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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르는 문화'에서는 가장 좋은 선생님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란다!

독립출판 무간 2016. 10. 31. 19:57

하루 종일 괭이로 밭을 일구고, 씨앗 뿌리고, 모종을 심고, 부엽토와 퇴비를 나르는 것이 요즈음 내 일과다. 내가 일구는 밭은 산 속 계곡에 있다.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다가 오래 전부터 버려둔 땅이다. 저수지 옆 솔숲을 따라 길이 하나 있는데, 이 길은 오솔길이어서 경운기가 들어올 수 없다. 지난 겨울에 뽕나무 뿌리를 캐 나르느라고 꽤 고생을 했다. 이 근처에는 인가가 없다. 외부와는 절연된 곳이다. 새소리를 벗삼아 일하다가 힘들면 앉아 쉬면서 계곡 물가에 서 있는 팽나무를 본다. 이 팽나무의 나이가 얼마인지 아는 사람은 이 마을에서 아무도 없다. 칠팔십 된 마을 어른들께 물어보아도 그 어른들 할아버지 할머니 적부터 그 나무 그늘에서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는 막연한 대답뿐이다. 몇 백 년은 좋이 되었을 이 나무는 놀랍게도 건강하고 싱싱하다. 나뭇가지들이 썩어 들어간 흔적이 군데군데 눈의 띄는데, 어느 정도 썩으면 그 썩은 곳을 스스로 떼어내고, 나무껍질로 그 곳을 단단히 봉해, 나무 속으로 빗물이나 곰팡이가 스며드는 것을 막는다.

나는 이 팽나무 할머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자연에는 낡은 것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준 분도 이 팽나무 할머니다. '기르는 문화'와 '만드는 문화'가 다름을 일깨워준 분도 이 분이다. 나는 새로운 일깨움을 얻을 때마다 이 할머니에게 마음속으로 고맙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인다.

나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 이 팽나무 할머니만큼 슬기로운 분을 만나지 못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이 분에게서 들은 것이다.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인류는 수백만 년에 걸쳐 진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그 진화의 결과로 현생인류가 나타난 때는 얼추 3만 년 전쯤이라고 한다. 이렇게 진화해 온 것이 잘된 일인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르겠다. 현생인류로 진화하면서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제 힘으로 살 길을 찾는 대부분의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꽤 오랫동안 부모의 보살핌 속에서 길러지고 살아남기 위한 교육을 따로 받아야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들의 경우에 학습을 통해서 살 길을 찾는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 본능에 기대서 살 길을 찾는다. 본능은 유전자에 새겨진 삶의 정보다. 떡갈나무는 도토리에게 이렇게 자라라고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 병아리도 어미 닭한테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가리는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래도 잘들 산다. 그런데, 사람은 자라면서 이 모든 것을 따로 배워야 살 수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인류가 유전 정보만으로 살 수 있는 길에서 벗어나 외부정보의 배움을 통해 따로 저장하려고 머리통을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해온 것이 과연 슬기로운 선택이었는지 잘 모르겠다고.

지금 우리는 이른바 '정보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제대로 살아남으려면 현생인류는 다시 진화해야 할지 모른다. 손발이나 가슴은 없고 머리통만 지금보다 열 배쯤 더 큰 생명체로. 그렇지 않으면 나날이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언제 익사할지 모른다. 팽나무 할머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얘야, 그 동안 머리만 키워온 불쌍한 얘야. 나는 지난 몇백 년 동안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200년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크게 걱정스럽지는 않았단다. 그때까지만 해도 너희 인류는 '만드는 문화'보다는 '기르는 문화'에 더 큰 힘을 쏟았거든. '기르는 문화'와 '만드는 문화'가 어떻게 다른지 내가 이야기해주련? '기르는 문화'에서는 가장 좋은 선생님은 사람이 아니란다. 자연이란다. 자연은 온갖 것을 다 길러. 너 곤충이 몇 종이나 되는지 아니?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백오십만 종이 넘는다는구나. 그리고 해마다 새로운 종이 만 종 넘게 발견된다는구나. 왜 번거롭게 그 많은 생명체들을 그르느냐고? 전체에 이로운 종만 길러내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그럴싸한 이야기로구나. 그러나, 사람이 사람으로, 풍뎅이가 풍뎅이로 살 수 있는 건 전체의 생명체를 서로 이어주는 그물망 속에서 자란다. 수십억 인구 가운데 생김새나 느낌이나 마음씀이 판에 박은 듯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건 그렇게 해야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꼭 같다면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어서 상호교류는 일어나지 않아."

(윤구병, 잡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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