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빈곤은 풍요로움과 환상이 빚어낸 병이다!
빈곤을 생각할 때 먼저 구분해야할 것은 전통적인 빈곤과 새로운 빈곤이다. 전통적인 빈곤은 대략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급자족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물질적으로 어려웠지만, 사람들은 이를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삶에 대한 만족도도 높았다. 물질적으로 어려웠으니 빈곤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빈곤은 외부로부터의 가치 판단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빈곤은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좀먹는 질병과도 같다.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 줄 거라 믿었던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이 새로운 빈곤은 지금 전염병처럼 지구상에 퍼져 나가고 있다.
반다나 시바는 이 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빈곤을 낳은 것은 '인간 대 자연'이라는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희소성이라는 개념을 '자연'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일방적으로 그 희소성을 보완하고 벌충하려고 하면서 여러 테크놀로지를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이러한 테크놀로지는 희소성을 벌충하기는 커녕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한층 더 가난하게 만들면서 역으로 희소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예를 들어, 바다는 수세기 동안 어민들에게 충분한 식량을 공급해 왔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잇따라 개발되었고, 마침내는 거대한 저인망을 가진 하이테크 트롤선이 출현해 바다 밑의 뿌리까지 훑어 내 해양이 지닌 생명 사이클을 파괴해 버렸다. 이제는 이러한 파괴적인 테크놀로지를 뒷밫침해 온 FAO(국제식량농업기구)조차도 세계 어업의 약 90펴센트가 붕괴의 나락에 처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들을 빈곤으로부터 지켜주리라 여겼던 테그놀로지에 의해 전에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던 소규모 어민들이 더 가난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시바는 인도의 다양한 사회 문제, 환경문제와 관련된 경험들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빈곤 문제의 해결책은 대부분의 경우 환경문제에 대한 깊은 탐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제3세계 소농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생물의 다양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양성을 더 살려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약과 제초제는 필요없는 자연 교배에서 의한 재래 종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공업화되고 가속화된 근대 농업에서는 농부들이 화학비료나 농약, 먼 곳에서 물을 끌어오는 기계를 사기 위해 거약의 빚을 짊어지게 되고, 그 결과 인도에서는 수천 만의 농부들이 자살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느리고 단순한 농법으로 돌아가는 일이 필요하다. 그 중 한 가지는 물을 따로 댈 필요가 없는 재래 종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귀중한 지하수를 무리하게 끌어올리기 위한 우물을 파지 않아도 되고, 이를 위해 빚을 낼 필요도 없어진다.
빈곤이란 '풍요로움'의 환상이 빚어낸 병이다. 이 병을 치료하는 데는 '인간 대 자연'이라는 대립으로부터 해방되어, 대자연이라는 본래의 풍요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선진국 사회도 이러한 빈곤과 무관하지 않다. 이반 일리히의 말에 따르면, 빈곤은 사람들이 시장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면 클수록 더 깊어진다. 즉, 산업 생산에 의한 풍요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손발이 비틀린 사람들이야말로 불만과 무력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전통사회 속에서 각자가 지녔던 살아가는 기술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 우리는 교육을 통해 '바람직한' 또는 '돈이 되는' 기능과 능력, 태도라는 가치(희소성이 높을수록 환금성이 커진다)를 획득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매우 오래 학교를 다닌다. 그 결과는 좁은 틀 속에 갖힌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전문성 바깥에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력하고 고립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희소성을 둘러싼 정신없이 빠른 경쟁 세계의 아득한 심연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이 전 세계의 빈곤을 한층 더 폭력적인 것으로 이어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바라는 풍요로움이 과연 이런 것들이었을까. 다시 한번 풍요로움이라는 말에 대해 정의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풍요로움은 안정된 생태계와 자족적인 공동체를 토대로 한, 느리고 성숙한 삶 속에 있을 것이다.
(쓰지 신이치 지음 / 김향 옮김, "우리가 꿈꾸는 또다른 삶, 슬로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