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슬로라이프 : 돈과 시간, 자유이자 감옥! 본문
우리는 커다란 고민거리를 안고 있다. 여기서 우리란 이른바 선진국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고민이란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거야 뭐, '앞서 가는' 나라, '앞서 가는' 도시에서 산다는 특권을 누리기 위한 대가라 여기며,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아왔다. 오염된 물과 공기, 소음, 복잡함과 마찬가지로 바쁨 또한 도시 생활에는 늘 따르게 마련이 문제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시간이 없다'는 것이 자신의 높은 가치를 증명이라도 해 준다는 듯, 자랑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제 거꾸로 바쁘지 않은 자신은 남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고, 오히려 '시간이 있는' 상태를 두려워하게 된다.
'여백 증후군'이라는 병이 있다. 자신의 다이어리에 빼곡히 일정이 적혀 있지 않으면 그 여백으로부터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서 불안해서 못 견디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증후군'도 있을 법하다. 다이어리에 여백이 없을 정도로 바쁜 사람이 정작 아무 일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이 일 저 일 옮겨 다니며, '이러고 있으면 안 돼'라는 생각에 시달리는 것이다. 바쁠수록 그 사람의 사회적 가치는 높아진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가치가 자신의 사회적 가치에 합당할 만큼 높지 않다는 것이 이제 그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는 현대인의 시간을 둘러싼 불행을 그린 우화다. '어른들은 시간 은행에 시간을 맡기면 그것이 몇 배가 되어 돌아온다'는 정체불명의 회색빛 남자들의 말에 속아 엄청나게 바빠지고 일에 짓눌려서 가족도 친구도 돌아보지 않게 된다.
그러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어리석은 일이라 여기던 아이들도 마침내는 '어린이의 집'이라는 이름의 교정 시설에 수용되고 아이다움을 잃어버리면서 점차 '어른스럽게' 되어 간다. '놀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일로 취급된다. 슬프게도 그러한 모습은 바로 너무 바쁘게 일과 시험 공부에 쫓겨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인의 모습 그대로다.
어느 날 마을에 나타난,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모모라는 여자아이만이 그 회색빛 남자들의 정체를 알아내고 도둑맞은 시간을 되찾기 위해 대활약을 펼친다. 모모의 눈에만 보이는 그 회색빛 남자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욕심이 낳은 환영일 것이다.
시간에 관해 사색을 거듭한 엔데가 만년에 화폐의 문제에 몰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엇이든 사고 팔 수 있는 돈이라는 거대한 자유를 손에 넣은 우리 인간은 동시에 그 돈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쓸 수 있는, 때로는 잘라 팔 수도 있는 나만의 시간이라는 매혹적인 자유를 손에 넣은 인간은 시간의 폭군 앞에 엎드리는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다.
우리 등 뒤에선 악마가 버티고 있으면서 언제나 '이러고 있으면 안 돼'라고 속삭인다. 혹은 틈새로 파고드는 바람이 되어 '더 바삐 움직여'라며 목덜미를 쓸어 준다.
우리는 모모가 필요하다. 우리가 이제까지 입버릇처럼 말해 온 풍요로움, 편리함, 효율성과 같은 말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모모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있지 않을까?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돈도 되지 않는, 그저 흥겹고 즐겁기만 한 놀이의 시간을 아직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모는 그의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분명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모모> 속에 들어 있는 또 하나의 힌트. 그것은 모모를 시간의 나라로 안내하는 카시오페아라는 이름의 거북이다. 앞으로 나가려고 하면 뒷걸음질치고, 서둘러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뒤로 천천히 가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거꾸로 된 세계에서는 그러한 역설의 지혜야말로 커다란 의지가 되어 줄 것이다.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는 또다른 삶,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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