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피사리... 아이고, 허리야! 본문
40여년 만에 농사일다운 농사일을 처음 해본 작년까지만 해도 나에게 우리가 심지 않은 풀은 '잡초'에 지나지 않았고, 이 '잡초'는 원수의 사촌쯤으로 여겨졌습니다. 올해 처음으로 '잡초'로 알고 무자비하게 뽑아 내던져 버렸던 풀들이 약초와 나물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나서부터는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 생각하고 저절로 밭에서 자라는 여러가지 풀들을 거두어 마흔 가지 가까운 효소를 담으면서 '풀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쑥, 억새, 칡순, 조뱅이, 소루쟁이, 명아주, 엉겅퀴, 살갈퀴, 한삼덩굴, 개모시풀, 달개비... 하다못해 지난 해 너무 지긋지긋해서 체머리가 흔들리던 바랭이까지 단지와 항아리 속에서 지금 효소로, 술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풀들을 원수가 밤에 몰래 와서 뿌리고 간 '가라지'로 여기지 않고 하느님이 우리의 편식 습관을 고쳐주고 일손을 덜어주려고 심어주신 약초와 나물로 여기기 시작했다니, 사실은 그렇다면 농사가 일이 아니고 놀이가 아니겠느냐고 지레 짐작할 수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이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닌 듯합니다. 마늘을 뽑아낸 자리에 자란 바랭이는 베어서 효소를 담아보니 맛이 그럴 듯해서 이뻐 보이더니, 당근과 감자를 심어놓은 자리에 당근보다, 감자보다 더 빨리 자라서 당근밭과 감자밭을 바랭이밭으로 둔갑시켜놓는 놈은 어찌 그리 미운지요. 하물며 이놈들은 이미 고추밭을 망쳐놓고 콩밭을 반쯤 망쳐놓은 죄가 있는 놈들이다. 꼬박 며칠에 걸쳐 '이놈들, 이 나쁜 놈들, 애써 퇴비를 만들어 당근과 감자 먹으라고 주었더니 곁에서 다 가로채 먹고 당근과 감자순이 발 디딜 틈조차 남겨놓지 않으니, 네 놈들은 그냥 두었다가 올 겨울 반찬걱정도 걱정이려니와 동네가 창피해서 견딜수가 없다. 이 밉고 또 미운 놈들아.' 마음 속으로 앙심을 다지면서 죄다 뽑아 던졌습니다.
피도 마찬가지지요. 지난 해 가을 논에 나가보니 다른 논에는 피가 하나도 없는데 우리 논은 그야말로 피바다였습니다. 마을 어른마다 만나면 한마디씩 '피사리를 제대로 못하겠거든 고집 피우지 말고 제초제를 뿌릴 것이지'하고 혀를 차시는데, 그 때마다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오죽했으면 일손 도우러 멀리서 온 손님들에게 가위 하나씩 들려 벼모가지 위로 올라온 놈만 목을 싹둑싹둑 잘라 눈가림을 하려 들었을까요. 올해는 장성 한마음공동체에 가서 우렁이를10여만 원어치 사다가 논에 풀어 놓았더니 논에 풀이 보이지 않아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우렁이가 그 힘든 김매기를 대신해주니 이 아니 기쁠손가 하고요. 그런데 웬걸. 9월 초에 나가보니, 하느님 맙소사. 피들이 벼포기 사이로 고개를 치켜들고 팔을 벌려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3.1운동 때 파고다와 종로 거리를 메웠던 태극기 물결이 저랬을까 싶었습니다.
작년에야 뒤늦게 논농사를 시작한 데다 물정을 모르고 일머리가 잡히지 않아 그랬다는 변명이라도 있었지만 올해까지 피농사를 지으면 내년에는 농사 그렇게 지으려거든 논을 도로 내놓으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우렁이 믿기를 정말 우렁각시 믿듯이 한 게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구나.' 이래서 지난 9월 8일부터 11일까지 꼬박 사흘과 한나절을 피사리하느라고 허리 펼 틈이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어렸을 때 피사리하다가 "아이고, 허리야"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면 "아그덜한테는 허리가 없는 벱이여, 이놈아, 허리는 무신 놈의 허리. 아이고 잔등아 해야제"하고 우스개 반 꾸지람 반으로 나무라시던 집안 어른들 말씀이 다 머리에 떠오릅니다.
허리와 다리가 뻣뻣해지고 자고 나면 손등이 붓고 손가락을 오그리기 힘드는데, 이럴 줄 미리 알았다면 일찍이 논고랑 한 번 헤쳐가면서 뿌리가 얕을 때 피를 뽑아주었을 걸 하고 뒤늦게 후회해본들 무얼 하나요. 곁에서 피사리하던 유 군도 어지간히 힘드는지 "이 피가 벼로 바뀌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유?"하고 묻는데, "그려 그려, 우장춘 박사보다 유광식 박사가 더 유명해지겠구먼" 하고 눙치는 것으로 죽을 맛을 숨기는 수밖에요.
이래저래 한편으로는 풀과 화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풀과 전쟁을 치르다보면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한 철이 지나는 듯합니다.
(윤구병, 잡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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