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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익숙한 오늘 속에서 무한한 즐거움 찾기

독립출판 무간 2016. 8. 10. 14:16

현대사회는 수많은 부정들 위에 세워저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손꼽을 만한 것이 '지금의 자신'에 대한 부정이다. 교육 현장에서도 그렇고, 매스미디어에서도 '지금의 나는 별로 좋지 않다(어쨌거나 충분하지 않다)'는 쪽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그런 메시지는 대개 이런 식이다. "그대는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끝장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으며, 더 나은 누군가가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런 식으로 '지금 여기'는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넘어서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내일은 반드시 오늘보다 나아져야만 한다. 특히 일본에서는 '분발하라'는 말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쓰이고 있는데, 그 말도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며 그것을 뛰어넘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대인의 '새로움'을 좋아하는 성향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쉼 없이 강조한다. 호기심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에너지가 되고 우리를 활기차게 해 줄 것이라고 속삭인다. 그것은 동시에 소비 의욕을 부추기고 상품 경제를 활성화하고 경제성장을 지탱하는 구조가 된다. 하지만 그 '새로운 것'을 얻었을 때의 흥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아니, 손에 넣은 그 순간 새로움은 급속히 빛을 잃고, 이미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새로움이 친밀감을 대체하게 된다. 새로움의 생명력은 너무 짧다. 그리고 그 때가 지나면 우리들은 그 다음에 '새로운 것'을 또 찾아 나서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친밀감 속에 있는 아름다움이라든가 따사로움, 평온함과 같은 가치는 거의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다. 친밀감은 진부하고 평범하고 너무나 흔해 빠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농민 작가인 웬델 베리에 따르면 친밀감이라는 '앎의 양식'은 영원토록 새롭다고 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한번 걸어 보라, 그것은 아무리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우리에게 무한한 놀라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한다.

 

베리에 따르면 우리들의 앎에는 '새로움에 대한 추구와 친밀감에 대한 흥미'가 함께 존재한다. 전자가 '지금 무엇이 어디에 있지 않을까?'에 흥미를 갖고, 아직 보지 않은 장소를 발견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인데 반해, 후자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을까?'에 흥미를 갖고, 지금 있는 장소를 알려고 한다. 우리의 과학기술 문명 시대는 이 가운데 첫째의 앎에만 편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베리는 묻는다.

 

"생명이 있는 한 친밀감에 기초한 앎의 넓이와 깊이에는 한계가 없다. 경험의 무한함은 새로움 속이 아닌 친밀감 속에 존재한다."

 

60년대 일본에서 유행한 노래 중에 <내일이 있으니>라는 곡이 있다. 이 고도경제성장의 테마 송이 최근 또 리바이벌되어 히트한 데 대해 좀 어리둥절한 기분이다. 아직도 우리는 경제성장의 내일이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이 '내일이 있다'는 생각은 중남미의 '내일주의'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중남미 사람들이 '그것은 내일이 있지'라고 할 때, 그들은 '지금 여기'를 충분히 즐기고 음미하며 살기 위해서 당장의 이들을 내일로 넘기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내일주의'는 사실 오늘을 무엇보다 소중히 하는 '오늘주의'인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있으니>라는 노래는 '지금 여기'를 소홀히 여기면서 '오늘은 별 볼일 없지만 내일이야말로'라는 식으로 '오늘'쯤은 뛰어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산다'는 것은 '지금만 좋으면 된다'라는 생각과는 다르다. '찰나주의'는 내일을 희생물로 삼더라도 오로지 지금만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그것은 얼른 보기에는 지금을 사는 일에 대한 강렬한 표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밖에 사랑을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가능성으로 가득 찬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일이 있으니'와 동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여기'가 없으면 내일도 없고, 내일이 있기에 바로 '지금 여기'도 있다. '지금 여기'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내일의 자신도 존재한다. 내일의 자기 자신을 포용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때만이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도 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모험이란 같은 얼굴 속에서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내는 일이다(알베르트 자코메티)."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는 또다른 삶, 슬로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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