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도덕경 감산주 제35장,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도와 같은 큰 형상을 붙잡아라" 본문
35장
執大象, 天下往. 往而不害, 安, 平, 泰. 樂與餌, 過客止, 道之出口, 淡乎其無味.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可旣.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도道와 같은) 큰 형상을 붙잡아라, 천하가 (저절로 그러하게) 다스려지게 된다. (백성이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되는데, 그러므로 해롭지 않게 되고, 편안하게 되며, 평화롭게 되고, 어우러지게 된다. (일부러 일삼은) 음악과 음식은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지만, 도道가 뱉는 말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담백하여 그 맛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살펴보더라도 (또렷하게) 살펴보기에 부족하다. 그것을 들어보더라도 (또렷하게) 들어보기에 부족하다. (그러나) 그것을 써보더라도 모두 다 쓰기에 부족하다.
此明前章未盡之意也.
이 장은 앞 장에서 마저 밝히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無象, 謂之大象. 大象無形, 而能入衆形, 有形者無不歸. 聖人執無我以禦天下, 故天下莫不往, 以其與物同體也. 萬物恃之而生, 故無往而不利, 故云: “往而不害.”
(일부러 일삼은) 형상됨(을 가짐)이 없음, 그것을 일컬어 (도道와 같은) “큰 형상”이라 한다. (도道와 같은) “큰 형상”은 (일부러 일삼은) 형상됨(을 가짐)이 없는데, 따라서 모든 형상됨과 더불어 어우러지고 아우러지게 되며, (따라서 모든) 형상됨을 가지는 바가 되돌아오지 않음이 없게 된다. (따라서) “성인”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음이 없음을 “붙잡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데, 따라서 “천하”가 (모두 그 저절로 그러한 ‘본성性’을 말미암아) “살아가지(往; 生)” 못함이 없게 되고, 따라서 “성인”과 더불어 (모든) 백성이 (그 저절로 그러한) 본질(體; ‘본성性’)을 같이하지 못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백성이 (그 저절로 그러한 ‘본질’) 그것을 의지해서 살아가게 되는데, 다시 말하면 (모든 백성이 그 저절로 그러한 ‘본성’ 그것을 말미암아) “살아가게 되는데”, 따라서 (모든 백성이) 이롭지 않음이 없게 되는데, 따라서 (『노자』는) 일컬은 것이다. “往而不害.”
然忘於物者, 物亦忘之, 故物各得其所而無不安. 物物相忘而無競, 故無不平. 暖然如春, 故無不泰. 此所謂萬物賓, 而天地合, 人民和, 故聖人終不爲大, 而能成其大也.
다시 말하면, (비유컨대) 사물(物; 象·形·我)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사람(者; 성인) 은 사물(物 ; 백성) 또한 그 사람을 잊어버리게 되는데, 따라서 사물(物; 백성)이 모두 그 (저절로 그러한) 바(所; 본성)를 말미암아 살아가게 되고, 따라서 “편안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 사물과 사물이 더불어 잊어버리게 되고, 따라서 (더불어) 다투는 바가 없게 되는데, 따라서 (더불어) “평화롭지” 않음이 없게 된다. (사물과 사물이 더불어) 따뜻하게 되고, 따라서 봄날과 같게 되는데, 따라서 (더불어) “치우치지(泰; 入)” 않음이 없게 된다. 이것이 이른 바 “백성이 (저절로) 모여들게 되고, 하늘과 땅이 (저절로) 아우러지게 되며, 백성이 (저절로) 어우러지게 되는 것인데(32장)”, 따라서 “성인은 끝끝내 그 ‘크게 됨’을 일삼지 않지만, 그 ‘크게 됨’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35장).”
前云: “道之所以常者, 以其淡然無味, 無可欲也.” 若夫樂之於耳, 餌之於口, 皆有味而可欲者. 若張之於途, 雖過客亦止之. 然雖暫止, 而不能久留, 以其用之有盡, 蓋不常也. 若夫道之出口, 則淡乎無味, 不若餌之可欲.
앞 (35장의 풀이)에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도道의 ‘본질’은) 도道가 (만물을 참되게 하고, 만물과 더불어 있고, 더불어 한 채)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게 되는 까닭이 되는데, (다시 말하면, 비유컨대, 도道는 그 ‘본질’) 그것으로써 (만물을) ‘담백하고’, 따라서 (어떠한) ‘맛도 없(음에 이르)게’ 하는 데 있어서, (따라서 모름지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모름지기 (그) 귀로써 (“음악”) 그것을 듣는 것을 (일부러 일삼아) 즐거워하는 일, (그) “입”으로써 (“음식”) 그것을 맛보는 (것을 (일부러 일삼아 즐거워하는) 일, (그것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은) “맛”을 가지는 일이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일이다. (따라서) 만약, (일부러 일삼은 “음악”과 “음식”) 그것들을 길가에서 펼치게 되면, 모름지기 “지나가던 사람들”이 또한 그것들 앞에서 (걸음을 일부러 일삼아) “멈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름지기 (그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할 수는 있지만, 오래 머물게 할 수는 없는데, 그것들로써 (그 걸음을 오래 머물게 함) 그것을 일삼는 일은 한계를 가지기 때문인데, (따라서) 모름지기 언제 어디서나 그러하게 되지 않는 것이다.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不若樂之可欲. 此可名於小. 然而其體眞常, 故用之不可旣. 旣, 盡也. 故可名爲大. 此大象之譬, 以譬人君苟能執大象以禦天下, 恬淡無爲. 雖無聲色以悅天下之耳目, 無貨利以悅天下之心志. 而天下歸往樂推而不厭. 此所謂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也. 如此用之, 豈有盡耶?
(그런데 도道는 모름지기 그 형상) “그것을 살펴보더라도 (또렷하게) 살펴보기에 부족하고, (그 음성) 그것을 들어보더라도 (또렷하게) 들어보기에 부족한데”,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일삼은 “음악”이나 “음식” 듣거나 맛보는 일) 그것을 “즐기거나” 일부러 일삼는 경우와 같지 않다. 이것이 (『노자』가 앞 장에서 일컬은) “可名於小”(의 이유)이다. 그러나 (도道의) 그 ‘본질體’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만물을) 참되게 하고, (만물과 더불어 있고 더불어 한 채)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데, 따라서 (『노자』는 일컬은 것이다) “用之不可旣.” “旣”는 다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큼’이라 이름 지어 붙일 수 있는 것이다(34장).” 이것은 “큰 형상”에 대한 비유이자, 임금이 진실로 “큰 형상을 붙잡음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모습, (다시 말하면, 임금이 진실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마음을 텅 비운 채) 차분하고, “(어떠한 맛도 없이) 담백하며”,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그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천하”를 다스리)는 모습에 대한 비유이다. (그러한 임금은) 모름지기 (일부러 일삼은 다섯 가지) “소리나 색깔(音, 色: 12장)”이 없더라도 “천하”의 귀와 눈을 기쁘게 하고, (일부러 일삼은) “재화(貨: 3장)”나 이로움이 없더라도 “천하”의 마음과 뜻을 기쁘게 한다. 따라서 “천하”가 (그러한 임금에게) 되돌아가게 되고, 모여들게 되며, (그러한 임금을) 받드는 것을 즐기고, 그렇게 하기를 꺼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 바 (『노자』가 앞 34장에서 일컬은) “萬物歸焉而不爲主, 可名爲大”(의 뜻)이다. 이와 같은데, “그것을 쓰는” 데 있어서, 어찌 “다함”을 가지게 되겠는가?
'감산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덕경 감산주 제37장, "도는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데,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데, 그러므로 일삼지 못하는 바가 없다" (0) | 2019.08.02 |
---|---|
도덕경 감산주 36장. "바야흐로, 구부리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펴주어라" (0) | 2019.07.29 |
도덕경 감산주 34장 "만물과 더불어 어우러지고 아우러질 만큼 그 트임이 큰 도는 텅 비어 있다" (0) | 2019.07.11 |
도덕경 감산주 33장 : 스스로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이다 (0) | 2019.06.29 |
도덕경 감산주 32장 : 도道는 언제 어디서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는 본질이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데... (0) | 2019.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