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말로만? "태평양에 양곡 실은 배가 끊어지면 니네들이 비파나 수박 먹고 배 채울래? 꽃냄새나 맡으면서 고픈 배 참으렴!" 본문

먹는 이야기

말로만? "태평양에 양곡 실은 배가 끊어지면 니네들이 비파나 수박 먹고 배 채울래? 꽃냄새나 맡으면서 고픈 배 참으렴!"

독립출판 무간 2016. 11. 10. 11:01

비가 내리고 난 뒤 쌀쌀한 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물에 불은 콩을 주웠다. 떨면서 한나절 동안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면서 주운 콩이 한 됫박이나 될까. 돈으로 바꾸자면 누가 이천 원도 주지 않으리라. 그 시간에 대기업 사보 같은 데에서 온 청탁을 거절하지 않고 원고를 썼으면 백 배쯤 높은 고료를 받아 챙길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도 뒤늦게 떠올랐지만 콩을 줍는 순간에는 밭에 널리 흰콩밖에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 의성에 사는 김영원 장로님이 다녀갔다. 평생을 두고 돈 안되는 주곡 농사를 고집해 온 분이다. 이 분이 한 이야기 가운데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300평 밭에 밀을 심으면 500kg쯤 수확을 거둔다고 한다. 이것도 잘 지을 경우의 이야기다.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에서 후하게 쳐주는 값이 밀 1kg에 800원. 모두 팔아야 손에 쥐는 돈이 40만 원이다. 그 돈을 받고 내다 파느니 차라리 집에 제분기 들여놓고 밀가루로 빻아 수제비를 뜨거나 밀개떡을 해 먹으면 이웃과 나누어 먹더라도 주리지 않고 한 철 날 수 있으니 그렇게라도 하자는 게 김 장로님의 생각이다. 구태여 집에 제분기를 들여놓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밀을 방앗간에 가지고 가면 빻는 삵이 밀값의 30~40%나 된다. 그것도 적은 양은 빻아 주지도 않는다. 한꺼번에 많이 빻아 두면 보름에서 스무 날만 되어도 밀가루에서 바구미와 벌레가 생긴다. 이놈들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방부제를 쓰는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수입 밀가루나 다름이 없게 된다. 그래서 김 장로님은 요즈음 가정용 제분기 보급을 '운동' 삼아 하고 있다. 우리도 김 장로님이 자기 돈 들여 개발한 가정요 제분기를 한 대 들여다 놓았는데, 부품에 문제가 있다고 그걸 갈아주러 온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몇 번 밀가루를 빻으면서도 부품에 문제가 있는지 어떤지 몰랐는데, 김 장로님이 여러 차례 써보고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파악하여 이렇게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고쳐주고 있다)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은 밭 3천 평 가꾸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모를 것이다. 농기계도, 농약도, 제초제도, 화학비료도, 항생제가 든 돼지똥이나 닭똥으로 만든 유기질 비료도 쓰지 않고, 옛날 방식을 고집하며 농사를 짓는 경우에 한 집에서 밭 3천 평 가꾸려면 그야말로 뼈가 휜다. 장정이 낀 너댓 식구가 달려들어도 힘에 벅차다. 주곡 농농사를 할 경우에 토질이 비교적 좋은 곳에서는 200평 한 마지기에 50만원, 나쁜 곳에서는 300평에 50만원 소득이 생긴다 하니, 좋은 밭이라 쳐도 3천 평에서 생기는 소득이 다 보태서 750만 원이다. 네 사람이 매달린다 해도 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노동의 대가는 한 해에 200만 원이 안 되니 한 달에 20만 원을 훨씬 밑돈다.

형편이 이러니 누가 주곡 농사를 거들떠보려고나 할까. 우리 동네에서 밀농사, 보리농사, 콩농사에 매달리는 우리를 보고 '저 사람들 곧 손 털고 일어설 거여'하면서 손가락질하는 분들이 많은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리고 생활 형편이 나은 집, 못한 집 할 것 없이 농촌에 젊은이들이 남아 있으려 들지 않는 것도 백 번 이해할 만하다.

입으로만 '반미' 외치면 무얼 하나. 쌀만 겨우 90%쯤 자급이 되고, 밀, 보리, 콩 같은 그 밖의 주곡 자급율은 5% 남짓밖에 안 되는 걸.

나 어렸을 적에 아버지한테서 들은 말이 기억난다. '정치에서 망한 나라는 다시 일어설 수 있어도 경제에서 망한 나라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법이다.' 지금 우리 나라 꼴이 그 모양이다. 세계 식량 사정은 나날이 나빠져 가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나타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더라도 미국에서 흉년이 들어 우리 나라 사람이 떼죽음을 한다면 누구를 원망해야지? 실정이 이러한데도 흉년 들어 고생하는 북한 동포들 보고 거드름 피우는 꼴이라니!

신문, 텔레비전 아예 안 보고 산 지 일 년이 가깝지만 가끔 외출을 해서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면 열불이 난다. '돌아오는 농촌'을 만든다면서 하는 수작이 정말 꼴불견이다. '제주도 어느 마을에서는 비파를 심어 떼돈을 벌었단다', '경상북도 상주에서는 유난히 단 수박을 재배하여 몇 억의 소득을 올렸단다.' 맨날 이런 이야기뿐이다. 주곡 농사만 농사만 지어도 살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이렇게 허황된 이야기로 시청자를 현혹시키니, 그 말에 넘어가서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들어온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이미 농사꾼이 아니다. 농사꾼이 아닌 사람이 농촌에 들어와 살 수 있나. 열에 아홉은 몇 해를 못 버티고 빚만 산더미처럼 진 채 손털고 나가거나 야반도주하기 일쑤지.

부르텃다가 옹이 박힌 손 다시 부르트도록 괭이로 일군 밭에 밀, 호밀, 겉보리, 쌀보리 잔뜩 심어놓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래, 내년에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나 어디에고 흉년 한 번 들어봐라. 태평양에 양곡 실은 배가 끊어지면 니네들이 비파나 수박 먹고 배 채울래? 꽃냄새나 맡으면서 고픈 배 참으렴.'

심보가 고약하다고? 그래, 식량 자급 없이도 주권 국가 행세할 수 있다고 야바위치는 놈들 심보는 무슨 놈의 심보라서 그렇게 예뻐 보이고, 찬 비에 몸 오들오들 떨어가면서 콩알 하나가 아까워 허리도 못 펴고 주섬주섬 줍는 사람 심보는 어디가 어때서 그렇게 고약해 보인담?

지난 해, 그저께까지만 해도 너도 똑같은 놈이었잖아? 그렇다. 똑같은 놈이었다. 어쩔래? 똥 묻은 개였다. 그렇게 대들면 뭐 나아질 줄 알아? 내가 이렇게 욕을 해도 내가 거둔 곡식 어디 나 혼자만 먹자는 건가. 마치 컴퓨터 칩만 먹고도 살 수 있는 별난 위장을 지닌 것처럼 설치는 자들 꼴 보기 싫어서 비아냥거려 보는 거지.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몸은 친미 일색이면서 말로만 반미 하면 뭐해? 이러다간 끝까지 종놈 신세 못 벗이나.

(윤구병, 잡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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