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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달력, 자연의 시간에 인간의 삶을 순응시키자!

독립출판 무간 2016. 8. 11. 22:20

하이다구와이는 캐나다 서쪽 해안의 북위 52도에서 54도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뻗은 쐐기 모양의 군도를 일컫는다. 영어명은 퀸 셜롯 제도다. 난류로 인해 위도에 비해 기후가 온난하며, 풍부한 비는 전나무, 삼나무 등의 거목으로 이루어진 온대 우림을 만들었다. 원주민인 하이다족은 이 숲과 더불어 자연의 풍요로운 혜택인 바다를 무대 삼아 수천 년 전부터 독자적인 문화와 사회를 이뤄왔다. 구자우는 현대 하이다족의 대표적인 문화 전승자이자 정치 지도자이다.

 

'자연의 낙원'으로도 널리 알려진 하이다구와이는 자원 개발과 자연 파괴가 가장 급속하게 행해진 곳이기도 하다. 이 원시림은 1970년대 이후부터 행해진 남벌로 인해 급속히 사라져 갔다. 벌목을 저지하려는 투쟁의 선두에는 언제나 큰 북을 두드리며 우렁찬 소리로 민요를 부르는 구자우의 모습이 있었다. 한번은 취재에 나선 TV 캐스터가 그에게 물었다. "생명과 관련된 일도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나무들을 지키려 하는 것인가요?" 구자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분명 내가 죽지는 않을 테지만, 숲이 없어지면 우리들은 누구와도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겁니다."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것이 그 곳에 서 있는 나무들 때문이라는 의미처럼 들린ㄷ. 그런데 나무와 자신을 저토록 동일시하는 듯한 사고는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얼른 와닿지 않는다. 구자우에게 있어서는 숲이, 강이, 바다가, 그리고 그 곳에 사는 다양한 생물들이 자기 존재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한 연결들이야말로 그에게는 하나의 문화인 셈이다. 그에게 문화란 느리게 순환하며 흐르는 자연계의 시간에 인간의 삶을 순응시켜 조화롭게 꾸려 나가는 지혜인 것이다.

 

하이다족의 으뜸 가는 가수이기도 한 구자우는 자신의 큰북에 곰을 문장처럼 그려 넣었다. 그는 대지가 어머니라고 한다면 곰은 형제와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최근의 생태 조사에 따르면, 하이다구와이를 비롯한 온대 우림에서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을 곰이 잡아먹고, 이렇게 먹다남은 물고기를 숲의 곳곳에 던져 버리기 때문에, 연어가 많이 오는 해에는 나무의 나이테가 그만큼 두터워진다고 한다. 숲이 바다를 키운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바다 역시 숲과 바다를 이어주는 중계자로서 생태계를 지키며, 거대한 시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 내고 있다.

 

벵골 만 동부의 안다만 제도의 숲속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향기의 달력'이란 것이 있어서 꽃들이나 나무들의 냄새를 통해 시간을 나타낸다고 한다. 북미 나바호족의 신화에 따르면, 이  세상 최초의 인간은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려서 달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계절은 크게 겨울과 여름으로 나뉘며, 각각의 달은 그 시기에 일어나는 특징적인 사건에 따라 이름이 정해진다. 예를 들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의 11월에 해당하는 것은 '훌쩍 야윈 바람의 달', 1월은 '꽁꽁 언 눈 얼굴의 달', 4월은 '보드랍고 섬세한 잎사귀의 달'이다. 이렇게 각각의 달마다 그것을 특징짓는 '마음'이 담겨 있으며, 또한 거기에는 길조를 상징하는 '부드러운 깃털'에 해당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꽁꽁 언 눈 얼굴의 달'의 '마음'은 얼음, 이 때 '부드러운 깃털'은 새벽의 샛별(금성)이다. '보드랍고 섬세한 잎사귀의 달'의 '마음' 바람, 이 때의 '부드러운 깃털'은 비다.

 

자수가로 알려진 아이누족의 치캇프 미에코는 매년 나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달력을 보내온다. 홋카이도의 자연 풍경을 직은 사진에, 그녀가 한땀 한땀 정성을 들여 수놓은 아이누의 전통 문양이 새겨진 달력이다. 이 달력이 주는 또하나의 즐거움은 각 달을 표현하는 아이누의 말과 그에 대한 설명들이다. 1월인 '쿠 에카이 추프'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은 '(추위가 아직 심해서) 당기려는 화살마저도 부러지는 달'. 그리고 8월은 '(긴 월동 준비를 위해) 여자도 아이들도 부지런히 일하는 달'이다. 이들에게 시간은 이렇듯 저마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풍요로운 시간들이 말 속에 깃들여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그리고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어 간다.

 

생각해 보면, 하이쿠에 들어 있는 세시기 또한 그런 풍요로운 시간을 표현한 언어의 보고다. 그 페이지들을 넘길 때마다 우리들 마음 속 깊은 곳의 원주민들이 그리고 또한 우리들 내부의 애니미스트(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가 감응하지 않은가.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는 또다른 삶,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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