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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의 순언 19. 지혜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 도道에 대해 듣게 되면

독립출판 무간 2025. 6. 6. 19:18

제19장

 

 

(지혜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 도道에 대해 듣게 되면, (도탑게 믿은 채) 부지런히 일삼게 되고, 중간인 사람이 도道에 대해 듣게 되면, (도道에 대해 믿는 바와 의심하는 바가 반반이 된 채, 일삼는 바에) 자리하게 되기도 하고, (일삼는 바에 자리하는 바를) 잃어버리게 되기도 하며, 낮은 사람이 도道에 대해 듣게 되면, (믿지 못한 채, 도道에 대해) 크게 웃게 된다. (그런데 지혜의 수준이 낮은 사람이 듣고서 크게) 웃지 않는 바라면, (성인과 같이 지혜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 부지런히 일삼는) 도道가 되기에 부족하게 된다.

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지혜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 도道에 대해 듣게 되면, 도탑게 믿은 채, 의심하지 않게 된다. (지혜의 수준이) 중간인 사람은 의심하는 바와 의심하는 바가 서로 반반이게 된다. (지혜의 수준이) 낮은 사람은 믿지 못(한 채, 의심)하게 된다. (따라서 지혜의 수준이 낮은 사람은 도道에 대해 알아차리는 바) 밝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도道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바로 되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그는 도道에 대해 크게) 웃는 바를 더하게 된다. 그런데 (지혜의 수준이 낮은 사람이 알아차리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것이라면, 이른바 (지혜의 수준이) 낮은 사람이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찌 성인(과 같이 지혜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 (알아차리는) 도道이겠는가?

上士聞道, 篤信, 不疑. 中士, 疑信, 相半. 下士, 茫然. 不曉. 反加非笑. 若合, 於下, 所見, 則豈聖人之道哉.

 

 

(따라서 지혜의 수준이 높은 사람에 대해, 아주 먼) 옛날에 펼쳐지고 일컬어진 바가 있었는데, “도道(에 대해 알아차리는 바)가 밝은 사람은 (도道에 대해 알아차리는 바가) 어렴풋한 듯하다. 도道에게 나아가는 사람은 따라서 물러난다. 덕스러움德의 수준이 높은 사람은 (유위가 텅 빈) 계곡과 같다. (도道에 대해) 크게 (맑고) 밝은 사람은 (스스로) 자리하고, 더불어 한다. 티끌된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더러운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와.”

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上德若谷, 大白若辱.

 

건언建言은 ‘(아주 먼) 옛날에 펼쳐지고 일컬어진 바’라는 뜻이다. (명도약매明道若昧는) “도道(에 대해 알아차리는 바)가 밝은 사람은 (도道에 대해) 알아차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듯하다”(는 뜻이다). (진도약퇴進道若退는) “도道에게 나아가는 사람은 (유위有爲로부터) 물러난다. 저절로 그러하게. (따라서 도道에게) 나아가기를 잘하지 못하는 듯하다”(는 뜻이다). (상덕약곡上德若谷은) “덕스러움德(의 수준)이 높은 사람은 스스로 (무위無爲를 자신의 위로 높이고, 자신을 무위無爲의 아래로) 낮춘다. 마치, 계곡이 (스스로 유위有爲를) 텅 비우는 것과 같이”(라는 뜻이다). (대백약욕大白若辱은) “(도道에 대해) 맑고 밝은 바가 지극한 사람은 스스로 자리하고, 더불어 한다. 티끌된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더러운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와”(이라는 뜻이다).

建言, 古之所立言也. 明道者, 若無所見. 進道者, 退然, 若不能行. 德之高者, 自謙, 如谷之虛. 潔白之至者, 自處與有玷汚也.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

大器晩成.

 

(비유컨대, 점토를 둘러) 쌓는 바가 오래 된 다음에야, 솟아오른 바가 커지게 된다. 따라서 큰 그릇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積之久, 然後發之, 洪. 故大器, 不速成.

 

 

“(덕스러움德이) 큰 사람의 일삼음은 모자란 듯하지만, 그 일삼음은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大成若缺, 其用不敝.

 

(중국 송宋나라 때)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45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폐敝는 부서지고, 무너진다는 말이다. (덕스러움德의) 본체로서 (덕스러움德이) 지극한 도道는 (덕스러움德이) 크고, 오롯하다. 따라서 덕스러움德을 품어 안은 사람은 (유위有爲가) 부족한 바를 (더불어) 같이 한다. 따라서 그 일삼음은 아주 오래 가게 되고, 내내 새로워지게 된다.”

董氏曰, 敝, 敗壞也. 軆至道之, 大全. 而盛德, 若不足. 故其用, 愈久, 而愈新也.

 

 

“(무위가) 크게 넘치는 사람은 (유위를) 텅 비우는데, 따라서 그 일삼음이 (끝점을) 다하지 않게 된다.”

大盈若冲, 其用不窮.

 

도(道; 自然·性·德·無爲·命)는 (이미)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다. 따라서 (지혜의 수준이 높은 사람은 무위無爲를 자신의 위로 높이고, 자신을 무위無爲의 아래로) 낮춘다. 따라서 (유위有爲가) 텅 비고 텅 비게 된다. 따라서 (무위無爲가) 쌓이는 바가 더욱 두터워지게 된다. 따라서 (그) 일삼음이 이내 (끝점을) 다하지 않게 된다.

道, 備於己. 而謙. 若冲虛. 故積, 愈厚. 而用, 愈不窮.

 

동사정董思靖은 (『도덕진경집해道德眞經集解』 제45장 주註에서) 일컬었다. “(앞 문장과) 이 문장은 (그) ‘일삼음用’(에 대한 일컬음)을 더불어 했다. 이른바, (이 두 문장은 그 ‘일삼음用’에 대해) 일컬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전의 문장들과 이후의 문장들) 사이에 자리한 이 두 문장은 그 ‘일삼음用’을 일컬었다. 이전(의 명도약매明道若昧, 진도약퇴進道若退, 상덕약곡上德若谷, 대백약결大白若辱)과 이후의 문장들은 모두 (그 ‘일삼음用’에 대한 일컬음이) 생략된 문장들이다.

董氏曰, 此, 兼用. 而言. 愚按, 中間二句, 言其用. 上下, 則皆略文也.

 

 

“(무위에 대해) 크게 곧은 사람은 (무위에 대해 크게) 굽은 듯하고, (무위로써 일삼는 데) 크게 재주 있는 사람은 (무위로써 일삼는 데 크게) 서투른 듯하다.”

大直若屈, 大巧若拙.

 

(무위無爲에 대해 크게 곧은 사람은 유위有爲에 대해 크게 곧은)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한 채, (그들과 더불어) 다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무위無爲에 대해) 크게 곧은 사람은 (무위無爲에 대해 크게) 굽은 듯하게 된다. (무위無爲로써 일삼는 데 크게 재주 있는 사람은 일삼음에 있어서 자신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바를 (스스로) 굽히는데, 따라서 (그는 비유컨대 일부러 일삼는) 발자국을 가지는 바가 없게 된다. 따라서 그의 (무위無爲로써 일삼는) 재주는 (크게) 서투른 듯하게 된다.

與物, 無競. 故大直, 若屈. 曲當, 而無迹. 故其巧, 若拙.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알맞은 바가) 큰 말은 어눌한 듯하다.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알맞게 말하기를) 잘하는 사람은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말하지 않고,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말하는 사람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알맞게 말하기를)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대해) 미더운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대해) 미더운 말이 아니다.”

大辯若訥. 善者不辯, 辯者不善. 信言不美, 美言不信.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말하는 바를 일삼지 않음으로써, (말로서) 피어난 바가 반드시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理; 性·命·自然·無爲·道·德)에 알맞은 말, 그것을 “대변(大辯;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알맞은 바가 큰 말)”이라 일컫는다. (지혜의 수준이) 뛰어난 사람이 하는 말은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적다. 따라서 그(가 하는) 말은 어눌한 듯하게 된다.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알맞게 말하기를) 잘하는 바를 주인으로 삼게 되면, (반드시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말하는 바를 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물을 일부러 일삼아) 분별하여) 말하는 바를 주인으로 삼게 되면, 반드시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알맞게 말하기를) 잘하지 못하게 된다. 미美는 (일부러 일삼아) 화려하게 꾸민다는 말이다. (따라서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대해) 참되고 미더운 말은 반드시 화려하거나 아름답지 않게 된다. (따라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말은 반드시 (본래 저절로 그러한 만물의 이치에 대해) 참되거나 미더운 말이 아니게 된다.

不事乎辯, 而發, 必當理者, 謂之大辯. 吉人辭, 寡. 故其辯, 若訥. 以善爲主, 則不求辯. 以辯爲主, 則未必善也. 美者, 華飾也. 忠信之言, 不必華美. 華美之言, 未必忠信.

 

 

“(무위가) 큰 소리는 들어보더라도 (또렷하게) 들을 수 없고, (무위가) 큰 모양은 (뚜렷한) 모양을 가지는 바가 없다. (이른바) 도道는 (또렷하고 뚜렷한 소리와 모양이) 어렴풋하고 어슴푸레한 바로서, (지어 부를) 이름을 가지는 바가 없다.”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희希는 들어보더라도 (또렷하게) 들을 수 없다는 말이다. 도道가 (일삼는 바로) 나아감은 (또렷한) 소리를 가지는 바가 없고, (뚜렷한) 냄새를 가지는 바가 없다. 이른바, (도道의 일삼음은 또렷하게 소리를 들어보거나, 뚜렷하게 냄새를 맡아볼 수 있는) 사물됨을 남기지 않는 바를 몸으로 삼는다. (따라서 노자는) 일부러 일삼아 이름 지어 불러 “도道”라고 했다. (도道) 이것은 정말로 (지어 부를) 이름을 가지는 바가 없다. (이른바, 도道의) 몸과 일삼음은 (무위無爲를) 바탕으로 삼고, (무위無爲를) 드러내며,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어슴푸레하고,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으며, (무위無爲를) 품고, (유위有爲를 안는 바가) 어렴풋한 바(妙; 自然·性·德·命)와 하나가 된다. (따라서 지혜의 수준이) 어찌 중간인 사람과 낮은 사람이 (도道를 또렷하게) 듣거나 (뚜렷하게) 살필 수 있겠는가?

希者, 聽之不聞也. 道夲, 無聲, 無臭也. 而軆物不遺. 强名之曰道. 其, 實無名也. 軆用, 一源顯微無閒之妙. 豈中下士之, 所能聽瑩哉.

 

 

여기까지가 제19장이다. (이 장은 뜻한다) “(임금은) 받들고 밝혀야 한다. (무위無爲를 자신의 위로 높이고, 자신을 무위無爲의 아래로) 낮추며, (유위有爲를) 텅 비우는 (도道의) 덕스러움(德; 일삼음用)을. (더불어) 어우러져야 한다. 본래 저절로 그러한 도道의 몸(軆; 덕스러움德)과.”

右第十九章. 推明謙虛之德, 合乎道軆之本然.

 

(예컨대,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 따르면, 중국의 아주 먼 옛날, 주周나라) “문文 임금은 도道를 우러른 채, (또렷하게) 살필 수 없는 바를 (더불어) 같이 했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따르면, 중국의 춘추春秋시대) “안연顏淵은 묻기를 잘했다. (유위有爲를 일삼기를) 잘하지 않는 방법에 대해. 묻기를 많이 했다. (유위有爲를) 줄이는 방법에 대해.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었다. 이른바,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무위無爲를) 가득 채웠다. 이른바, (유위有爲를) 텅 비웠다. (유위有爲에서) 벗어났다. 이른바, (유위有爲를) 본받지 않았다.”

文王, 望道, 而如未之見. 顔子,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 若無. 實, 若虛. 犯, 而不校.

 

이른바, (“임금은 무위無爲해야 한다”, 이것이) 이 장이 뜻하는 바이다. (이른바, 이장은) 펼쳐서 일컫는다. 제13장의 “세 가지 보물”이 뜻하는 바를. (이른바, 이 장이 뜻하는 바는 “제13장의 세 가지 보물을 일삼아야 한다”) 이것에 이른다.

卽此章之義也, 申言十三章三寶之義者, 止此.