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도덕경 감산주 28장 본문

감산산책

도덕경 감산주 28장

독립출판 무간 2019. 5. 11. 19:37



28

 

 

知其雄, 守其雌, 爲天下溪. 爲天下溪, 常德不離, 復歸於嬰兒.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 爲天下式, 常德不忒, 復歸於無極. 知其榮, 守其辱, 爲天下谷. 爲天下谷, 常德乃足, 復歸於樸. 樸散則爲器. 聖人用之則爲官長. 故大制, 不割.

수컷됨을 알아차리고, 암컷됨을 지켜라, 천하의 시내가 되게 된다. 천하의 시내가 되면, 언제 어디서나 덕스러움에서 벗어나지 않게 되고, 어린아이 같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밝음을 알아차리고, 어둠을 지켜라, 천하의 모범이 되게 된다. 천하의 모범이 되면, 언제 어디서나 덕스러움에서 어긋나지 않게 되고, (두루 나아가) 끝점에 이르지 못함이 없음(無極; ··自然)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영화롭게 됨을 알아차리고, 욕되게 됨을 지켜라, 천하의 골짜기가 되게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고 함께 하는 덕스러움이 이내 서로 어우러지게 되고 아우러지게 되며, 투박하고 소박함(; ··自然)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비유컨대 성인은) 통나무가 새겨지고 깎여짐 (그것을 일삼음)에 있어서, 이내 (투박하고 소박함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하) 그것을 일삼음에 있어서, 이내 (두루 나아가 끝점에 이르지 못함이 없음 그것을) 모범으로 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인의) 큰 다스림은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此承上章行道之妙, 而言聖人不以知道爲難, 而以守道爲要妙也. 故德云: “學道, 悟之爲難, 旣悟, 守之爲難.” 然行道之妙, 實出於守道之要耳.

이 장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는) 실천함오묘함에 대해서 일컬은 앞 장을 잇는데, 따라서 이른 바 성인은 도알아차림(그 실천의) 어려움으로 삼지 않고, 지킴(그 실천의) “오묘함의 요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덕담에서 를 배움에 있어서,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그것을 깨닫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지만, 이미 (그것을) 깨달았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된다라고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를 실천함의 오묘함은 진실로 도지키는” “요체에서 생겨나는 것일 따름이다.

 

 

蓋此中知字, 卽悟也. 知雄守雌者, 物無與敵謂之雄, 柔伏處下謂之雌. , 乃窊下之地, 衆水所歸之處也. 嬰兒者, 柔和之至也. 前云: “專氣致柔, 能如嬰兒乎.” 然氣雖勝物, 物有以敵之. 而道超萬物, 物無與敵者. 故謂之雄. 聖人氣與道合, 心超物表. 無物與敵, 而能順物委蛇, 與時俱化, 不與物競, 故曰: “知其雄, 守其雌.”

모름지기, 이 장에 나오는 는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知其雄, 守其雌에서, 더불어 맞섬이 없는 사물(; things·event), 그것을 일컬어 이라 하고, 부드럽고 아래로 엎드리며 아래에 머무는 사물, 그것을 일컬어 라고 한다. (“爲天下溪에서) “는 곧 움푹 패이고 아래로 꺼진 땅으로서, 모든 물줄기가 모여드는 바를 뜻한다. (“復歸於嬰兒에서) “嬰兒는 부드러움과 어우러지고 아우러짐이 지극한 바를 뜻한다. (노자) (10)에서 일컬었다. “專氣致柔, 能如嬰兒乎.” 그런데 (성리학에서 말하는) ‘가 모름지기 사물을 (말미암지 않은 채, 사물을) 물리치게 되면, 그것에 맞서는 사물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도(만물을 말미암은 채) 만물(萬物; things·event)을 벗어나는데, (따라서) 더불어 맞서는 사물이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도의 본질) 그것을 일컬어 이라 한다. (그런데) 성인의 (그러한 본질의) 와 더불어 어우러지고 아우러지며, (성인의) 마음은 (백성과 그 삶의 모습을 말미암은 채) 백성(; things)(그 삶의) 모습(; event)을 벗어난다. (따라서) 더불어 맞서는 백성이 없게 되는데, 다시 말하면, (이른 바 성인은) 백성을 말미암고 (백성을) 따르며, 그 삶의 모습(; )과 더불어 어우러지고 아우러지며, 백성과 더불어 다투지 않는데, 따라서 (노자) 일컬은 것이다. “知其雄, 守其雌.”

 

 

由守其雌, 故衆德交歸, 如水之就下, 故爲天下溪也. 由乎處下如溪, 故但受而不拒, 應而不藏, 流潤而不竭, 故曰: “常德不離.”

그 암컷을 지킴을 말미암아, 따라서 모든 덕스러움이 서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비유컨대 모든) 물줄기가 (움푹 패이고) 아래로 꺼진 곳으로 모여들게 되는 것과 같은데, 따라서 천하의 계곡이 되게 되는 것이다.” (부드럽고 아래로 엎드리며) 아래에 머묾을 말미암아, (따라서 그) “시내와 같아지게 되는데, 따라서 무릇 (그 흘러듦을) 받아들이고, 따라서 (그것을) 물리치지않으며, (그 흘러감을) 따르고, 따라서 (그것을) 가로막지않으며, (그렇게) 흘러가서 (만물을) 적셔주고, 따라서 (그것을) 마르지 않게 하는데, 따라서 (노자) 일컬은 것이다. “常德不離.”



以入物而物不知, 如嬰兒終日號而嗌不嗄, 和之至也. 以能勝物而不傷, 故曰: “復歸於嬰兒.”

(따라서 무릇) 만물 속으로 들어가더라도 만물이 (그 들어옴을) 알아채지 못하게 되는데, (비유컨대) “어린아이가 종일 울더라도 목이 쉬지 않게 되는 것(55)”과 같은데, (그와 같이 그) 어우러지고 아우러짐이 지극한 것이다. 따라서 (무릇) 만물을 물리치더라도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게 되는데, 따라서 (노자) 일컬은 것이다. “復歸於嬰兒.”

 

 

知白守黑者. , 謂昭然明白, 智無不知之意. , 昏悶無知之貌. , 謂法則. , 差謬也. 謂聖人智包天地, 明並日月, 而不自用其知. 所謂明白四達, 能無知乎. 故曰: “知其白, 守其黑.”

知其白, 守其黑에서, “은 이른 바 밝고 그러해서 () 밝음이 밝게 드러나는 모습인데, 앎에 밝다, ()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가 없다는 뜻이다. “(이른 바 어둡고 그러해서 그 어둠이 밝게 드러난다는 뜻인데, 그러한 모습은) 앎에 어두운, () 알아차리는 바가 없는 모습이다. “은 기준이 되고 모범이 된다는 말이다. “은 벗어나고 어긋난다는 말이다. (무릇, 성인은 그 밝음을 알아차리고, 그 어둠을 지키는데”) 이른 바 성인의 앎은 하늘과 땅을 어우르고, “밝음은 해(; 어둠을 아우르는 밝음)와 달(; 밝음을 어우르는 어둠)을 아우르는데, 그러나 (성인은) 스스로 그 앎을 일삼지 않는다. (따라서 앞의 10장에서 노자는 일컬었는데) 이른 바 明白四達, 能無知乎.” 따라서 (노자) 일컬은 것이다. “知其白, 守其黑.”



由其眞知而不用其知, 故無强知之過謬, 故可爲天下式. 然强知則有謬, 謬則有所不知. 旣有所不知, 則知不極矣. 今知旣無謬, 則知無不極, 故曰: “復歸於無極.”

(성인은) 그 참됨(; 본성, 본성의 명령,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이 알아차려짐을 말미암아, 따라서 그 앎을 일부러 일삼지 않는데, 따라서 () 앎을 일부러 일삼음을 말미암아 (그 참됨에서) 어긋남으로 흘러감이 없게 되고, 따라서 천하의 모범이 될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앎을 일부러 일삼게 되면, 어긋남을 가지게 되고, 어긋남을 가지게 되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무릇, 알아차리지 못하는 바를 가진다는 말은 곧 앎이 (두루 나아가 그) 끝점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앎이 무릇 어긋남이 없다는 말은 곧 앎이 (두루 나아가 그) 끝점에 이르지 못함이 없다는 뜻이 되는데, 따라서 (노자) 일컬은 것이다. “復歸於無極.”

 

 

知榮守辱者. , 乃光榮貴高. , 乃汙辱賤下. , 乃虛而能應者也. , 謂樸素, 乃木之未雕斲也. 謂聖人自知道光一世, 德貴人臣, 而不自有其德. 乃以汙辱賤下, 蒙恥含垢以守之. 所謂光而不耀, 仁常而不居者, 虛之至也. 故爲天下谷.

知其榮, 守其辱에서, “은 곧 빛나게 됨, 영화롭게 됨, 귀하게 여겨짐, 위로 받들어짐을 뜻한다. “은 곧 더럽게 여겨짐, 욕되게 됨, 천하게 여겨짐, 아래로 낮추어짐을 뜻한다. “()”은 곧 (자신의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텅 비운 채, (상대에) 응하는 바를 뜻한다. “은 투박한 바와 소박한 바를 일컫는데, (비유하면) 아직 새겨지거나 깎여지지 않은 나무이다. 이른 바, 성인은 (자신의) 가 한 세상을 빛나게 하고, (자신의) 덕스러움이 백성과 신하를 귀해지게 했음을 스스로 아는데, 그러나 (성인은) 스스로 그 공(; )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인은) 더럽게 되고, 욕되게 되며, 천하게 되고, 아래로 낮아지게 됨으로써, 부끄러움을 덮어쓰고, 티끌됨을 머금음으로써, 그것을 지킨다. 이른 바, (성인은 세상과 백성과 신하를) 빛나게 하지만 (그 공을 말미암아 스스로) 번쩍이지 않고, (그들의) ‘이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고 함께 하게 하지만, (그 공을 말미암아 그것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로서, (그 빛나게 됨, 영화롭게 됨, 귀하게 여겨짐, 위로 받들어짐에 대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텅 비움이 지극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인은) “천하의 계곡이 되게 되는 것이다.”

 

 

由其虛, 故常德乃足. 德自足於中, 則不緣飾於外, 故復歸於樸素也. 以虛而能應物, 故樸散則爲器.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텅 비움을 말미암아, 따라서 언제 어디서나 함께 있고 함께 하는 덕스러움이 어우러지고 아우러지게 된다.” () 덕스러움이 저절로 (그러하게) 어우러지고 아우러지는 가운데 머물게 되면, 바깥 (사물)에 대해서 얽히거나 설키지 않게 되고, (일부러 일삼아) 꾸미지 않게 되는데, 따라서 (비유컨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는 만물의 본성이자 본성의 명령이자 저절로 그러한 바인) “투박하고 소박함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인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이) 텅 비운 채, (저절로 그러한) 사물(; things·event)에 응하게 되는데, 따라서 (이른 바 비유컨대 성인은) “통나무가 새겨지고 깍여짐 (그것을 일삼음)에 있어서, 이내 (투박하고 소박함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聖人以此應運出世, 則可以官天地府萬物. 故能範圍天地而不過. 曲成萬物而不遺. 化行於世而無棄人棄物. 故曰: “大制不割.” , 裁斷也. 不割者, 不分彼此界限之意.

성인은 이러한 이치로써 세상에 응하고 머물며 나아가는데, 따라서 하늘과 땅을 기준으로 삼고, 만물을 모범으로 삼는다. 다시 말하면, (성인은) 하늘과 땅을 어우르고 아우르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는 하늘과 땅의 도와 덕스러움) 벗어나지 않는다. 만물을 휘어지게 하고 이루어지게 하는데, 따라서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가 없이, 저절로 그러한 바를 말미암는 만물의 본성과 본성의 명령과 저절로 그러한 바를) 거스르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른 바 성인은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마음을 텅 비운 채, 세상과) 어우러지고 아우러지며, 세상에 응하고 머물며 나아가는데, 따라서 사람을 분별함이 없고, 사안을 일부러 일삼음이 없다(27).” 따라서 (노자) 일컬은 것이다. “大制不割.” “(일부러 일삼아) 나누거나 가른다는 말이다. (따라서) “不割은 이것이나 저것, (그 내용이나 성격, 방향이나 태도, 의미나 관계) 범위나 한계를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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