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결정장애의 시대, 당신은 안녕한가? 본문
# “김 대리 오늘 점심 뭐 먹을까?” 직장 동료 이 대리가 보낸 카톡 메시지에 김 대리가 답한다. “결정장애인 거 알면서. 이 대리가 골라. 따라갈게.” 다시 이 대리가 답한다. “나도 몰라. 일단 1층에서 만나자.” 두 사람은 회사 근처 식당가를 돌아다니다 결국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짜장면을 먹으면서 두 사람은 “다음부터는 음식메뉴를 결정하고 움직이자”고 다짐했지만 지금도 이들은 여전히 점심시간만 되면 식당가를 헤매고 있다.
# “이 사람을 계속 만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최근 골드미스 이모(39)씨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만난 남성과 교제를 할지 말지 고민에 빠졌다. 한 눈에 빠질 만큼 매력적이진 않았지만 경제적 여유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기는 한데, 어디까지 진도를 나가야 할지 애매한 것이다. 손해 볼 일이 없다고 판단한 이씨는 일단 남성과의 만남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겉으로는 ‘쿨’한 모습을 보였지만 솔직히 이 남성을 언제까지 만날지 모른다.
‘과잉기회’가 낳은 모순 ‘결정장애’
선택의 순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런 증상을 ‘결정장애’라고 말한다. 결정장애는 의학적으로 질환이 아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장애라는 용어를 사용해 마치 정신질환의 일환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결정장애는 사회ㆍ심리학적 현상”이라고 했다.
인류사를 통틀어 경제ㆍ사회적으로 가장 풍요롭고 자유를 누리고 있는 현대인이 결정장애 때문에 고통 받는 이유는 뭘까. 과거보다 너무 많은 선택 기회가 주어진 것이 문제다. 사람들이 기회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태어난 신분에 따라 선택하면 됐지만 현대에는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해결이 가능하게 됐다”면서 “선택 기회가 너무 많아 역설적으로 결정을 쉽게 할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심리학자들은 결정장애를 ‘지연행동(procrastination)’으로 정의한다. 너무 많은 정보와 기회에 노출돼 결정을 내리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서구 심리학자들은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를 ‘메이비족(Generation Maybe)’이라 부른다.
우리사회에서 최근 사회현상으로 부각되고 있는 ‘썸’도 결정장애의 일환일 수 있다. 나해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이른바 썸은 SNS를 통해 사람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상대방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기는 싫고, 사람을 만나 만족감은 느끼고 싶은 현대인의 민낯”이라고 했다. 나 교수는 “쉽게 사람을 만나고 사귈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역으로 보면 사람에 대한 만족과 행복을 느끼지 못해 남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애매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 바로 썸”이라고 말했다.
부모의 과잉보호도 문제
부모의 과잉보호도 결정장애를 유발하는 원인일 수 있다. 원은수 고려대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어렸을 적부터 작은 결정 하나하나를 스스로 내리고 그 결정이 초래하는 결과를 본인이 책임지고 받아드리는 경험이 축적돼야 성인이 된 후에 크고 작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서 “하지만 자녀가 작은 결정 하나라도 스스로 내릴 기회를 주지 않고 모든 것을 부모가 알아서 결정하고 판단하는 과잉보호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원 교수는 “과잉보호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자녀는 결국 누군가가 대신 자신의 결정을 내려주는 것에 익숙해져 성인이 돼도 아주 간단한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어려워 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상규 한림대춘천성심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부모의 과잉보호로 갈수록 청소년이 의존성향이 높아지고 있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결정장애처럼 사회적으로 특정 증후군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문제”라면서 “장애, 증후군 등이 쏟아져 나오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라고 꼬집었다.
전문의들은 자기 확신 등 자존감이 낮고 우울ㆍ불안감이 높은 사람이 결정장애에 노출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 교수는 “결정장애는 우울증 초기증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면서 “우울증상이 생기면 화, 분노 등 감정조절에 실패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결과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나 교수는 “결정장애가 심하면 자신감, 자존감이 떨어질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정장애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결정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교수는 “사소한 것까지 생각하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에 집중해 결정을 내리는 훈련하면 결정장애 스트레스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쉽게 말하면 이런 방법이다. 오늘 점심은 무조건 매콤한 것을 먹겠다고 정한다. 식당을 선택한 후 식당에서 가장 매콤한 음식을 주문한다. 설사 주문한 음식이 맛이 없어도 매콤한 것을 먹겠다는 목표는 달성했기 때문에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정장애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이고 우울ㆍ불안 증세가 나타나면 전문의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야 한다. 최희연 이대목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결정장애는 우울증 등 다른 정신과적 증세와 동반해 발생한다”면서 “결정장애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반복적으로 결과에 후회를 한다면 전문의를 찾아 상담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결정장애는 콜라 맛은 즐기고 싶은데 설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을 원하는 심리와 유사하다”면서 “현대인은 너무 많은 정보와 과잉기회에 노출돼 늘 자기를 완벽하게, 전체적으로 최적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결정장애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http://www.hankookilbo.com/v/94ee2a7212e5417dbc9b47d0456b2f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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