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왕필산책 : 도덕경 제15장 왕필주 "옛날에 도를 잘 실천한 사람은 미묘현통해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본문

왕필산책

왕필산책 : 도덕경 제15장 왕필주 "옛날에 도를 잘 실천한 사람은 미묘현통해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독립출판 무간 2018. 2. 17. 08:25


15

 

 

고지선위사자古之善爲士者, 미묘현통微妙玄通, 심불가식深不可識. 부유불가식夫唯不可識, 고강위지용故强爲之容. 예언豫焉! 약동섭천若冬涉川.

유혜猶兮! 약외사린若畏四隣.

엄혜儼兮! 기약용其若容. 환혜渙兮! 약빙지장석若氷之將釋. 돈혜敦兮! 기약박其若樸. 광혜曠兮! 기약곡其若谷. 혼혜混兮! 기약탁其若濁.

숙능탁이정지서청孰能濁以靜之徐淸? 숙능안이구동지서생孰能安以久動之徐生?

보차도자保此道者, 불욕영不欲盈.

부유불영夫唯不盈. 고능폐故能蔽, 불신성不新成.

 

옛날에 () 잘 실천한 사람은 미묘현통해서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그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을 묘사할 뿐이다. 신중하구나! 살얼음 낀 냇가를 건너듯.

진중하구나! 사방을 경계하듯. 정성스럽구나! 손님을 대하듯. 풀어지는구나! 얼음이 녹듯. 투박하구나! 통나무처럼. 비우는구나! 계곡처럼. 섞이는구나! 흙탕물처럼.

누가 혼탁한 것을 꺼리지 않고 그것과 함께 하면서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는가? 누가 불편한 것을 꺼리지 않고 언제나 그것과 함께 하면서 서서히 따라하게 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이치를 따르는 사람은 (일부러 일삼아) 채우고자 하지 않는다.

무릇, 오직 (일부러 일삼아) 채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부러 일삼아) 가리거나 덮어서, 새롭게 이루지 않는 것이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豫焉! 若冬涉川.

(“) 겨울철 살얼음이 낀 냇가를 건너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진중한 그런 모습이다. () 걸음을 내 디디려는 것 같기도 하고, () 걸음을 내 딛지 않으려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 걸음을 내 딛게 될지 아니면 내 딛지 않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진중한) 모습이다(冬之涉川, 豫然. 若欲度, 若不欲度. 其情, 不可得見之貌也).

 

 

猶兮! 若畏四隣.

(“는 비유하자면) 사방의 이웃나라가 더불어 공격해 들어갈 때, () 중앙의 임금에게서 볼 수 있는 신중한 그런 모습이다. (그 중앙의 임금이) 어떠한 전략을 구사驅使해서 어떻게 응전應戰해 나올지 알아차려지지 않는 (그런 신중한) 모습이다. 높은 수준의 덕스러움上德을 지닌 사람은 그 (덕스러움의 펼쳐짐의) 단서나 기미가 알아차려지지도 않고, (그 펼쳐지는) 덕스러움(의 모습)이 살펴지지도 않는데, (“) 또한 그와 같(은 모습이)(四隣合攻, 中央之主, 猶然. 不知所趣向者也. 上德之人, 其端兆不可覩, 德趣不可見, 亦猶此也).

 

 

儼兮! 其若容. 渙兮! 若氷之將釋. 敦兮! 其若樸. 曠兮! 其若谷. 混兮! 其若濁.

모름지기, 노자가 말한 모든 은 모두 그 상태형태(어떻게) 정해 부르거나 (무엇으로) 이름 지어 붙일 수 없다는 뜻이다(, 此諸若, 皆言其容象, 不可得而形名也).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무릇, (통치자가 자신을) 어둡게 함으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이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밝아지게 된다. (통치자가 자신을) 탁하게 함으로써 백성을 가라앉히면, (백성이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맑아지게 된다. (통치자가 자신이) 불편한 것을 꺼리지 않음으로써 백성을 움직이면, (백성이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이 저절로 그러한自然 이치이다. “누가 할 수 있는가?”라는 말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는 모두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는 ) 삼간다는 말이다(, 晦以理物, 則得明. 濁以靜物, 則得淸. 安以動物, 則得生. , 自然之道也. 孰能者, 言其難也. 徐者, 詳愼也).

 

해 설

노자가 말한 ”, 그리고 왕필이 말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음(無欲 : 1)” 내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 : 2)”을 비유한다.

왕필주 서자徐者, 상신야詳愼也에 따르면, 노자가 말한 孰能濁以靜之徐淸?”누가 (자신을) 혼탁하게 함으로써, 백성을 가라앉히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은) 맑음을 삼가게 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으며, “孰能安以久動之徐生?”누가 (자신이) 불편한 것을 꺼리지 않음으로써, 언제나 백성을 움직이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은) 을 삼가게 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다음을 참조해 볼만하다. “그러므로 성인은 (일부러 일삼고자 함이 없음이나) 일부러 일삼음이 없음에 머무는 것이다. (일부러 일삼은) 이 아니라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는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른) 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만물을 자라나게하지만 (그 자라남에 대해서 일부러 일삼아) 하지 않는 것이다. (만물을) 생겨나게하지만 (일부러 일삼아 자신에게) 소유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만물을) 살아가게하지만 (일부러 일삼아 자신에게) 의지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만물로 하여금) 을 이루게 하지만 (일부러 일삼아 그 공) 머물지 않는 것이다. 무릇, 오직 (일부러 일삼아)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공)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是以聖人,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높은 수준의 잘함은 물처럼 하는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 나누지 않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을 가리지 않고, 그 곳)에 머문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 而不爭. 處衆人之所惡).

 

 

保此道者, 不欲盈.

가득 차면, 반드시 넘치기 때문이다(, 必溢也).

 

 

夫唯不盈, 故能蔽, 不新成.

는 가리거나 덮는다는 말이다(, 覆蓋也).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