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농민시장은 살아있는 음식유산을 보호하고, 다양한 문화와 완전한 제품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본문

먹는 이야기

농민시장은 살아있는 음식유산을 보호하고, 다양한 문화와 완전한 제품을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독립출판 무간 2016. 8. 10. 10:45

미식가에게 슬로푸드는 예술적인 음식이나 와인을 뜻한다. 또 쏟아지는 신제품을 발 빠르게 좇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런 생명의 리듬에 맞는 속도로 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슬로푸드에 공감하고 그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음식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슬로푸드를 통해 재래식 치즈에 애착을 갖게 되거나 여러 나라 여러 지역의 전통음식과 그 요리법을 알게 된다. 동물이나 식물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슬로푸드가 '미각의 방주'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칠면조에서 양이나 굴, 사과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옛 품종의 장점을 널리 알리고 그러한 종들의 보존에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회변화와 정치에 관심이 있다면 토지관리에 쏟는 슬로푿의 노력이나 그 토지에서 건강하고 일관된 방법으로 재배한 농산물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한자리에 모인다면 슬로푸드가 '부엌과 식탁의 즐거움이며 문화와 공동체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슬로푸드의 창으로 내다보는 세상은 다양하고 넓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미국의 농민시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곳이 슬로푸드 운동과 비슷한 면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약 100여 곳의 장터와 농장과 농민들을 찾아보고 나서 농민시장이 제공하는 것이 다름 아닌 삶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농민시장은 우리 식탁에 향내 나고, 아름답고, 살아있는 먹을거리를 올려준다. 어느 농민시장 한 귀퉁이에서 하찮게 보이는 물건을 하나 사들어도 실제로 얻는 것은 그보다 훨씬 많다. 파릇한 샐러드, 먹음직스런 달걀, 하얀 아카시아꿀, 울프리버 사과 바구니를 별 생각없이 사가지고 돌아와도 이미 대단한 일을 한 셈이다.

 

우리는 무심하게 바라보지만 사실 농민시장에 나와 있는 먹을거리는 모두 건강하고 꾸준한 재래식 방법으로 키운 것이다. 땅에도 좋지 않고 농민과 소비자에게도 해로운 농약이나 호르몬은 사용하지 않는다. 옛 방식대로 작물을 재배하고, 과실을 가꾸고, 동물을 기른다. 농민시장에 나와 있는 농산물은 원거리 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려고 생산한 것이 아니다. 같은 모양만 골라낸 것도 아니며, 배에 실어 먼 거리로 보내기 위해 방부처리를 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은 제멋대로이고 오래 보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엄선된 재래 종자로 접목했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에겐 최고의 맛을 지닌 전통음식이 된다. 어쩌다 솜씨가 뛰어난 장인을 만나면 훌륭한 고급음식이 되기도 한다. 위스콘신의 토종 배로 만들어 영양분이 풍부한 배버터, 뉴멕시코 농민들이 손수 가꾼 옥수수와 고추로 만든 타말레 등은 다른 곳에선 흔히 접하기 힘든 매우 우수하고 완전한 음식이다.

 

농민시장은 또한 계절감각을 누리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시도 때도 없이 사철음식이 쌓여 있는 슈퍼마켓이 아니라 철마다 다른 재료를 실감하는 장소다. 또한 농민시장은 질 좋은 먹을거리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쇄락해가는 농촌경제를 떠받치고 활성화시켜준다. 농촌 사람과 도시 사람을 자연스레 연결시켜주는 기능도 한다. 우리가 먹는 음식 재료가 가까운 곳, 잘 아는 곳에서 재배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마음도 놓이고 재배된 곳과 유대감도 생긴다. 음식 재료의 산지를 잘 알면 식탁의 즐거움은 한층 더해진다. 특히 요즘처럼 생산자를 만나볼 기회가 거의 없는 세상에서 농민시장은 그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장소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대감이 싹트고, 그래서 어떤 공동체 의식이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질을 높이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유대감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어느 날 어떤 계기로 지역 농민이나 생산자를 알게 되면 그들의 농장은 나와 각별한 관계를 갖는 나만의 풍경이 된다. 그래서 그 농장을 찾게 되고 관심을 갖다보면 그들이 가꾸는 농산물에도 새삼스런 애정이 생기고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농촌의 토지개발이나 수자원 문제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며, 그 곳의 아름다운 풍경도 전원적이고 전통적인 농업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될 때만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빠르게 돌아가는, 서로 단절된 도시생활에서는 병이나 근심이 떠날 날이 없지만, 어쩌다 농민시장에라도 들르게 되면 청량한 치료제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든다. 농민시장은 물건 사는 방법을 다시 배우게 하고, 삶의 조화로운 리듬을 회복시켜주며,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앉혀준다. 무엇보다 시장에서는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농민시장은 급한 마음으로 들르는 곳이 아니다. 천천히 맛을 느끼는 경험이 되어야 한다. 시장을 어슬렁어슬렁 다니면서 무엇이 있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여유를 갖고 친구들과 차도 마시면서 오래 머물러볼 일이다. 시장은 물건을 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 저녁식사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농민시장은 소중한 자원이며 영감과 즐거움의 원천이다. 이 곳을 이용하게 되면 식탁에서도 즐거워지고, 공동체의 일부가 될 수 있으며, 얼마 안 되는 셈을 치르고 물건을 사오는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두고두고 이어갈 전통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중략) 농민시장이 갖는 가치는 슬로푸드 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농민시장에서는 살아 있는 음식유산을 보호하고,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의 혜택을 누리며, 다양한 문화와 진솔하고 완전한 제품을 향유할 수 있다.

 

(카를로 페트리니 엮음 / 김종덕.이경남 옮김, 슬로푸드-느리고 맛있는 음식 이야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