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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근면... 생각해 보자, 누구를 위한 근면인지...!

독립출판 무간 2016. 8. 12. 08:48

느림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나도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으로 소개되면서 이런저런 강연과 세미나 등에 불려 다니게 되었다. 그런 곳에 가서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근면사상이 살아 숨쉬고, 게으름에 대해서는 거의 공포와 경멸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다 미치타로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일본에서 이렇게 한탄한 바 있다. "세상에는 어째서 근면의 사상만이 판을 치고 있고, 게으름의 이데올로기는 없는 것일까? 경제학만이 유행하고, 어째서 '게으름학'은 없는 것일까?"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우리들은 여전히 근면사상의 족쇄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닐까? 일본의 자살자 수는 알려진 것만도 하루 평균 100명에 가깝다. 전문가들은 그 열 배의 자살 미수자가 있다고 한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일이며, 자살자들 가운데는 직장을 잃은 남성들이 많다. 나는 여기서도 근면사상의 폐해를 본다.

영어의 '인더스트리industry'라는 말은 산업과 근면을 동시에 의미한다. 서양에서 산업주의와 근면사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 전통에 있어서 태만은 죽음에 값할 만한 7대죄 가운데 하나다. (기원 후 6세기에 교황 그레고리 1세가 모든 죄의 근원을 규정한 것으로, 이 죄를 짓다가 죽을 경우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선포했다. 분노, 시기, 탐식, 교만, 태만, 탐욕, 정욕이 7대 죄의 내용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이 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보면, 사람들은 일이나 노동 자체를 훌륭한 것으로 믿고 있는데, 실은 그것이야말로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친다. 일의 내용보다는 일한다는 것 자체만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취업률 저하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아이들은 부모가 매일 일하러 나가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경우도 드물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에는 생산물을 힘으로 빼앗은 지배자들이 생산자들에게 노동의 존엄성이라는 도덕을 강하게 심어줌으로써 착취구조를 은폐하려 했다고 러셀은 지적한다. 생산자들의 노동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지배자들의 생활을 지탱시킨다는 사실이, 노동의 존엄사상을 통해 가려진 것이다. 지배자들은 생산자들을 물리적으로 강제하거나 통제하는 것보다 이런 생각들을 주입시키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러셀은 그 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학기술이 진보하고, 지금은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폭 감소시켜주고 있어서, 적게 일하고도 안락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증대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불필요한 것을 잔뜩 생산하게 하고, 일부 노동자들을 과도하게 일하게 함으로써 결국 다시 실업자를 만들어 낸다. 기계를 도입해도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인원을 삭감하여 남은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높인다. 그런데 노동의 존엄이라는 심화가 유지되기어려울 때는 어떻게 할까? 그 때는 전쟁을 한다. (중략)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성능 폭약을 만들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폭발시킨다. 그 때 우리들 모습이란 불꽃놀이를 막 알기 시작한 어린애와 똑같다."

전쟁의 세기인 20세기. 수많은 전쟁을 관통하는 사상으로 생산주의와 경쟁주의가 있다. 러셀은 그것들이 노동의 존엄이라는 신화로 지탱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또 현대인은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이 다른 일의 목적이 되어야만 가치있게 여긴다며, 세기를 넘어 번성하고 있는 공리주의와 효율주의의 함정을 비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위한 것이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보는 사회. 그 곳에서 '지금'은 장래를 위해 투자되어야만 하는 시간이다. 또한 거기서의 여가란 내일의 노동력을 준비하는 재생산일 뿐이며, 소비는 경기를 향상시키고 GNP를 높이는 재투자다. 그리고 '자연'은 그것이 인간을 위해 소용이 닿을 때만 '자원'이라 간주한다.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서 벗어난 일은 무가치하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쉬는 것과 노는 것은 그 자체로는 시간의 낭비일 뿐이다. 노동력의 재생산이나 오락산업의 번영을 위한 것일 때라야 비로소 가치가 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은 용서받기 힘든 일. 그냥 걷기 위해서 걷는다거나 그저 빈둥거리고 싶다거나 또는 그저 멍하니 경치를 바라보는 일은 게으름뱅이나 하는 짓이다. 그저 살아가고 살아있으니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도무지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눈 또다른 삶,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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