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나를 쓰러뜨린다...! 본문

사는 이야기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나를 쓰러뜨린다...!

독립출판 무간 2016. 9. 28. 09:42

언제가 제 집사람이 막 싹을 틔운 가는 잎줄기 하나를 물컵에 담아 식탁 위에 두고 애지중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것도 아닌데 식탁 위에까지 올려놓을 필요가 뭐 있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람은 특별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탁기 속에는 옷에 묻은 먼지 등을 거르는 거름망이 있는데 그게 그 거름망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젠가 거름망에 콩이 한 알 들어가 있는 걸 끄집어 내려고 하다가 그냥 두었는데, 그게 기어이 그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탁기가 어떤 것입니까. 온갖 더러움이 묻은 옷을 빠는 기계가 아닙니까. 햇빛 한번 들어오지 않는데다 세제가 풀린 거친 물살이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찬물과 뜨거운 물이 뒤섞여 나오는 곳입니다. 한 알의 콩이 싹을 틔우기엔 정말 열악한 환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콩이 싹을 틔웠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가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집사람이 이번에는 새알처럼 주렁주렁 새끼감자를 매단 감자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집사람이 지난 여름에 바구니에다 햇감자를 신문지에 싸서 베란다 구석에 둔 것이었습니다. 감자는 햇빛을 받으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몸에 푸른빛을 띠는데, 그게 인체에 독이 된다고 해서 햇빛을 받지 못하도록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깜박 잊고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열어보자 감자가 싹을 틔운 것입니다. 잎은 나오지 않았지만 감자눈에 싹이 돋았으며, 아래로 줄기를 뻗어 주렁주렁 크고 작은 새끼감자를 매달고 있었습니다. 집사람은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 새끼들을 가지게 한 감자한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콩과 감자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은 최악이었습니다. 흙도 바람도 물도 햇빛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콩과 감자는 싹을 틔웠습니다. 감자는 줄기를 뻗어 새끼까지 주렁주렁 매달았습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만일 제가 그런 환경에 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그 콩이라면 더 이상 고통을 당하기 싫어 하루속히 죽기만을 원했을 것 같습니다. 그 많은 옥토를 놔두고 왜 하필이면 세탁기 거름망 안에 들어가게 했는지 신을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콩은 신을 원망하기보다 그래도 세탁기 안에서도 거름망 안에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최선의 삶을 산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 감사가 바탕이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조건 속에서 싹을 틔울 수 있었겠습니까.

제가 그 감자라고 해도 빨리 죽기만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찾아오는 봄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감자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서로 몸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면서, 서로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흙 한 줌,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새끼들을 잉태하는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정호승,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