 내지 오류가 있는 모습 내지 상태를 의미한다.
왕필주 “功在爲之, 豈足處也?”에서 之는 ‘그 실어주는 바其所載’, ‘그 생겨나게 하는 바其所生’, ‘도道’, ‘어미母’, ‘이름할 수 없음無名’, ‘모양 없음無形’, ‘근본本’ 등을 의미하고, 處는 ‘그 법령과 제도其成形’, ‘그 총명함其聰明’, ‘제도形’, ‘법령名’, ‘아들子’, ‘말단末’을 지시하며, 爲는 ‘지킴守’, ‘받듦崇’, “따름處” 등을 의미하고, 功은 爲의 결과로서 ‘법령이 바르고 참되어지거나名以篤’, ‘제도가 성취되거나形以成’, ‘제도와 법령이 함께 하게 되는 것形名俱有’ 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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