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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칭기즈칸의 육포, 혁신의 시작은 '창조적 파괴'

독립출판 무간 2018. 3. 10. 20:53

세상을 바꾼 칭기즈칸의 육포, 혁신의 시작은 '창조적 파괴'

 

전 세계를 뒤흔든 몽골기병의 비밀... 말 안장에 육포 가루 넣고 다니며 싸워 '전쟁=보급전' 고정관념 깨다

일등기업 코닥은 '카메라=필름' 편견에 빠져 디카 포기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변화의 속도 빨라 리더의 혁신은 '창조적 파괴'에서 시작




 

12세기 중반 몽고고원의 부족장이던 테무친은 1189년 여러 부족을 통일해 맹주 자리에 올랐습니다. 세력을 계속 넓혀가던 그는 1206년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고 몽고고원 일대 유목민족의 왕(Khan·)으로 추대되죠. 이후 중국을 침략하고 서방으로 가는 무역로를 확보하면서부터 세계제국 건설이 시작됩니다.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몽골제국은 동쪽으로는 한반도에서, 서쪽으로는 러시아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몽골제국은 전성기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나폴레옹의 프랑스, 히틀러의 독일을 합한 것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됩니다. 불과 200만명의 유목민에서 시작한 몽골제국은 150년 동안 2억명이 사는 세계 영토의 절반(아메리카 대륙 제외)을 지배하게 된 거죠.

 

세계제국 건설이 가능했던 이유는 칭기즈칸의 용맹한 몽골 기병 덕분입니다. 기병은 말을 타고 싸우는 전사를 뜻하는데요. 당시 몽골의 말은 유럽인의 것보다 작고 힘도 약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모는 기술만큼은 몽골인들을 따라갈 수 없었죠. 몽골인들은 걷기와 함께 말타기를 시작했으니까요. 특히 몽골 기병의 가장 큰 강점은 세상의 어떤 군대보다 빨랐다는 겁니다.

 

전쟁사 전문가 리처드 가브리엘(Richard Gabriel) 캐나다 왕립사관학교 전쟁학과 교수는 몽골 기병의 가장 큰 장점은 기동성이었다. 앞에 있던 적의 뒤편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후방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유럽군을 흔들어 놓았다”(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적의 척후병이 200~300km 떨어진 곳에서 몽골군의 이동을 감지하고 영지로 돌아와 보고하면 성안에선 그때부터 전쟁 준비를 시작합니다. 당시 통념으로는 일주일 정도는 있어야 군대가 도착할 거라고 예상했죠.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차부대가 하루 30~40km씩 진군했던 걸 생각하면 12~13세기로서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몽골군은 일주일은커녕 다음 날이면 성에 도착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리처드 가브리엘은 제베와 수부타이 같은 몽골의 명장들은 당시 상식으론 상상할 수 없는 위험한 전투를 많이 벌였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압도적인 전투 속도 덕분이었다. 전투에서 불리할 때는 적의 추격 속도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적이 쫓아올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칭기즈칸의 군대엔 보급부대가 없었죠. 그렇다면 병사들은 무엇을 먹었냐고요? 칭기즈칸의 기병들은 개개인이 육포와 가루우유, 말 젖 등을 휴대하고 다녔습니다. 안장 밑에 깔아둔 고기는 말이 달리면서 발생하는 열과 땀으로 부드럽게 절여졌죠. 가루우유는 물에 타 마시면 오늘날의 요거트와 같은 든든한 음식이 됐습니다. 세상을 바꾼 음식 이야기의 저자 홍익희 세종대 교수는 가루를 낸 육포를 물에 타 마시면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바싹 마른 육포가 뱃속에서 불어 공복을 채웠기 때문이다. 육포 한 봉지로 일주일치 식량이 됐다고 말합니다. 그는 특히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데다, 전쟁 중 불을 피울 일도 없어 적에게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출귀몰한 기습작전이 가능했다고 강조하죠.

 

이처럼 칭기즈칸은 자신들에 익숙한 육포라는 음식을 전투식량으로 사용하며, 이때까지 존재했던 전쟁=보급이라는 통념을 완벽히 깨버립니다. 별도의 보급부대가 후미에서 따라오고, 또 이들을 사방에서 호위하는 진군이 필요 없던 거죠. 보급전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중세 역사에서 보급부대를 없앤 건 당시로선 엄청난 혁신이었던 셈입니다. 이 같은 칭기즈칸의 창조적 파괴는 몽골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업 중 하나인 코닥(Kodak)입니다. 1888년 이스트만이 설립한 코닥은 100년 동안 업계의 최강자였습니다. 전성기였던 1970년대 중반 코닥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필름 90%, 카메라 85%에 달했죠. 그 당시엔 코닥 모멘트(사진을 찍는 순간)’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카메라는 곧 코닥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카메라는 필름을 사용했고요.

 

원래 코닥도 처음엔 혁신기업이었습니다. 설립자 이스트만은 지속적 투자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데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트만은 기술개발 책임자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첫째 원하는 모든 것을 연구하라, 둘째 사진기술의 미래가 되라는 것이었죠. 그 때문에 코닥은 특허를 가장 많이 가진 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일등일 것 같던 코닥도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1975년 코닥의 젊은 엔지니어 스티브 세손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합니다. 사진을 필름이 아닌 카세트에 기록하고 이를 텔레비전 이미지로 출력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카메라 무게만 3kg이 넘어 상용화하기엔 어려움이 있었지만 필름을 쓰지 않는 매우 혁신적인 카메라였죠. 하지만, 세손의 연구 결과를 보고받은 당시 경영진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무겁고 기괴한 카메라를 누가 쓰겠냐는 거였습니다. 특히 필름 시장의 독점업체인 코닥 입장에서 필름이 없는 카메라는 제 살 깎아 먹기라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3년 후 경영진은 다시 ‘2010년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열린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묵살하고 말죠. ‘카메라=필름이란 고정관념을 깨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반면, 후발주자인 후지필름은 코닥의 신기한발명품을 보고 뒤늦게 디지털카메라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1988년 첫 상용 제품을 내놓죠. 물론 디지털카메라가 시장의 대세가 되기까진 10여 년이 더 걸렸지만 한 번 시장에 자리 잡은 디카는 무섭게 필름 카메라를 내몰았습니다. 결국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코닥은 파산 신청(2012) 후 재기를 노리고 있고, 후지필름은 연 매출 24916억엔(2016)의 건실한 회사로 성장했죠.

 

http://v.media.daum.net/v/20180310010059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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