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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필산책 : 도덕경 제16장 왕필주 "텅 빔에 이르라, 끝까지" 본문

왕필산책

왕필산책 : 도덕경 제16장 왕필주 "텅 빔에 이르라, 끝까지"

독립출판 무간 2018. 2. 18. 18:51


16

 

 

치허致虛, . 수정守靜, .

만물萬物, 병작竝作.

, 이관以觀, .

, 물운운物芸芸, 각복귀기근各復歸其根.

귀근왈정歸根曰靜. 시위복명是謂復命. 복명왈상復命曰常.

지상왈명知常曰明. 부지상不知常, , 작흉作凶.

지상知常, .

, 내공乃公.

, 내왕乃王.

, 내천乃天.

, 내도乃道.

, 내구乃久.

몰신불태沒身不殆.

 

텅 빔에 이르라, 끝까지. 고요함을 지켜라, 도탑게.

만물은 각자살아간다.

나는 (그것을) 봄으로써, 돌이킨다.

무릇, 만물은 각자 살아가지만芸芸, 모두그 뿌리로 되돌아감을.

() 뿌리로 되돌아감 (그것)이라 일컫는다. (‘’) 그것을 () 본성의 명령에 따름이라 일컫는다. () 본성의 명령에 따름 (그것)이라 일컫는다.

() ‘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일컫는다. () ‘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어긋난 채, 흉함을 일으킨다.

() ‘을 알면, (만물을) 품어 안아 어울리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

하면, 더 없이 넓은 공평함에 이르게 된다.

하면, 두루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는 데 이르게 된다.

하면, 하늘(의 덕스러움)과 같아지는 데 이르게 된다.

하면, 를 체득하게되고, () 크게 어울리게되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 텅 빔과 없음의 끝점에 이르게 된다.

하면,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살아감이) 멈추지 않고, (그것이) 끝나지 않는데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게 된다.

 

 

致虛, . 守靜, .

말하자면, “텅 빔에 이름致虛만물끝까지 도탑게 해야 할 바이다. “고요함을 지킴守靜만물참되게 바르게 해야 할 바이다(, 致虛, 物之極篤. 守靜, 物之眞正也).

 

 

해 설

노자가 말한 텅 빔에 이름致虛고요함을 지킴守靜은 생김·자람·시듦, 운동·작용·활동, 감각·지각·의지·행위에 있어서, 정서적 또는 육체적 편안함 내지 정신적 혹은 물질적 이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에 따르지 않음을 비유한다. 다시 말하면, “텅 빔에 이름致虛고요함을 지킴守靜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 1)”일부러 일삼는 바(: 2)”없는(: 3)” ‘만물의 생김·자람·시듦, 운동·작용·활동, 감각·지각·의지·행위를 비유하는 것이다.

왕필이 말한 은 제1道可道. 非常道에서 과 의미가 통한다. “실천한다또는 실현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치허致虛, 물지극독物之極篤텅 빔에 이르는 일은 만물이 언제 어디서나 실천(또는 실현)해야 할 바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왕필이 말한 은 제10專氣致柔에서 과 의미가 통한다. “실현한다또는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수정守靜, 물지진정物之眞正고요함을 지키는 일은 만물이 온전히 실현(또는 실천)해야 할 바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萬物, 竝作.

(노자가 말한 은 본성, 본성의 명령에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게) 운동하고, 작용하며, 생겨나고, 자라난다는 말이다(, , , ).

 

해 설

노자가 말한 은 뒤에 있는 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나란하다또는 가지런하다는 뜻으로서, 본성, 본성의 명령에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다(自然 : 15장 왕필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노자가 말한 은 만물에 대한 도의 근원성 또는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로서의 내재성, 만물의 자기 원인성 혹은 자기 충족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은 생김·자람·시듦, 운동·작용·활동, 감각·지각·의지·행위를 포괄한다.

 

 

, 以觀, .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있음) 텅 비우고, 고요하게 함으로써, (만물이 각자 자라나지만, 모두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없음으로) 되돌아감보게 되고, (그것을) 돌이키게 된다. 무릇,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 ‘있음(없음) ‘텅 빔에서 시작되며, ‘움직임(있음’)’‘(없음) 고요함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만물萬物이 비록 각자 움직이며 살아가더라도, 마침내 (모두 그 없음) ‘텅 빔고요함으로 되돌아가는復歸 것이다. 따라서 텅 빔에 이르는 일은 만물이 언제 어디서나 실천(또는 실현)해야 할 바인 것이다(以虛靜, 觀其反, . , 有起於虛, 動起於靜. 故萬物雖並動作, 卒復歸於虛靜. 是物之極篤也).

 

해 설

노자가 말한 감각(시각)’을 통한 ()’으로서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르는 萬物竝作을 대상으로 삼는 반면, “은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르는 지각(추론)’을 통한 ()’으로서 復歸其根을 대상으로 삼는다.

왕필이 말한 복귀復歸말미암는다(: 1장 왕필주)’, ‘따른다(: 2장 왕필주, : 12장 왕필주)’, ‘맡긴다(: 3장 왕필주)’, ‘같아진다(: 5장 왕필주)’, ‘응한다(: 8장 왕필주)’, 싣는다, 품는다(, : 10)’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왕필주 유기어허有起於虛, 동기어정動起於靜에서 만물의 비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를 비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物芸芸, 各復歸其根.

(“各復歸其根은 만물이 본성, 본성의 명령에 따라서 저절로 그러하게 운동하고’, ‘작용하며’, ‘생겨나고’, ‘자라나듯이’) 각자 그 시작되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말이다(各返其所始也).

 

해 설

노자가 말한 復歸와 왕필이 말한 말미암음(: 1장 왕필주)’, ‘따름(: 2장 왕필주, : 12장 왕필주)’, ‘맡김(: 3장 왕필주)’, ‘같아짐(: 5장 왕필주)’, ‘응함(: 8장 왕필주)’, ‘실음과 품음(, : 10)’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노자가 말한 과 왕필이 말한 는 노자가 말한 텅 빔고요함으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없는(: 2)” 생김·자람·시듦, 운동·작용·활동, 감각·지각·의지·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노자가 말한 各復歸其根物芸芸의 양태 내지 양식을 비유한 것으로서, ‘각자의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른 만물의 생김·자람·시듦, 운동·작용·활동, 감각·지각·의지·행위에 대한 부연敷衍으로 이해할 수 있다.

노자가 말한 과 의미가 통한다.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뿌리로 돌아간다歸根는 말은 고요함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라 일컬은 것이다. ‘고요함으로 되돌아가는 말은 본성의 명령돌이킨다는 뜻이다. 따라서 復命이라 일컬은 것이다. 본성의 명령을 돌이킨다는 말은 본성이나 본성의 명령 언제나 함께 있고 어디서나 함께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라 일컬은 것이다(歸根, 則靜. 故曰靜. , 則復命. 故曰復命也. 復命, 則得性命之常, 故曰常也).

 

해 설

12장 왕필주 , 耳目口心, 皆順其性也. 不以順性命, 反以傷自然.”, 그리고 , 以觀, .”에 대한 왕필주 有起於虛, 動起於靜에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있음을 의미하면서 그러한 만물의 비유하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없음을 의미하면서 그러한 를 비유하는 것임을 전제할 때, 왕필은 다음의 사실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는 의미에 있어서 차이가 크지 않다. 둘째,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로서 만물 각자에 내재한다. 셋째, 따라서 도가 그러하듯이 만물 각자 또한 자기 원인적 내지 자기 충족적이다.

 

知常曰明. 不知常, , 作凶.

이 실천된(또는 실현된)모습치우치게 대하지 않음’, ‘두드러지게 대하지 않음이다. 밝게 대하지도 않고 어둡게 대하지도 않는 모습, 따뜻하게 대하지도 않고 차갑게 대하지도 않은 모습이다. 따라서 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일컫는다고 말한 것이다. 오직, (“밝음”) 그것이 돌이켜져야, 이내, 만물萬物품어 안아어울리게 되며, (따라서 만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 (그러나 밝음”) 그것을 잃어버린 채, (만물에게) 나아가게 되면, () ‘본성의 명령(; )어긋남이 개입되게 되고, (따라서) 만물이 그 본성의 명령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어긋난 , 흉함을 일으킨다고 일컬은 것이다(常之爲物, 不偏, 不彭. 無皦昧之狀, 溫涼之象. 故曰知常曰明也. 唯此復, 乃能包通萬物, 無所不容. 失此以往, 則邪入乎分, 則物離其分. 故曰不知常, 則妄, 作凶也).

 

해 설

왕필주 상지위물常之爲物에서 실천한다또는 실현한다는 뜻으로서, “致虛, . 守靜, .”에 대한 왕필주 物之極篤. 物之眞正.”에서 혹은 과 의미가 통하며, 은 형상과 상태, 양식과 양태, 모양과 형편, 겉모양과 밑바탕 등을 포괄한다.

왕필이 말한 불편不偏, 불팽不彭.”, “무교매지상無皦昧之狀, 온량지상溫涼之象은 운동·작용·활동에 있어서,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에 따른다는 의미로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없는운동·작용·활동 모습·을 비유한다. 다시 말하면, 감각·지각·의지·행위에 있어서, 정서적 또는 육체적 편안함 내지 정신적 물질적 이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욕구나 가치, 사회적으로 합의된 목표나 이상 등이 반영된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다음을 참조해 볼 만하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버려진 추구芻狗처럼 대한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서, 백성들을 버려진 추구처럼 대한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 5).”

왕필이 말한 품음”, “어울림”, “받아들임말미암음(: 1장 왕필주)’, ‘따름(: 2장 왕필주, : 12장 왕필주)’, ‘맡김(: 3장 왕필주)’, ‘같아짐(: 5장 왕필주)’, ‘응함(: 8장 왕필주)’, ‘실음과 품음(, : 10)’, ‘되돌아감復歸··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왕필주 실차이왕失此以往에서 은 생김·자람·시듦, 운동·작용·활동, 감각·지각·의지·행위를 포괄하는데, ‘常之爲物에서 와 의미가 통한다.

 

 

知常, .

(“) 품어 안아 어울리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無所不包通也).

 

 

, 乃公.

품에 안아서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바가 없게 되면, 이내 더 없이 넓게 공평한 데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無所不包通, 則乃至於蕩然公平也).

 

해 설

왕필주 탕연공평蕩然公平을 이해하는 데, 다음을 참조해 볼 만하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버려진 추구芻狗처럼 대한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서, 백성들을 버려진 추구처럼 대한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 5).” “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 나누지 않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을 가리지 않고, 그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땅처럼 누구나 머물게 하라. 연못처럼 사심 없이 마음을 쓰라. 하늘처럼 고르게 베풀어라. 을 하는 데 근거가 있으라. 다스리는 데 원칙이 있으라. 을 하는 데 이치에 맞으라. 움직이는 데 한결 같아라. 무릇, 오직,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르지 않음으로써) 다투지 마라. 그러므로 (물은) 치우침이 없는 것이다(水善利萬物, 而不爭. 處衆人之所惡. 居善地. 心善淵. 予善天.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 8).”

 

 

, 乃王.

더 없이 넓고 공평하게 되면, 이내 두루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는 데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蕩然公平, 則乃至於無所不周普也).

 

 

, 乃天.

두루 미치지 못하는 데가 없게 되면, ‘하늘(의 덕스러움)’과 같아지는 데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無所不周普, 則乃至於同乎天也).

 

 

, 乃道.

하늘과 더불어 () 덕스러움같아지게 되고, ‘체득하게 되며, (‘) 크게 어울리게 되면, 이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 ‘텅 빔없음끝점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與天合德, 體道, 大通, 則乃至於極虛無也).

 

 

, 乃久.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에 대한) ‘텅 비움멈추게 되고 () ‘없게 함끝내게 되며, 가 언제나 함께 있고 어디서나 함께 함을 얻게 되면, 이내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살아감이) 멈추지 않고 (그것이) 끝나지 않는 데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窮極虛無, 得道之常, 則乃至於不窮極也).

 

 

沒身不殆.

(‘일부러 일삼는 바일부러 일삼는 바) ‘없음실현된(또는 실천된) 모습은 물과 같다. (따라서 으로써 그것을 일삼으면) 이 해치지 못하게 된다. 와 같다. (따라서) 이 부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마음으로써 그것을 일삼으면, 호랑이가 그 이빨로 물어뜯을 데가 없게 되고, 외뿔소가 그 뿔로 들이받을 데가 없게 된다. 이 그 끝으로 찌를 데가 없게 되고, 이 그 날로 곳이 없게 된다. (그런데) 어찌 위급함이나 위태로움이 생겨나게 되겠는가? (無之爲物, . , 不能害. . , 不能殘. 用之於心, 則虎兕, 無所投其齒角. 兵戈, 無所用其鋒刃. 何危殆之有乎?).

 

해 설

왕필주 무지위물無之爲物용지어심用之於心은 의미 차이가 크지 않다.

왕필주 불능해不能害”, “불능잔不能殘”, “무소투無所投”, “무소용無所用의 이유는 일부러 일삼고자 하거나 일부러 일삼지 않음으로써, “치우치게 하지 않고(無尤 : 8)”, ‘두드러지게 하지 않기때문이다.

왕필주 용지어심用之於心의지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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