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왕필산책 : 도덕경 제42장 왕필주 "도는 하나와 함께 살고, 하나는 둘과 함께 살며, 둘은 셋과 함께 살고, 셋은 만물과 함께 산다" 본문
왕필산책 : 도덕경 제42장 왕필주 "도는 하나와 함께 살고, 하나는 둘과 함께 살며, 둘은 셋과 함께 살고, 셋은 만물과 함께 산다"
독립출판 무간 2017. 12. 17. 12:42제 42 장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 이생삼二生三, 삼생만물三生萬物. 만물부음이포양萬物負陰而抱陽, 충기이위화冲氣以爲和. 인지소오人之所惡, 유고과불곡唯孤寡不穀, 이왕공이위칭而王公以爲稱. 고물혹손지이익故物或損之而益, 혹익지이손或益之而損.
인지소교人之所敎, 아역교지我亦敎之.
강량자强梁者, 부득기사不得其死. 오장이위교부吾將以爲敎父.
도道는 하나一와 함께 살고, 하나一는 둘과 함께 살며, 둘은 셋과 함께 살고, 셋은 만물과 함께 산다. 만물은 음陰을 짊어지고 양陽을 품으며, 하나로 섞여서 어울린다. 사람들은 오직 ‘고아와 같은 것’, ‘덕스러움德이 부족한 것’,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임금王과 귀족公은 그것을 이름으로 삼는다. 만물은 덜어내려고 하지만 보태지고, 보태려고 하지만 덜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 또한 가르친다.
‘강하고 굳센 것은 제 명命에 죽지 못한다.’ 나는 장차 이것을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冲氣以爲和.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 故物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각양각색萬의 ‘사물物’과 ‘사건形’이 되돌아가는 곳은 “하나一”이다. 어디에서 말미암아 “하나一”에 다다르게 되는가?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말미암아서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말미암는 일이 바로乃 “하나一”(에 다다르는 일)이다. (따라서) “하나一”를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라 일컬을 수 있다. (그러나 노자가) 이미 그것을 “하나一”라 일컬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그것을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이라 (다르게) 일컫겠는가? (萬物萬形, 其歸一也. 何由致一? 由於無也, 由無乃一. 一可謂無. 已謂之一. 豈得無言乎?)
【해 설】
노자가 말한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에서 生은 생김·자람·시듦이나 운동·작용·활동이나 감각·지각·의지·행위를 포괄하는 동시에, “道”와 “一”, “一”과 “二”, “二”와 “三”, “三”과 “萬物”이 생김·자람·시듦이나 운동·작용·활동이나 감각·지각·의지·행위에 있어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고 어울리며(同通 : 제40장 왕필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거나 받는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함축한다.
왕필주 “萬物萬形, 其歸一也”는 제16장 “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과 의미가 통하고, 物과 形은 제1장 왕필주 “指事造形”에서 事(event)이나 形(things)과 의미가 통하며, 歸는 “何由致一”에서 致와 의미가 통한다.
왕필에 따르면, “하나一”는 “도道가 움직이는 상태 내지 일삼는 모습(道之動, 道之用 : 제40장)”으로서, 움직이거나 일삼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無”을 의미하고, “부드러움이나 연약함(柔弱 : 제40장 왕필주)”을 의미하며, 만물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름(法 : 제25장)”을 의미하고,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감각하거나(또는 감각하고자 하거나), 지각하거나(또는 지각하고자 하거나), 의지하거나(또는 의지하고자 하거나), 행위하지(또는 행위하고자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一”에서) ‘하나一’라는 말言이 생겨나고, (그것이 생겨나게 된) “하나一”가 있으므로, ‘둘’이 아닌가? (‘하나一’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하나一”가 있고, (그 “하나一”와 ‘하나一’라는 말에서 새롭게 생겨나게 된) ‘둘’(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셋’이 생겨난다. 마찬가지 방식에서乎斯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과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있음’이 시작되고數 끝나게盡 된다從. 이것에서 벗어난 설명은 올바른 설명이 아니다(有言, 有一, 非二如何? 有一, 有二, 遂生於三. 從無之有數盡乎斯. 過此以往, 非道之流).
【해 설】
왕필주 “有言, 有一, 非二如何? 有一, 有二, 遂生於三”은 “높음은 낮음으로써 토대를 삼는다거나 귀함은 천함으로써 바탕을 삼는다”(高以下爲基, 貴以賤爲本 : 제39장), “(일삼음이) ‘있음’은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으로써 일삼는다(有, 以無爲用 : 제39장 왕필주)”는 의미인데, “하나一”와 ‘하나一’라는 말言, “하나一”와 “둘二”과 “셋三”이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고, 어울리며(同通 : 제40장 왕필주)”,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거나 받는 ‘관계’ 속에 놓여 있음을 비유한다.
왕필주 “從無之有數盡乎斯”의 풀이는 “一, 數之始, 而物之極也(제39장 왕필주)”를 참조했다.
따라서 “나吾”는 만물이 살아가게 되는 그 근원主을 안다는 것이다. 비록 (사물物이 각양萬이고) 사건形이 각색萬이더라도 (그 근원을 따져보면) “충기沖氣”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마다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고,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지만, “하나一”를 얻은 사람이 임금이 되고, 제후가 되며, 근본이 되는主 것이다. (따라서) 어찌 “하나一”를 마음 밖에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故萬物之生, 吾知其主. 雖有萬形, 沖氣一焉. 百姓有心, 異國殊風, 而得一者, 王候主焉. 一何可舍?)
【해 설】
왕필주 “沖氣一焉”에서 沖은 텅 비어 있는 상태 내지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無”을 의미하며, 氣는 기질氣質, 기풍氣風, 습성習性,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서, “도道의 움직임 내지 일삼음(道之動, 道之用 : 제40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沖氣는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는’ ‘도道의 움직임 내지 일삼음’을 의미한다.
왕필주 “百姓有心, 異國殊風”은 사람마다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등이 다르며, 나라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왕필주 “一何可舍?”에서 舍는 마음 밖에 ‘내버려 둔다’는 뜻으로서 “마음속에 품거나(居 : 제39장 왕필주)” “따르지”(法 : 제25장) 않는다는 의미이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많을수록 더욱더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도道에서) 멀어지게 된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를) 덜어낼수록 그것에 가까워지게 된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 그것을 지극히至 끝까지盡 덜어내면 이내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어진) 그 끝점極을 얻게 된다. (노자가) 이미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어진 그 끝점) 그것을 “하나一”라고 일컬었는데, 오히려猶 이내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많아지거나 덜어내기 이전의 본래의 “하나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많아진 “하나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어진 “하나一”, 이렇게) “셋三”이 되었다之.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많아진 “하나一”와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어진 “하나一”는) 본래本의 “하나一”가 아닌데不, 어찌況 도道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人之所惡, 唯孤寡不穀, 而王公以爲稱”하는 이유가) “損之而益”(때문이라는 말)이 어찌豈 빈 말이겠는가? (愈多愈遠. 損則近之. 損之至盡, 乃得其極. 旣謂之一, 猶乃之三. 況本不一而道可近乎? 損之而益, 豈虛言也?).
【해 설】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어떻게 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많아지게” 되는가. 무엇 때문에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가 “많아지게” 되는가. 무엇이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바를 “많아지게” 만드는가. 왕필의 표현을 빌리면, 만물 또는 세계가 ““하나一”를 얻음으로써 이루어진 다음에 그것을 내버려 둠으로써 그 어미를 잃어버리기(物皆各, 得此一以成. 旣成而舍以居成. 居成則失其母 : 제39장 왕필주)” 때문이다. 이 때, “내버려 둔다舍”는 것은 ‘마음속에 품거나’ “따르지”(法 : 제25장) 않는다는 의미이며, “어미”는 “하나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만물 또는 세계가 자기 원인적 내지 자기 충족적으로 관계하거나 변화하는 데 있어서 ‘각자’가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각자가 모여 이룬 무리로서 ‘모두’가 합의하는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라서 감각하거나(또는 감각하고자 하거나), 지각하거나(또는 지각하고자 하거나), 의지하거나(또는 의지하고자 하거나), 행위하기(또는 행위하고자 하기) 때문인 것이다.
人之所敎, 我亦敎之.
“나 또한 그것을 가르친다我之”는 말은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강제하거나强 강요하지使 않는다는 뜻이다. (“나我”는) 무릇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를 일삼는다用. 그 지극한 이치至理를 받든다擧. 그것을 따르면 반드시 길吉하게 되지만, 그것을 거스르면 반드시 흉凶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서로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스스로 그 흉함을 취하는 일이다.” 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 또한 같다. “그것을 거스르지 말라.”(我之, 非强使人從之也. 用夫自然. 擧其至理. 順之必吉, 違之必凶. 故人相敎. 違之, 自取其凶也. 亦如我之敎人. 勿違之也).
【해 설】
왕필주 “非强使人從之也”에서 之는 “하나一”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을 의미한다.
왕필주 “用夫自然. 擧其至理”에서 用은 擧과 의미가 통하며, 自然은 至理와 의미가 통하는데, 생기고 자라며 시들거나, 운동하고 작용하며 활동하거나, 감각하고 지각하며 의지하고 행위하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말미암아서” 그 “하나一”에 다다른다는 뜻으로서, 만물 또는 세계의 저절로 그러한 관계적·변화적·자기 원인적 내지 자기 충족적인 본성이나 본성의 명령에 따른다는 의미이다.
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일부러 일삼아서) 강해지거나 굳세어지면 반드시 제 명命에 죽지 못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서로 가르치는 것인데, “(일부러 일삼아서) 강해지거나 굳세어지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必.” 내가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도 같은데, “(일부러 일삼아서) 강해지거나 굳세어지는 일은 적절하지 못하다不當.” (“나吾”나 “사람들人” 모두, 일부러 일삼아서) 강해지거나 굳세어지면 제 명命에 죽지 못함을 받듦으로써 강해지거나 굳세어지는 일이 올바르지 못함邪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가르치는 것을 따르면 반드시 길吉하다”고 가르치는云 것과 같다. 가르침의 거스름에 따른 결과로써徒得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强梁, 則必不得其死. 人相敎, 爲强梁, 則必. 如我之敎人, 不當, 爲强梁者也. 擧其强梁不得其死以敎邪. 若云, 順吾敎之, 必吉也. 故得其違敎之徒, 適可以爲敎父也).
【해 설】
왕필이 말한 “得其違敎之徒, 適可以爲敎父”는 “잘 하는 사람은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의 스승이 되며,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잘 하는 사람의 거울이 된다(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 : 제27장)”는 노자의 말과 의미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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