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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놀기... 헛되기 때문에 비로소 충실해지는 것!

독립출판 무간 2016. 8. 11. 19:46

요즘 일본의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드는 생각은 좀처럼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옛날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밖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이제는 거의 볼 수가 없다. 모두 집 안에서 놀고 있는 탓일까, 아니면 노는 일 자체가 줄어든 것일까?

 

<놀이와 일본인>이라는 책에서 다다 미치타로는 이렇게 말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벌판에서 천진스레 뛰어 노는 아이들을 가졌다. 참새떼들이 제멋대로 날아다니다 무리 지어 날아오르는 것처럼, 그들은 마음대로 무리를 지어 놀다가 일제히 달아난다. 그러한 뒷모습은 우리에게 무언가 말해 주지 않는가? 실제로 노는 아이들의 소리는 우리의 영혼까지도 뒤흔들어 놓는다.

 

1970년대에 다다가 이 글을 썼을 때, 그의 머리 속에는 아마도 12세기 후반의 노래집 <료진히쇼>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노는 아이들 소리 들으면

내 몸까지도 흔들리네

놀려고 태어난 게지.

까불며 새롱대러 세상에 난 게야

아이들 노는 소리 들려 오면

내 몸까지 절로 흔들려 오네

 

1970년대까지도 느낄 수 있었던 800년 전 감각은 그로부터 20~3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날 우리는 '벌판에서 천진스레 뛰어 노는 아이들을 가졌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지금도 우리는 뛰어 노는 아이들을 가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지금도 우리는 뛰어 노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다는, 어린아이들이 금방 친해져 함께 놀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의 아이들과도 꽤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유희의 기분이 흘러 넘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엇을 하고 노느냐'의 그 '무엇'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개개의 놀이를 샘솟게 하는 그 원천적인 놀이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전화 통화가 길고 쇼핑 중에 우연히 만난 친구와도 이런저런 이야기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그 내부로부터 샘솟아 오르는 유희의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길에 서서 나누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아마 잡담으로, 내용 자체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소소한 이야기일 것이다. 다다의 말처럼, 문제는 대화의 내용이 아닌 것이다.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특별한 목적 없이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는 즐거움. 여기에 바로 놀이의 원형이 담겨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 혹은 함께 있는다. 이것이 '사회'의 원형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원형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무엇을 하든 자유이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자유이다. 그 명확히 잘라 말할 수 없는 미분의 상태, 그 곳에 바로 우리들 놀이의 원시적인 혹은 기본적인 모습이 드러나 있다고 보인다.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일'에서만큼은 아이들을 당해 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바로 놀이기 때문이다. 놀이는 바로 일상의 현실 논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합목적성으로부터 자유롭기에 빛나는 것이다. '헛되기' 때문에 비로소 충실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조차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든가 '좀더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늘 주문한다. 즉, 이런 것이다. 경제성장과 효율성이 우선시되는 사회에서는 이렇다할 경제효과도 없고 돈이나 생산성, GDP로도 연결되지 않는 활동은 2차적, 3차적인 것으로 폄하되다가 결국에는 배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료진히쇼>의 그 노래에서처럼 어찌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 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는 또다른 삶,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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