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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없이 비워버린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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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없이 비워버린다!

독립출판 무간 2016. 10. 6. 14:38

연꽃이 만발한 여름날, 전주 덕진공원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도심 한복판에 그렇게 큰 연못이, 연못이라기보다는 호수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넓은 곳에 연분홍 연꽃이 만발해 혹시 이 지상에서 극락세계를 볼 수 있다면, 연꽃의 바다,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마침 가는 여름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손에 우산을 들고, 보다 가까이 연꽃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연화교 위를 걸었습니다. 대궁이 짧은 꽃봉오리는 연잎 밑에 숨어서 부끄러운 듯 꽃을 피우고 있었고, 대궁이 긴 꽃봉오리는 우뚝 솟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연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새벽부터 내뿜기 시작한 연꽃 향기에 취해 골치 아픈 세상사를 한순간에 잊어버렸습니다. 연잎마다 소복소복 담겨 있는 빗방울은 마치 보석 같았습니다. 어떠한 보석도 '빗방울 보석'이 지닌 신비한 아름다움에는 견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빗방울은 연잎에 내려앉자마자 자기 몸을 잘디잘게 쪼개어 또르르 연잎 속으로 굴러갔습니다. 그러다가 연잎이 몸을 기울여 모인 빗방울들을 쪼르르 아래로 흘려보내면 빗방울들은 미련없이 연잎을 떠나버렸습니다.

문득 법정 스님 쓰신 글에 밑줄을 그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법정 스님께서는 일찍이 덕진공원 연잎들이 빗방울을 아래로 쏟아버리는 것을 보고,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미련 없이 비워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구절 밑에 정성들여 밑줄을 그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가질 줄만 알았지 비울 줄은 몰랐습니다. 오직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해왔을 뿐입니다. 너무 없다고 더 갖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는 있지만, 이미 가진 것을 버리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연꽃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영혼과 육체를 무겁게 짓누르는 물방울을 가볍게 비워버렸습니다.

감당할 수 있을만큼만 가져라!

보면 볼수록 연꽃은 저에게 그렇게 속삭였습니다.

연잎은 빗방울을 비웠다고 해서 한꺼번에 완전히 다 비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두 방울 정도는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게 얼마만큼 지녀야 제대로 지니는 것인지를 구체적을 제시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비록 빗방울은 버리지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다 버리더라도 자기 자신만은 버려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정호승,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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