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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감산주 33장 : 스스로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이다 본문

감산산책

도덕경 감산주 33장 : 스스로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이다

독립출판 무간 2019. 6. 29. 11:43



33

 

 

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知足者富. 强行者有志. 不失其所者久. 死而不亡者壽.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은 밝은 사람이다. (일부러 일삼아 힘으로써)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은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스스로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자신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다. (저절로 그러한 본성대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넉넉해진다.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도와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는 덕스러움으로써) 일부러 일삼는 사람은 뜻하는 바를 가지게 된다.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망가뜨리지 않는 사람은 오래 가게 된다. 죽을 때까지 (그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은 (타고난) 대로 살게 된다.

 

 

此因上言侯王當守道無爲, 故此敎以守之之要也.

이 장은 앞 장의 제후와 임금은 마땅히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본질로서의) (그 작용인)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음(無爲; 덕스러움)을 지켜야 한다는 일컬음을 말미암는데, 따라서 이 장은 (와 덕스러움) 그것들을 지키는 요체(; 내용과 방법)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知人者, 謂能察賢愚, 辨是非, 司黜陟, 明賞罰, 指瑕摘疵, 皆謂之智. 但明於責人者, 必昧於責己. 然雖明於知人爲智, 不若自知者明也.

(“知人者智. 自知者明에서) “다른 사람을 안다는 말은 이른 바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잘 가린다, (다른 사람이 한 말과 행위의) 옳음과 그름을 잘 나눈다, (다른 사람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잘 가리고 나누어 능력 없는 사람을 잘) 끌어내리고 (능력 있는 사람을 잘) 끌어올린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나 행위에 대해서) 을 내려야 하는지 벌을 내려야 하는지 () 따진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나 행위의) 티를 () 찾아내고 흠을 () 골라낸다는 뜻으로서, () 모두를 일컬어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는) “지혜로움이라 한다. (그런데) 모름지기 다른 사람을 질책하는 데 밝은사람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질책하는 데 어둡다. 따라서 모름지기 다른 사람을 (분별하여) 으로써 일부러 일삼아진 지혜로움에서 생겨난 밝음스스로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아는 사람이 가진 밝음만 같지 못한 것이다.

 

 

老子謂孔子曰: “聰明深察而近於死者, 好議者也. 博辯宏大而危其身者, 好發人之惡也. 去子之恭驕與智能, 則近之矣.” 謂是故也.

(따라서) 노자는 이른 바 공자孔子(BC.551~479)에게 일컬은 것이다. “(그대는) 귀가 (지나치게) 밝고, 눈이 (지나치게) 밝아서, (지나치게) 깊게 듣고, (지나치게) 넓게 살피는 사람, 따라서 죽음에 가까이 가는 사람,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는) 이야기를 자주 하고, 많이 하고, 크게 하는 (사람), 따라서 그 몸을 바쁘고 서두르는 사람,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바를 들추어내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멀리하라, 그대의 (지나친) 공손함과 (그에 따른) 교만함을, 더불어 (멀리하라,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는) ‘지혜로움(그에 따른) ‘재주 있음, 따라서 (그대는 도) 그것에 가까이 가게 될 것이다(사시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47).” 이른 바 이것이 (노자知人者智라 일컬은) 까닭이다.

 

 

莊子云: “所謂見見者, 非謂見彼也, 自見而已矣. 所謂聞聞者, 非謂聞彼也, 自聞而已矣.” 能自見自聞, 是所謂: “自知者明.

(따라서) 장자(또한) 일컬은 것이다. “이른 바 (내가 말하는, 밝은) 눈으로 (넓게 잘) 살핀다는 말은 이른 바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다른 사람(의 모습)(넓게 잘) 살핀다는 뜻이 아닌데, 스스로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넓게 잘) 살핀다는 뜻일 따름이다. (또한) 이른 바 (내가 말하는, 밝은) 귀로 (깊게 잘) 듣는다는 말은 이른 바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다른 사람(의 소리)(깊게 잘) 듣는다는 뜻이 아닌데, 스스로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소리를 깊게 잘) 듣는다는 뜻일 따름이다(吾所謂聰者, 非謂其聞彼也, 自聞而已矣. 吾所謂明者, 非謂其見彼也, 自見而已矣: 장자, 병무騈拇).” (밝은 눈으로) ‘스스로’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일삼지 않은 채,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모습을 넓게 잘) ‘살피고’, (밝은 귀로) ‘스스로’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일삼지 않은 채,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소리를 깊게 잘) ‘들음’(으로써, 얻게 되는 지혜로움’), 이것이 이른 바 스스로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 가진 밝음인 것이다.

 

 

世之力足以勝人者, 雖云有力. 但强梁者必遇其敵, 不若自勝者强. 然欲之伐性, 殆非敵國可比也. 力能克而自勝之, 可謂眞强. 如傳所云: “和而不流, 中立而不倚者.” 所謂 自强不息者也.”

세상 사람들은 () “으로써 충분히 다른 사람을 이기는 사람”, (그러한 사람을) 모름지기 힘을 가진 사람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모름지기 () 강함을 일부러 일삼는 사람은 반드시 (언제나) 그 적수를 만나게 되는데, (따라서 언제나 이기는 사람일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언제나 힘을 가진 사람일 수 없게 되는데, 따라서) “스스로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일삼지 않은 채,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아, 자신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이기는 사람이 가진 강함만 같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 본성을 공격하게 하는 일,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일인데, 적국敵國(이 자기 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자기 자신이 위태롭게 되는 일)에 비교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모름지기 자기 자신이) “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이길 수 있더라도, “스스로” (다시 말하면, 일부러 일삼지 않은 채,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자신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 그것을 이기는사람이 진실로 강한 사람이라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스스로 이기는사람은) 중용中庸이 일컬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어우러지고 아우러지는데, 그러나 (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가운데 선 채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사람과 같다. 이른 바, “스스로 (자신의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생겨나지 않도록 마음을) 강하게 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주역周易, 건괘乾卦).”

 

 

凡貪得無厭者, 必心不足. 苟不知足, 雖尊爲天子, 必務厚斂以殃民. 雖貴爲侯王, 必務强兵而富國. 卽縱適其欲, 亦將憂而不足, 故雖富不富. 苟自之足, 則鷦鷯偃鼠, 藜藿不糝, 抑將樂而有餘, 知足者富.

모름지기, () 얻음을 일부러 일삼아 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한) 꺼림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 마음이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게 된다. (그런데 그 마음이) 진실로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게 되면, 모름지기 (그 몸이) 천자天子로 받들어지고, 일삼아지게 되면, 반드시 두텁게 세금을 거두어 들임으로써,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게 된다. 모름지기, 제후와 임금으로 높여지고, 일삼아지게 되면, 반드시 무력을 일부러 일삼음으로써 나라를 넉넉하게 하는 데 힘쓰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마침내 그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충족되지만, 또한 바야흐로 (다른 것을 얻기 위해) 근심하게 되고, 따라서 (언제나) 만족하지 못하게 되는데, 다시 말하면 모름지기 (마침내) 넉넉하게 되지만, (언제나) 넉넉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 마음이) 스스로 만족할 줄 알게 되면, (모름지기 비유컨대) 뱁새와 두더지가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명아주와 콩잎을 날것으로 먹듯이, (명아주와 콩잎으로) 나물죽을 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물리치게 되는데, 바야흐로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아 명아주와 콩잎을 날것으로) 즐기게 되고, 따라서 남는 바(; 저절로 그러한 본성의 명령대로 삶, 저절로 그러한 본성의 명령대로 죽음)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이 知足者富”(의 뜻)이다.



强志, 好過於人者, 未爲有志. 惟强行於道德者, 爲有志也.

(“强行者有志에서, ) “뜻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거나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따라서 그) “뜻하는 바를 가짐” (그것)을 일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오직,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저절로 그러한 본성을 말미암는) 덕스러움으로써, (그것을) 일부러 일삼는 사람만이 () “뜻하는 바를 가짐” (그것을) 일삼게 되는 것이다.

 

 

所者, 如北辰居其所之所. 又故有之義, 蓋言其性也. 孟子曰: “性者故而已矣.” 世人貪欲勞形, 冀立久長之業. 殊不知戕生傷性, 旋踵而滅忘, 誰能久哉? 惟抱道凝神, 而復於性眞者, 德光終古, 澤流無窮, 此所謂 不失其所者久.

(“不失其所者久에서) “북두칠성이 머무는 바(北辰居其所: 논어論語, 위정爲政)”라고 할 때의 와 뜻이 같다. 또한 옛날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함께 운동하고 어디서나 함께) 존재하는 바라는 뜻으로서, 모름지기 그 본성을 일컫는다. (따라서) 맹자孟子는 일컬은 것이다. “본성은 옛날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함께 운동하고 어디서나 함께) 존재하는 바일 따름이다(맹자, 이루하離婁下).”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하루를 불지 못하는 회오리바람이나 한나절을 내리지 못하는 소나기와 같이, 오래 가지 못하는) 형상(; things·event)을 일부러 일삼아 구하고, 일부러 일삼아 구하고자 하며, 구하기 위해서 일부러 일삼아 애쓰는 한편, (불교의 표현을 빌리면, 하늘이나 땅과 같이) “오래 가는(長久: 7)” ‘(; ·)’을 세우기를 (일부러 일삼아) 바란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것들이) 삶을 망가뜨리는 바들이자, 본성을 어그러뜨리는 바들임을 알지 못하는 한편, (그것들이) 되돌이켜야 할 바들이자, 되돌아가야 할 바들이고, 끊어내야 할 바들이자, 잊어버려야 할 바들임을 알지 못하는데, (그런데 어느) 누가 오래 갈수 있겠는가? (따라서) 오직,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를 품고, (그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는) 신령스러움(; )과 서로 얼키고 설키며, () 본성과 참됨(; )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만이 () 덕스러움이 빛나게 되고, 끝끝내 오래 가게 되며”, (비유컨대, ) 연못(; )의 흐름(; 長久)이 끝이 없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 바 不失其所者久”(의 뜻)이다.

 

 

世人嗜味養生, 以希壽考, 殊不知厚味腐腸, 氣憊速死, 誰見其壽哉? 惟養性復眞, 形化而性常存, 入於不死不生, 此所謂 死而不亡者壽.

세상 사람들은 (모두 일부러 일삼아 먹을거리를) 즐기고, 맛보며, (그것들로써) 삶을 기르는데, (다시 말하면, 그것들로써 그) “(; )”(타고난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라는데,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모름지기 (그것들이 그) 입맛을 (일부러 일삼아) 두텁게 하고, (따라서 그) 창자를 썩게 하며, (따라서 그) ‘가 고달파지게 되고, (따라서 그) “죽음을 재촉하게 됨을 알지 못하는데, (그런데 어느) 누가 그 “(타고난 그대로 이어지는) 을 살펴볼 수 있겠는가? (따라서) 모름지기, () 본성을 기르고, (따라서 그) 참됨(; )으로 되돌아가야 하는데, (따라서 그) 형상이 (그 본성이나 참됨) 서로 어우러지게 되고 아우러지게 되며, 따라서 (그 참됨이나) 본성이 언제 어디서나 (그 형상과 함께 운동하게 되고 함께)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그 타고난 그대로) 살게 되고 죽지 않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 바 死而不亡者壽”(의 뜻)이다.



老子意謂道大無垠, 人欲守之, 莫知其向往. 苟能知斯數者, 去彼取此, 可以入道矣. 侯王知此, 果能自足自勝, 知足强行. 適足以全性復眞, 將與天地終窮. 不止賓萬物, 調人民而已. 又豈肯以蝸角相爭, 以至戕生傷性者哉?

노자의 뜻은 이른 바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는)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본성이나 참됨과 서로 어우러지고 아우러질 만큼 그 트임이) 크고, 끝이 없지만, (모름지기)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려 하더라도, 그 향해야 하거나 이르러야 할 데(向往; 내용·방법)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진실로 다음의 이치를 알아차리게 된다면,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말미암는) 저것을 멀리하게 되고,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는) 이것을 취하게 되며, 따라서 () 를 알아차리고 실천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제후와 임금이 (가 그러함)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따라서 스스로 만족하게 되고”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스스로 이기게 되며”, (스스로) “만족할 줄 알게 되고” (따라서 그러한 도그것을 말미암아 그 뜻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아 실천하게 된다.” (따라서 도의 그러함 그것을) 충족시킴에 이르게 됨으로써, () 본성을 온전히 지키게 되고, (따라서 그) 참됨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 (따라서) 바야흐로 하늘과 땅과 (언제 어디서나) 더불어 (운동하고 존재함을) 끝까지 다하게 된다. (따라서) 백성이 (스스로) 모여들기를 그치지 않게 되고, (따라서) 백성이 (그 다스림의 내용과 방법에) 서로 어우러지게 되고 아우르지게 될 따름이다. 그런데 어찌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말미암는 저것을) 옳게 여김으로써 (비유컨대) 고동과 같이 뿔로 서로 다투고, 따라서 () 삶을 망가뜨리며, () 본성을 어그러뜨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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