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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 안심, 공포라는 산의 정상에 안심은 없다! 2 본문

세상 이야기

공포 - 안심, 공포라는 산의 정상에 안심은 없다! 2

독립출판 무간 2016. 8. 12. 08:05

원자력 발전 시설이 손상된 것을 은폐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많은 원자력 발전이 중단됐다. 그러자 전력 회사들은 여름철 대정전 사태의 발생을 예고하고 공포를 확산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원자력 발전의 운전 재개와 더 많은 원자력 발전 건설을 위한 홍보를 펼쳤다. 마치 원자력 발전의 존재 자체가 최대의 위험이며, 불안의 원천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얼굴로 말이다.

 

그런가 하면 테러와 '북한'이라는 공포도 만연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미/일 동맹을 군사적으로 강화해야만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것은 무력행사에 대항하는 또다른 무력행사의 명분이 된다. 애당초 어떠한 군대든 '유사시'라는 공포가 그 존재 이유가 된다. 이처럼 공포에 맞서기 위해 언제나 상대를 향한 더 커다란 공포를 준비한다. 군비 확장 경쟁의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그것만이 안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결국 군대의 존재는 상대국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자국민에 대해서도 최대의 위협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단 공포에 휩싸인 이들의 논의에는 어째서 자신들이 그러한 공포에 휘말려 들었는지, 그 공포의 근원이 된 위험에 어떻게 직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색은 없다. 그럴 경황이 없는 것이다. 이처럼 경황조차 없는 긴박함과 절박함을 갖추어야만 그것이 바로 공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포에 휘말려 들게 된 자신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사색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포란 자신들의 미약한 생각이나 힘 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에 공포라고 믿는 것이다. 공포의 기원은 대단히 애매하여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신화이다.

 

어찌 보면 현대사회가 바로 공포의 체제인 듯하다. 거기서는 돈으로 안심을 사들이고, 경쟁에서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일종의 '의자 빼앗기' 게임과도 비슷해서 '더 많이, 더 빨리'라고 외치며 늘 앞으로 고꾸라질 듯한 아슬아슬한 자세로 영원히 얻을 수 없는 안심을 뒤쫓고 있다. 그것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슬로다운'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공포의 연쇄로부터 걸어 나오는 일이다. 이 공포 시스템에서 플러그를 빼는 일이다. 공포라는 가파른 오르막 산을 내려와 거기로부터 몸을 돌리는 일이다. 힘들게 오른 산 너머에 안심이 기다리고 있을 리 없으므로. 그렇다면 안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찬찬히 살펴보면 안심의 씨앗은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공포 시스템은 우리에게 온갖 믿음을 강요해 왔다. 공포만이 성장을, 진보를, 발전을 가능케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식물의 씨앗을 한번 들여다 보자. 그 곳에는 공포한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 없이도 성장하고 성숙하며, 곡물이나 야채로 자라나 우리들 생명을 키워준다. 그것은 이른바 안심의 씨앗이다. 안심이 씨앗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키워내는 농사라는 인간의 행위 안에도 존재한다. 어로나 채집 같은 행위 안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생업을 지속 가능한 것으로 계속 유지해 나가는 지역의 생태계 안에도 존재한다. 또한 그러한 생태계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역 공동체 안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 곳에서 자라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천천히 이어져 온 삶의 지혜와 기술이 존재한다. 안심은 그러한 대부분의 지역을 포함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 공동체 속에 존재한다.

 

전통사회는 물질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안심은 풍족했다. 그 곳에서는 문화가 곧 안심의 시스템이었다. 근대사회는 이러한 안심으로부터 사라들을 떼어 놓고, 자유와 물질적인 풍요로움만을 추구하도록 부추겼으며, 그 너머에 도달해야만 안심이 있는 것처럼 믿게 했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얻었지만 도저히 얻지 못한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안심이다. 슬로 라이프란 바로 이러한 안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시다 에리코의 시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단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 걷는 속도로

걸어서 가면 된단다.

-기시다 에리코, <남쪽의 그림책> 중에서

 

그렇다. 씨앗이 자라나는 속도를 넘어선 곳에는 공포만 있을 뿐, 안심은 있을 수 없다.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는 또다른 삶,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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