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출판 무간
칡 : 끝이 시작에 물리고, 칡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본문
(사진출처 : Daum 검색 자연박물관 포토)
칡을 먹던 시절, 아이들 얼굴엔 종종 땟물이 흘렀다. 요즘 아이들처럼 하얗고 발그레한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칡을 잘근잘근 껌처럼 씹다가 단물이 다 빠지고 나면 퉤하고 뱉기 일쑤였다. 그 때는 칡만큼 좋은 간식거리도 없었다. 어른들은 또 주독을 푸는 명약으로 칡을 먹었고,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곡물에 버금가는 구황식물로 찾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칡에 대한 관심이 점차 시들해졌다. 먹을 것도 많아졌고, 간식거리도 많아졌으니까. 그러다가 수년 전 칡즙과 칡술이 붐을 이루면서 칡은 다시 우리 앞에 등장했다. 칡은 이제 옛날 아이들이 껌처럼 즐기던 간식이 아니라, 성인들의 점유물이 되었다.
예전에는 칡의 어린 순으로 나물을 해 먹거나 쌀과 함께 섞어 칡밥을 지어 먹었다. 칡뿌리는 굵어지면서 전분을 함유하는데, 칡뿌리를 걸러낸 녹말가루가 갈분이다. 갈분을 녹두가루와 섞어서 갈분국수를 만들거나 쌀가루를 섞어 갈분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갈분을 생강즙과 꿀로 반죽해서 만든 갈분과자는 어린 시절 별미였다. 어른들은 갈분을 묽게 쑤어 생강즙과 꿀을 섞어 숙취를 해소하는 데 쓰기도 했다. 또 갈분으로 만든 개떡도 즐겨 먹었다. 칡의 어린 순은 식재만이 아니라 약재로도 사용된다. 어린 순을 꺾어 말려 몸의 원기를 돋우는 약으로 쓰는 것이다. 칡을 원료로 한 갈근탕은 발한과 해열작용에 뛰어나 감기를 예방하거나 치료하고 숙취를 푸는 데 상용된다.
칡은 또 끈을 만들거나 직물을 짜는 데도 이용된다. 칡으로 만든 섬유로 '청올지'라는 게 있는데 이것으로 갈포를 짤 뿐 아니라, 새끼 대신 물건을 묶을 때도 사용했다. 칡덩굴은 주로 삼태기, 광주리, 바구니 등을 만드는 데 쓰였다. 칡줄기의 껍질을 뜬 물에 띄워서 속껍질을 벗긴 다음 끈을 꼬아서 소의 코뚜레를 메거나 연장의 자루를 메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갈포를 그저 벽지 재료 정도로 여기지만, 한때는 의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재였다. 이처럼 칡은 덩굴과 뿌리, 줄기, 꽃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활용되었던 자원가치가 매우 높은 식물이었다.
칡은 지금 한국 어느 산야에 가더라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산을 깎아지르고 돌무더기를 쌓아 무너지지 말라고 망사를 덮어놓은 곳에는 어김없이 칡덩굴이 있다. 토사의 유출을 막기 위해 사방용 식물로서 이용되는 것이다. 칡은 사실 척박하고 인간의 흔적이 드문 곳에서 제일 먼저 자라고 번성했던 식물이다.
절대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도시의 빌딩 숲.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가 현실로 나타난다고 가정해 보자. 도시가 파괴되어 인간이 떠난 자리. 그 자리에는 분명 칡넝쿨이 제일 먼저 자라날 것이다. 아마 도시 전체를 휘어 감고 있을 게다. 다시 살아나기 위한 생명의 몸부림으로. 칡넝쿨의 등장은 생명의 순환이 다시 시작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차라리 희망적이다. 끝이 다시 시작에 물리는 셈이니까. 미래의 어느 날, 칡넝쿨은 또 그렇게 우리 앞에 올지 모르겠다.
이렇게 먹자!
칡뿌리는 차를 만들어서 먹고, 즙을 내어서 마시거나, 뿌리째 소주에 담가서 먹기도 한다. 칡잎과 칡꽃에 같은 성분이 있어 똑같이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칡꽃의 향은 은은하게 그 일대를 적신다. 칡넝쿨이 있는 곳을 무심결에 지나다가 향에 이끌려 고개를 돌리면 어느새 자줏빛 칡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7월 하순과 8월에 피는 칡꽃을 조심스럽게 따서 칡꽃차, 칡꽃샐러드, 칡부각, 칡떡 등을 만들면 향이 그대로 배어나는 게 일품이다. 먼저 칡꽃을 따서 깨끗하게 손질한 다음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말린다. 말린 것을 그대로 유리병에 보존하거나 꿀을 부어 숙성시켜도 좋다. 꿀을 넣고 숙성시킨 것은 15일 정도 지나면 마실 수 있다. 잘 말린 칡꽃을 끓는 물에 넣고 10분 지난 다음 그 물을 마시면 해독이 된다. 과음한 다음날 위장이 뒤집힐 듯 구토가 일고 복통이 있거나 머리가 아프고 신트림이 날 때 마시면 매우 효과적이다.
(변현단 글 / 안경자 그림, "약이 되는 잡초음식, 숲과 들을 접시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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